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와 보살

연구실 한담

2009-10-08     관리자
‘하늘도 무심하지’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열흘 간이었다. 때 이른 장마 끝에 태풍이 불고 또 폭우가 쏟아졌다. 산이 무너지고 강이 넘쳐 흘러 이 마을 저 거리가 모두 아비규환이었다.
 
일가족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는가 하면 물에 잠긴 집과 논밭을 내려다 보며 한숨을 삼키는 이재민이 한 둘이 아니었던 것이다. 오늘은 제법 뭉게구름이 떠오르고 파아란 하늘 위에 태양이 잿빛을 발하여 젖은 옷을 말리고 가재도구를 정리할 여유를 주고 있지만,
 
내일은 또 다른 태풍이 북상할 예정이라니 이 고통스러운 나날이 언제 그칠지도 모를 일인 것이다 이런 일을 다할 때마다 우리는 인간이 얼마나 왜소한 존재인가를 새삼 깨닫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흔히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이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지만, 대자연의 거대한 힘 앞에서는 우리들이 평소에 하찮게 여기던 미물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아니 인간은 오히려 그 미물들보다 못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신문지상에 보도된 두 장의 돼지들 사진은 그런 점에서 사뭇 충격적이다. 한 장의 사진은 범람하는 물 한복판의 어느 지점에 조그마한 둔덕이 섬처럼 솟아 있는데, 떠내려 가던 돼지들의 시체가 즐비한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도 생명을 가진 미물이라 그렇게 안간힘을 쓰고 있었는가 하고 생각하면 그저 그만인 보도사진인 것이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 보면 그 돼지들을 죽인 것은 하늘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사람이라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사람들이 그들의 먹이를 손쉽게 얻기 위하여 돼지를 기르기 시작한 것은 오래전부터의 일이다. 분명 야생동물이었을 돼지를 길들이고 후손들의 입과 배를 채우게 한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또한 만물의 영장이라는 자부심을 가졌을 법하다.
 
그러나, 돼지의 입장에서 보면 그 사람은 바로 야성을 앗아간 장본인인 것이다. 더우기 현대의 양돈법은 좀 더 많은 양의 고기를 얻기 위하여 여러 마리의 돼지를 움직일 틈도 주지 않는 좁은 우리에 가두고 살만 찌라는 것이 아니던가.
 
아무리 수재의 피해를 당하기 어려운 산 속에 산다고 하지만 산돼지가 물난리를 겪고 죽었다는 얘기가 없고 보면, 그 사진 속에 즐비했던 돼지들의 주검은 바로 힘없는 다리. 살찐 몸뚱이를 강요했던 인간들의 먹이 욕심에서 비롯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같은 가축이라 하더라도 그 야성이 어느 정도 발휘 되도록 놓아 기른 개들이 물불을 피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보아서도 이는 증명되고 남음이 있다.
 
이와 관련하여 불경은 간혹 우리들 인간의 능력이 다른 동물들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를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육체적이며 부분적인 능력이 동물들의 그것에 비하여 형편없이 모자란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우리들의 눈은 독수리의 눈보다 멀리 보지 못하고, 우리들의 코는 개의 코보다 민감하지 못하며, 우리들의 발은 사자의 속도를 따를 수 없다는 것이다. 또다른 하나는 현재와 미래를 투시하는 인간의 능력이 동물들의 그것에 비하여 현저하게 열등한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인간들의 천시를 받는 쥐들이 사나흘 뒤의 기후를 예측한다든지, 제비와 같은 철새들이 몇 달동안 살아야 할 집의 운세를 점쳐서 보금자리를 정한다든지 하는 능력을 갖고 있음에 비하여,
 
오히려 그 집에 살고 있는 인간들은 바로 눈앞에 다가오고 있는 재앙을 알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인간과 동물 간의 이와 같은 대비는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다섯 가지 요소라고 할 오온 즉 색 수 상 행 식이 모두 허깨비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연후에라야 참으로 지혜로운 삶을 영위할 수있는 가르침의 하나라 할 것이다.
 
내가 남보다 낫고, 내가 남보다 더 소유해야 하고, 내가 남보다 오래 살아야겠다는 허깨비같은 생각을 하는 한, 우리는 마음의 병을 다스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좁은 우리에 갇힌 돼지처럼 본성을 잃게 되어 어떠한 고통도 재난도 이겨내지 못하게 되고 말 것이 분명하다.
 
욕심을 버린다. 마음을 비운다는 말이 한 때의 유행어처럼 쓰이고 있는 세태이기는 하지만, 진정 나의 탐욕을 잠재우고 세상에 광명이 되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삶이야 말로 우리 인간들에게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재민을 돕자는 사랑의 손길이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고 있는 현상은 하나의 희망이 되고 있다. 어떤 이들은 해마다 연중행사처럼 이게 무슨 꼴인가 하는 경우도 있고,
 
또 어떤 이들은 한 때의 물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으로 제 할 일을 다 했다는 태도로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경우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웃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나누어 갖고 동포가 겪고 있는 재난을 덜어주려고 하는 노력은 매우 값진 것이라 할 수 있다.
 
본시 베풀고 나누는 일에 때가 있는 것이 아니로되, 지금은 시급한 때인 것이다. 먹을 것, 입을 것은 물론 거처할 곳을 찾지 못하여 허둥대는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웃에 있는데 나는 가진 것이 많지 않다고 수수방관할 때가 아닌 것이다.
 
어찌 큰 정성, 작은 정성을 가릴 때며, 어찌 내가 소유한 바의 많고 적음을 탓할 때라. 특히 보살행을 중시하는 불교에서는 보시를 제1바라밀이라 하여 인간 사회의 윤리적 이상으로 삼고 있지 아니한가. 보살행은 남으로부터의 강제나 종용에 의하여 걷는 길이 아니라,
 
그 마음에 무르익은 중생 구제의 서원의 힘에 의해 걷는 길인 것이다. 내것이 있어야 베풀수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일반 대중들의 생각이라면, 원래 내것이란 있을 수 없다는 참된 깨달음에서 베풀고 베푸는 것이 보살행인 것이다.
 
옛날부터 보시의 극치는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지 않는 마음을 갖는 것이었으며, 그렇게 하려면 부당한 소유욕을 부리지 말고 한때 내가 맡아 있게 된 이 법계의 재물을 적절하게 이웃과 나누어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베푼다는 생각 속에 잠재되어 있는 한쪽이 높고 한쪽이 낮다는 수직적인 인간 관계의 설정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벗어날 때 진정한 보살행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을 아울러 명심하도록 하자.
 
베푼다고 생각할 때에는 아무래도 명예욕이라는 또다른 욕망이 고개를 들게되는 것이다. 따라서, 언제나 나누어 가진다는 생각이 중요한 것이다 나누어 가지는 데에는 높고 낮음이 없는 수평적인 인간 관계의 설정이 전제되고,
 
그러한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한 보시 행위가 상호 끊이지 않을 때, 우리는 비단 이번 경우만이 아니라 늘 밝고 맑은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삼매의 경지를 맛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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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두환 ; 서울대 문리대 국문과졸업. 서울대 대학원 석사및 박사과정. 국문학박사. 현재 서울대 인문대 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