산에서 산다는 것

인연 따라 마음 따라

2009-10-12     관리자
저녁 솔밭 사이를 하염없이 걷노라면
산으로 출가하여 산에서 산 세월이 30년입니다. 저녁예불을 마치고 솔밭 길 산책에 나섭니다. 천변의 갈대무리가 손을 흔들며 반깁니다. 솔밭 길을 잠시 벗어나 들길을 걷기도 합니다. 들판의 허수아비는 투명한 햇살 청량한 바람에 옷소매를 펄럭입니다.
얼마 전 운문사 솔밭에 보행로가 생겼습니다. 매표소 입구부터 청청하게 뻗은 홍송들 사이로 흙을 깔아 만든 숲길입니다. 솔밭의 수백 그루 소나무들은 마치 산문을 지키는 신장처럼 장하게 서있습니다. 계곡을 따라 아치형으로 나무다리도 놓고 더러 나무 길도 깔았습니다. 오다가다 다리 아픈 이들 앉아 쉴 수 있는 의자도 있고 계곡 주변에는 넓은 갈대밭도 있습니다. 저 갈대로 빗자루를 만들어 내 어지러운 마음을 쓸어내 환하게 맑히고 싶습니다. 걸음을 멈추고 물가로 내려가 갈대 한 무더기를 가슴에 안아보기도 합니다.
맑은 솔바람 소리를 들으며 걷는 숲길은 더없이 상쾌하고 싱그럽습니다. 솔밭 사이를 하염없이 걷노라면 옳고 그름, 시시비비의 생각들이 사라지고 마음이 저절로 고요해집니다. 나는 요즘 매일 이 솔밭 길을 걷습니다. 얼마 전 내린 큰 비로 계곡의 물이 불어났습니다. 계곡을 휘도는 세찬 물소리가 통통거리며 가을 햇살에 부서집니다. 계곡물 소리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시사철 계절마다 다릅니다. 인생도 흐르는 길목마다 그 환희롭고 신산한 삶의 소리들이 다 다르겠지요.
오늘 산사의 밤하늘이 간만에 청명합니다. 산마루에 두둥실 뜬 달, 그 곁에 반짝이는 아기별들을 봅니다. 산창을 향해 베개를 베고 누우니 납자의 가슴속에도 보름달이 떠오릅니다. 창 밖은 온통 찰랑이는 달빛 물결로 충만합니다. 밤하늘의 동그란 눈망울 하나, 늘 내 곁에서, 나를 지켜보며 염려해준 저 밝은 눈길이 새삼 고맙습니다. 신장처럼 우뚝 서서 가람을 지켜주는 솔밭의 소나무들도 고맙습니다. 다들 고맙습니다.
내가 거처하고 있는 집은 ‘삼장원(三藏院)’입니다. 삼장원 담장 밖은 울창한 소나무 숲이요, 맞은편 큰 집은 ‘청풍료(淸風寮)’ 맑은 바람이 부는 집입니다. 맑은 솔바람 소리에 무시로 학인스님들의 경 읽는 소리 듣고 지내니 무상지복이 따로 없습니다. 가을 휘영청 밝은 달밤이라면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내가 산에 사는 소이연(所以然)이 이러합니다. 지금은 방학이라 학인스님들은 대부분 각자의 절로 돌아가고 한 반만이 남았습니다. 산사는 적막강산입니다.

마음을 알아주며 침묵으로 위로해주는 산
누군가 산의 정상에 오르길 좋아하는 사람은 산악인이고, 어디든 산을 즐기는 사람은 산락인(山樂人)이라고 했습니다. 얼마 전 여름 히말라야에서 죽은 산악인 여성이 있었습니다. 안타까운 죽음이었지요. 또래 산악인 모씨와 누가 먼저 14좌 고봉을 오르나 내기 경쟁에 쫓기다 결국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습니다. 그녀의 극락왕생을 빕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세계 최초, 최고 등정 따위의 허망한 욕심에 희생되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등정의 기록 따위가 어디 사람 목숨보다 중요하겠습니까? 누가 먼저 누가 몇 개의 산을 ‘정복’했는지, 산마저도 경쟁의 도구로 삼는 천박한 시류가 안타까울 뿐입니다. 산을 정복이나 소유의 대상이 아닌 친구로 여길 때 우리는 모두가 산락인이 될 것입니다.
푸른 산과 흰 구름으로 수행처를 삼고 솔바람 소리로 마음 알아주는 벗을 삼으라 했던 옛 사람의 말처럼, 산속에 사는 나는 산이 친구요 또 산의 친구입니다. 원효 스님은 「발심수행장」에서 “재주와 지혜가 있어도 마을에 살면 모든 불보살들이 슬퍼하며 근심하시고, 비록 도행(道行)은 없지만 산에 사는 사람에게는 성인이 환희심을 내신다.”고 하셨습니다. 아마도 수행자는 욕망이 뒤얽힌 세상을 벗어나 산에 살아야 된다는 말씀이겠지요.
산에 살면서 나는 그동안 너무 많은 말들을 했습니다. 경전에 있는 부처님의 말씀이나 옛 조사스님들의 훌륭한 말씀들을 늘 입에 달고 삽니다. 설명하려 하고 가르치려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좋은 말들을 하고 나면 갑자기 허망하고 부끄러워집니다. 나 또한 말만 앞세우고 실천은 더디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말하기 전에 많이 들으려고 합니다. 주장하기보다는 경청하려고 합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다른 이들의 신음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모든 얘기를 묵묵히 들어주고 침묵으로 위로해주는 산을 닮아 가려 합니다. 오늘도 고요한 솔밭 길을 걸으며 산의 음덕으로 인해 내가 오만 가지 욕망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벗어나 수행자로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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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광 스님 _ 1977년 운문사에서 명성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운문사 강원과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텍사스 주 ‘Southwest Zen Academy’에서 선(禪) 수련을 했다. 이후 영남대학교 대학원에서 미학 미술사를 전공하고, 철학과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운문사 승가대학에서 학인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자연을 사랑하고 평화를 노래하며 시낭송 음반집 ‘구름 나그네’를 출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