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聖地巡禮) 여행의 의미

이남덕 칼럼

2009-10-07     관리자
   여행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일상적인 현실생활에서 탈출하여 새로운 풍물을 대할 때의 그 ‘낯선’ 느낌에서
오는 신선한 충격이 있다고 하겠다. 이것은 문학작품을 우리가 애독하는 의미와도 같다고 생각된다. 사실 우리의 삶이 단지 주어진 현실 그것만 살아간다면 너무나 경험이 빈약한 단조로운 것이다. 때문에 영혼의 성장이란 점에서 보면 이러한 ‘낯설음’을 얼마만큼 많이 자기생활에 도입했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영혼을 얼마만큼 살찌게 하느냐 하는 문제와 유관하다고 볼 수 있다.
  지난 1월중에 나는 교수 불자단(敎佛聯) 일행에 끼어서 부처님의 성지순례 여행을 다녀왔다. 10여일의 짧은 기간에 마치 주마간산(走馬看山)격으로 지나쳐온 일이 못내 아쉽고도 마음에 송구스러울 정도다. 좀더 차분하게 참배하지 못했던가. 좀 더 가까이 부처님을 느낄 수는 없었던가. 성지순례란 다른 광광여행과는 근본적으로 그 의미가 다르다. 첫째는 참가자의 부처님을 향한 갈앙심(渴仰心)의 깊이가 문제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또 한편 선지순례의 참다운 의미는 여기 몇 줄의 글로 표현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이 당장의 단편적인 소감이 전부는 아니다. 그건 나도 의식하지 못하는 내 영혼의 깊은 곳에 오래 오래 간직되어질 것이라고 믿고 있다. 마는 그 경험을 아미 일차적으로 한 체험이 있다.
  내게는 인도여행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73년 2월, 나는 당시 8개월 동안의 일본체재 뒤에 길을 떠나 스웨덴으로 가는 도중에 대북(臺北)· 방콕· 뉴델리를 들르면서 며칠씩 그 고장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인도에서 나는 성지순례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노비도 빠듯했고 허락된 시간도 넉넉지 않았다. 스톡홀름대학에서 봄 학기 강의를 한다는 약속이 있었기에 중간도중에서 마냔 지체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경심한 것이 뉴델리에서 비행기 편으로 직접 갈 수 있는 바라나시(Varamasi)까지라도 가보자는 것이었다. 그곳은 갠지스강의 힌두교성지이기도 하지만 부처님께서 처음 법을 설하신(初轉法輪地) 녹야원(鹿野苑)이 바로 근처에 있는 곳이다.
  나는 외로운 단신 여행이었지만 마치 내 본고장에라도 온 것처럼 외로움도 두려움도 느낄 수가 없었다. 아쇼카왕(阿育王)이 건립했다는 녹야원의 큰 탑 앞 잔디밭에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감회에 젖기도 했다. 또 혼자 택시를 타고 갠지스강가에 가는데 북적대는 거리의 인파에 밀려 차를 내리고 바로 옆에 시체를 담은 들것이 지나가는 뒤를 따라가서 화장하는 광경을 목도하기도 했다. 어두워지는 강가의 여기 저기 불빛이 보이는 것이 다 화장하는 곳이라 했다. 사람들은 밤이 깊어도 강가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거기에서는 삶과 죽음이 하나였다.
  다음날 새벽 5시에 나는 다시 기차를 타고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신 부다가야로 향했다. 보통차 칸은 의자 없는 고삐 칸이라 사람들이 빽빽이 들어서서 이방인인 나는 사람들의 집중하는 시선에 견딜 자신이 없어서 일등차 칸에 탔다. 서울서 대전사이 거리밖에 안된다는데 부다가야에 기차가 닿은데 한나절이 겨웠으니 7시간이나 걸린 셈이다. 역전에서 약식 인력거 같은 ‘리끼샤’라는 것을 타고 부다가야의 대탑까지 가야 했다. 지리를 모르는 낯선 고장에서는 이러한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것이 목적지를 바로 찾아가는 안전한 방법이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때 여행에서는 만사형편에 내어맡기는 마음이었다. 부다가야에 도착하자마자 첫 번째 들어간 과일가게에서 과일을 사서 점심을 때우고 마치 잘 아는 가겟집인 듯이 여행가방을 그 집에 맡기고 나올 만큼 태평이었다. 그러면 또 용하게도 안내인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신문기자였다는 일본청년이 나타나서 여러 가지 현지사정도 알려주고 성지유적도 안내하고 숙소도 알아봐 주었다.
  내 일생에 있어서 종교적 회심(回心)의 계기가 된 가장 의미 있는 순간이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나가오고 있는 줄을 나는 몰랐다. 그 청년과 또 태국사원(寺院)의 한 승려와 그리고 여행안내소의 스리랑카 청년, 그리고 나 이렇게 국적이 다른 네 사람이 니련선하[尼連禪河 ; 비가 안 오는 건기(乾期)에는 강물은 없고 모래만이다]를 건너가서 수자타 처녀가 유미죽(乳糜粥)을 부처님께 올렸다는 마을로 들어갔다. 길가에는 우물도 있었다. 나는 물 한 모금을 얻어 마셨다. 세 사람은 앞장을 서서 부처님께서 보리수나 무 밑 금강보좌에서 정각을 이루시기 전에 처음 깨달으신 전정각산(前正覺山)이 저기라고 손으로 가리키며 흔히 우리나라 시골에 있는 뒷동산 같은 비탈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뒤에 혼자 몇 발자국 떨어져서 따라가던 나는 갑자기 등전체로 진동이 솟구쳐 올라오며 온 전신에 환희의 물결이 퍼져는 것을 느꼈다. 전율이라는 표현은 그 강도를 나타내는 데는 적당하나 상당한 시간 몸을 가누기 어렵도록 지속되기 때문에 진동이라고 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몸을 지탱하기 위하여 옆에 서있는 나무를 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눈물이 확 쏟아지며 아 이제까지 ‘기독교냐 불교냐’하고 내가 선택하는 것으로 잘못 알았던 것에 대한 뉘우침이 왔다. 자기 무지와 오만에 대한 참회의 눈물이었다. 종교는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선택받는 입장이었다는 것을 몸으로 깨닫게 된 그 감사의 마음은 형용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날 밤 부처님의 금강보좌 앞에 오체투지(五體投地)의 절도 마음껏 하고 부처님이 그 아래서 깨치었다는 부리수나무를 우리러 보고 부처님 발자취(佛足石)를 어루만지기도 하고 부다가야 대탑을 돌려 밤을 새웠다. 달이 밝은 밤이었다. 내가 불자(佛子)가 된 것은 그때부터다. 내가 몸담고 있던 직장이 기독교학교였던 때문만은 아니지만 종교에 대한 내심의 갈등은 내 힘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웠던 듯하다. 영원한 실존이신 부처님은 나를 건져주시기 위해 이러한 결정적 계기를 주신 것이다. 날이 새자 버스를 타고 라지기루(王舍城)로 향하였다. 영축산· 죽림정사(竹林精舍)터, 제1 결집처(結集處)· 나란다 대학터 등을 전날부터의 그 감동적 상태에서 순례하였던 것이다.
  17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부다가야의 그 환희심은 내 신앙의 터전이 되었다. 고단하고 지쳤을 때는 부처님이 내게 내리신 그 자비심을 생각했다. 또 그때 이후 나는 ‘감동’에 대하여 민감한 체질이 된 것 같다. 아름다운 음악이나 불상(佛像)앞에서 또는 눈 온 뒤의 깨끗한 경치나 절 도량 풍경 같은 데서 신성(神聖)한 느낌을 받으면 가벼운 전율이 온다. 그 뿐 아니다. 염불이나 주역(呪力)이나 절(禮拜)과 같은 종교적 수행도 궁극적으로는 그 환희심으로 귀착되는 것을 경험했다. 특히 광덕스님의 설법을 들으면서 느꼈던 무수한 감동의 순간들은 내 신앙심을 키우는 원동력이 되었다. 근자에 알게 된 것은 참선수행에도 이 환희심은 터전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번 여행은 먼저 번 때보다 범위가 넓어져서 부처님께서 나신 곳(룸비니), 돌아가신 곳(구시나가라), 오래 동안 설법하셨던 기원정사(祇園精舍)터 등까지도 포함되어 부처님 생존당시의 유적지만은 다 순례한 셈이다. 왕년에 갔던 녹야원이나 부다가야 성지에서의 감회도 각별했지만 새로 참배한 곳곳에서의 감동 역시 여기 다 기록할 수가 없다. 기원정사의 부처님 설법 터에서는 마치 부처님 슬하에 와서 부복하는 마음이었다. 꼭 부모 떨어져 외지를 방황하던 어린아이처럼 그 앞에서 흐느낌이 터져 나오는 것은 나뿐만 아니었다. 때마침 성도절(成道節) 주중이라 느낌은 더욱 간절하였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활동하셨던 지역은 인도북부의 항하 유역 지방이다. 항하가 벵갈만(灣)으로 흘러 들어가는 칼카타에서 시작해서 이 오지로 깊숙이 거슬러 올라가는 일대는 지금처럼 건기에는 대평야에 유채꽃과 밀대·녹두 콩나무가 심어져 비옥한 농토처럼 눈앞에 끝없이 전개되어 있지만 일단 우기(몬슨)철이 오면 항하가 범람하여 대평야는 홍수로 인한 불바다로 변한다는 것이다. 연도에서 볼 수 있는 인도의 빈곤한 참상은 우리들의 밤잠을 앗아갈 정도였다. 부처님 당시에도 계급제도가 심했다하니 청년 싯달타(悉達多)태자의 사회 불평 등에 대한 고민은 어떠했을까. 불교의 자비평등(慈悲平等)의 가르침은 그러한데서 강조된 것이 아닐까.
  이제 우기가 닥쳐 장마가 지면 한데 잠자는(露宿) 집 없는 인도사람들은 어떻게 지낼 수 있을까 삶의 최저한의 생존조건도 갖추지 못하고 정신주의로만 참아나가는 그들의 참상과 함께 소위 선진국대열에 낀답시고 안간힘을 쓰며 극도의 경쟁 속에 하루하루 인간성이 황폐해가는 우리들의 물질지상주의의 참상을 생각한다.
  ‘너’는 ‘나’의 거울이다. 너와 나 우리 모두의 참다운 삶이란 이러한 양극단에는 있지 않을 것이다. 부처님이 오늘날의 인류의 삶의 형태를 보신다면 중도(中道)를 상실한 우리들의 삶을 어떻게 보실까.
  이번 성지순례 여행의 의미는 내게는 아직 무어라 말할 수는 없으나 좀더 부처님께 가까이 가는 여생이 되도록 살기를 기원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