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얽매임으로부터 참생명의 해방

특집/ 출가, 그 영원한 자유의 길

2009-10-07     관리자
   불자라면 한번쯤 출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그만큼 출가란 엄청난 길이기도 하고 매력 는 일이기도 하다. 출가를 가리켜 ‘비 본래적 자기’로부터 ‘본래적 자기로의 회귀’ ‘영원한 삶의 적극적 추구’ 등등으로 묘사한다. 불교계의 제자리 찾기도 당연히 출가정신을 되새김으로서 시작되어야 한다고도 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출가의 의미, 출가정신은 무엇이며,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한번 짚어 봄직하다.
  출가(出家)라는 것은 기존의 세계로부터 전환(轉環)을 의미하는 한 개인의 삶에 있어서 변혁일 것이다. 하나의 거듭난다는 것 수없는 존재의 그림자를 이끌며 구축한 삶의 터전을 깨고 새로운 세계로의 출구의 시도, 그것은 정신적인 도약과 새 가치체계의 질서로의 편입을 의미한다.
이러한 출가의 본래적 의미를 궁구해 보면 불교에서 말하는 출가(승려가 되는 첫·입문)에 앞서 이미 석존 이전에 존재했다.
  정통 힌두교도는 학생기(學生期), 가주기(家住期), 임주기(林住期), 유행기(遊行期)의 소위 4주기를 거치면서 일생을 마치는 것을 삶의 이상으로 삼고 있다.
「마누법전」에 의한 바라문 남자의 경우 7세가 되면 입문(入門)식이 거행되고 세 가닥의 무명실을 꼬아 만든 성색(聖索)이 주어진다. 다음에는 스승으로부터 학업을 위한 여러 가지 규칙을 배우고 베다(Veda),를 비롯한 갖가지 성전(聖典)을 올바르게 학습해야 한다. 철저히 베다의 학습을 마치고 범행(梵行)의 계를 어기지 않은 자는 스승의 허락을 얻어 집으로 돌아가서 재산을 모으며 아내를 맞이하여 가장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면서 세속생활을 열심히 한다. 얼마 후 나이가 들어 중년을 맞이하고 또 대를 이러 아들이 있게 되면 모든 재산을 아들에게 양도하고 아내도 아들에게 의탁하거나 혹은 동반하여 숲으로 들어가 간소한 오두막이나 나무아래에 살면서 수양을 쌓는다. 그리고 더욱 세속에 대한 모든 집착을 버리기 위하여 숲에서 떠나 혼자 유행 생활을 하면서 일생을 마치는 것이다. 이것이 바라문 수행자의 출가의 의미이고 이러한 이상적인 생활을 실천하는 사람은 현대 인도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기원전 6세기 경, 즉 석존이 세상에 출현하기 조금 전에는 특히 동인도 지방에 쉬나마나(사문 : 沙門)라는 일군의 수행자가 있었다. 그들도 한곳에 거주하지 않은 출가자들이었는데 이들 출가 수행자들은 제식(齊式) 만능주의에 빠진 전통적인 바라문 지상주의에 대해 비판하고 사상적인 면에서 “우주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도덕이란 무엇인가?” 등의 문제를 추구하는 철학적 사색으로서 우주의 보편적인 나를 실현시키고자 수행했으며 그들은 사회, 경제 등 인간생활 전반에 걸친 격동기에 반(反) 바라문적인 행동양식으로 갖가지 행법과 사상을 주장했다. 대체로 이 시기에 갠지즈강 중류 유역을 중심으로 백화난만한 신흥사상과 종교운동이 일어났는데 그 사상의 주체적인 역할을 한 집단이 바로 이들 출가사문(쉬나마나)들이었다. 그들의 실태는 육사외도(六師外道)라는 이름으로 불교 경전에도 기록되어 있다. 자이나교(jiana)나 아지비카교(Agibiga) 등 후세에까지 존속하며 영향을 비친 출가자들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석존도 이와 같이 사문의 일원으로 출가수행을 시작했으며 또 출가사문으로 정각(깨달음)을 이루었다. 석존이 깨달음을 통해서 확립한 불교도 이러한 사상의 격동기(6세기 백화난만한 사상기)에 신흥종교의 하나로서 일어난 것이다. 따라서 불교는 인도에서 일어난 실존적 종교운동의 초기에 성립된 한 출가자 집단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실존적 종교운동으로서 출발하여 다양한 가치체계로 난립한 인도사회에 새로운 이념과 사상의 지평으로 많은 역사의 변혁을 이룩한 불교 그 수행자들의 출가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밝히는 것은 곧 그 종교운동을 주창한 석존의 출가의 의미가 어떤 것이었는가를 아는 일일 것이다.
  석존이 세속의 속박에서 벗어나 진리를 구하는 길을 가게 되는 첫걸음을 내딛는 사건인 출가에 관해서는 그 동기가 된 많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 중의 하나로 잠무 나무 아래에서의 명상은 출가의 의미를 잘 말해주고 있다.
  “석존이 부왕(父王)을 따라 농경제에 참석했는데 온통 도읍(성)안은 천궁처럼 장식되고 노예나 심부름꾼도 새 옷을 향수와 꽃다발로 장식한 채 씨뿌림의 축제를 벌이었다. 석존은 부왕이 식전에 참가하고 있는 동안 나무그늘(잠무나무 아래)에서 명상에 잠기는데 흙에서 막 기어 나온 어린 벌레가 새에게 쪼아 먹히고 그 새는 다시 독수리 같은 사나운 큰 새에게 잡아먹히는 광경을 목격하고 세상이 무상(無常)함을 느꼈다고 한다.
또한 「마하파니타숫타」의 경전이 전하는 「사문유관 : 四門遊觀」에서 “어느 날 부타는 유원으로 가기 위해서 곱게 꾸민 수레를 신두산 말에 메고 가던 중 머리는 희고 이는 빠진 채 지팡이를 손에 쥐고 부들부들 떠는 노인을 만남으로써 살아있는 것은 모든 것이 늙는다면 태어나는 일 자체가 고(苦)라고 느꼈으며 마찬가지로 죽음과 질병을 보고 인생의 덧없음을 알았고 최후로 출가 수행자를 보고 자신도 출가할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
  이상과 같이 힌두교에서의 세속에 대한 집착을 끊고 우주의 브라만 신(神)과 나의 영혼 속에 내재된 아트만(Ataman)과의 일체 즉 범아(梵我) 일여(一如)를 이루기 위한 출가나 또는 바라문의 그러한 기존의 가치 우주사상의 체계를 부정하고 우주와 인간은 무엇인가의 원초적인 물음으로부터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가한 쉬나마나(사문)들, 그리고 인간의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존재적 실상을 극복(해탈)하며 무명의 깊은 탁류에서 벗어나고자 출가한 석존의 출가가 의미하는 것은 이 세계의 일체(一切) 있음(존재)하는 것들의 무상성, 존재로부터의 해방하고자 함이다. 곧 존재의 얽매임, 우리의 욕된 집착이 만들어내는 구속성의 실체적 대상이 진실로 있음(有)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연기적 구조로써 상의 상존성의 총체적 현현이라는 깨달음의 출발, 상의 상존의 연기구조가 이 세계를 만들고 우리들을 자아를 지어(作爲)내는 것이다. 이 우주적 현상과 사회적 현사이 무상성에 의해 현현되고 있는 역사적 실체, 이 법칙을 올바르게 인식할 때 출가의 뜻있는 의미에 답하게 된다.
  전 생애의 일상을 통해 쉼 없이 몰려드는 삶의 번뇌의 고통, 순간순간 반딧불처럼 잠깐 왔다가 사라져간 기쁨들, 이런 존재적 실상들을 철저히 무상함으로 인식할 때 우리는 그런 집착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그리움과 사랑 그 열락의 미쁨을 받는 나의 주체가 실재의식이라고 고집하기 때문에 생로병사의 존재적 실상을 겪어간다.
  무상의 구체적 인식은 존재의 공성(空性)을 깨달은 것이며 그 존재의 공성이라는 것은 모든 인식구조와 존재구조로부터 해방된(해탈)을 뜻한다 그 해방이라 함은 번뇌, 고통, 슬픔, 기쁨들, 삶의 구체적 실체라고 믿고 있는 실재의식에서 해방되어 존재의 공성을 깨달으려면 인식으로부터 해방과 존재로부터의 해방을 뜻한다. 이 존재구조와 인식구조로의 자유야말로 바로 참 무상성의 올바른 실현이다.
  이러할 때 사문유관에서의 삶의 덧없음의 자각이나 잠무나무 아래에서 세계에 대한 인상의 고통을 느끼고 석존이 출가한 야생의 전환을 우리는 출가의 참 의미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 세계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비실재적이라는 것, 그것은 사물 사물의 연기구조로 엮어지는 것이라는 존재의 공성을 깨달을 때 우리는 참으로 우리 이웃 이웃의 세계가 고통하고 있는 삶의 중심에 서서 번뇌의 강물을 헤쳐 나갈 수 있다.
  존재의 얽매임으로부터 참 생명의 해방이 되는 것으로 우리 출가를 해내자. 어려운 시대 혼돈의 세계속에서 그런 출가정신을 회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