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하고만 맺는 인연도 있을 법한데

한 생각

2009-10-07     관리자
   지금부터 마흔 해 전쯤의 한 서러운 얘기다. 한 여름 장마철 산사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골을 덮고는 능선마루까지도 가려버린 비안개 속에서 작은 암자는 이승의 가장 깊은 바닥에 없는 듯이 웅크리고 있었다. 그리고 좁은 마루 끝 뜰엔 억수로 비가 쏟아져 내렸다.
  우리 셋, 스님, 상좌, 그리고 나그네 식객은 함께 받은 공양 상에 간간히 빗방울이 뿌려졌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이따금 바람에 실려서 여린 풀내음이 풍겨오면 그 걸 반찬 삼을 만큼 나그네도 어느 새인가 산사생활에 익어 있었다.
  나그네는 스스로를 가끔씩 하좌라 부르면서 어린 상좌를 웃기곤 했다. 상좌도 못되는 과객이니 아래 하자 붙여 마땅하지 않느냐고 익살을 떨 만큼 둘 사이에서 얼마큼은 스스럼도 지워져 가고 있었다. 탈랑 릴케의 서간집 한권 들고는 왔으나 그것보다는 잘 알지도 못할 「보조선사 법어집」에 초가을 돌배 맞보기나 하듯 서툰 입맛을 다시는 게 고작, 누룩에 술밥이 풀리듯이 암자 생활에 순하게 길들여져 가는 기척을 즐기는 나날이 계속되기 사순 남짓, 그런 어느 날 산사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지악스레 울어대는 청개구리 소리가 문득 사라진 탓이었을까···. 암자는 차라리 천 만 길 물밑 같았다. 빗소리를 빼고 나면 젓가락 놓은 소리가 간혹 가볍게 일곤 했을 뿐, 셋은 언제나 그랬듯이 침묵을 지키며 밥을 먹고 있었다.
  한데 그런 속에서 문득 스님이 입을 열었다. 화들짝 놀란 우리 둘은 들으나 마나 한 듯이 “하긴 그것도 인연이라면 모를까? ···” 스님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니 그건 입 속으로 구시렁댄 것이라고 바꾸어 표현하는 게 옳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나그네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이 단 한번도 스님이 나그네를 면전에 두고 입을 뗀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산사에 들였을 대도 스님은 본둥 만둥 했다. 때마침 해질녘이라서 여린 산바람이 불어서 지나간 자국을 바라보고 계실 뿐이었다. 그리고 그 뒤, 그 같은 분위기는 단 일순도 달라지는 법이 없었다. 늘 지척이 만리였다. 그러던 스님이 면대해서 입을 열었으니 나그네는 차라리 민망해서 마음과는 달리 스님을 건너다 볼 수가 없었다.
  “젊은 이, 아니 참 학생이던가. 저걸 보게나, 비 젖은 바위 말일세. 몇일 남지도 않았으니 계속 저 같이 있다가 가게나!” 말은 이어지자마자 이미 끝나고 없었다.
  상을 물리고 뜰로 내려서더니 이내 골 아래로 나 있는 돌층계를 밟고 있었다. 순간에 흠씬 비 젖은 장삼 뒷자락이 금새 시야에서 사라졌다. 빈 자리에 비안개가 몰려들었다. “비 젖은 바위마냥 있다가 가라”하시고는 스스로 비 젖어 보이시던 그 스님 그리고 그 소슬한 가르침, 때때로 빗기운에 살래서 되살아나지만 스님은 어찌하셨을까? 비하고만도 맺을 수 있는게 인연이란 것은 다만 진세만의 일이었을까? 속된 궁금증 차마 던질 수 없는데 먼 아득한 날 그 바위의 그 빗기운 가셨듯이 이제 내게 스님이 안 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