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삶이 곧 불교다

이야기 삼국유사

2009-10-06     관리자

우리는 흔히 나이를 따짐에 있어서, ‘우리 식’과 '만(滿)'의 이중체계를 갖고 있다.

 그런데 두 가지 중에서, 정확성을 기하는 서류에는 주로 '만'으로 된 나이를 쓰는 경우가 많다. 이때의 나이는 세상에 나와 태양과 마주하기 시작해서이다. 즉 사전적으로 '제 돌이 꽉참을 나타내는 말'로 쓰이는 것이다. 현상적인 기준에서 눈에 보이거나 손에 만져지는 순간부터 생명으로 인정되었음을 시사한다. 하지만 '만'으로 나이를 쓸 때마다 뭔가 께름칙한 느낌이 든다.

 나만이 그렇지는 않으리라. 생각해본다. 왜일까? 잃어버린 세월에 대한 아쉬움은 아닐까? 어머니 태(胎)에서의 열 달, 그 시간이 엄연하였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일러스트/권정희
 공인(公認)이라는 합법화 과정을 대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한국불교사에 있어서, 최초로 불교가 공인된 시점을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으로 잡는 데에 이견은 없다. 이로부터 한만족의 삶 전반에 불교가 등장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공인의 진정한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이로부터 신앙생활에 공권력이 참견하지 않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불교가 국가적인 공인을 받는다는 수동적 (受動的)인 입장만 내세워져서는 곤란하다. 그것은 결과에 불과하다.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다. 하나의 사건이 발생하려면, 걸맞는 원인이 제공되어야 한다. 스스로에 의한 능동적인 움직임이 없었는데, 저절로 사건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아니다. 빙산의 일각(一角)이라는 말마따나 갖춰진 힘이 드러난 것이지, 없던 것이 갑자기 사회의 전면에 등장할 수는 없다.

 그럼 여기서 잠시 나들이를 하자. 상황설정에 필요한 또 다른 조건과 만나기 위해서….

 어떤 종교든 새로운 문화 속에 뿌리내리는 과정이 있기 마련이다.

 이를 토착화(土着化, emplantation)라고 한다. 일종의 종교라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구도 설정이지만, 시사하는 바는 크다.

 물론 종교는 삶과 분리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종교는 고정되어 있는 모습만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특정한 곳과 때를 따라서 달리 표현되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어떤 종교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려면, 다음의 양방향(兩方向)이 한 점에서 만나야 가능하다. 즉 받아들이려는 수용자(受容者)와 그 심성에 토착화하려는 전달자의 입장이 그것이다.

 그레이슨(J.H.Grayson)이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토착화란, 결국 종교의 성장과 발전을 기대하는 것이다. 이에는 전제가 있다.

 다음의 다섯가지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하는 것이다.

 첫째, 새로운 종교가 전하는 가치와 기존 문화의 핵심적인 가치 사이의 마찰 해결.
 둘째, 그 사회의 지배층에 의한 수용 또는 최소한의 관용.
 셋째, 언어적인 장벽의 극복.
 넷째, 그 문화의 다른 종교나 철학과의 갈등 해결.
 다섯째, 새로운 종교의 가르침을 수용하려는 일반대중들에 대한 정치적인 조건 .

 이를 참조하여 우리는 조심스럽지만, 극히 당연한 하나의 가설(假設)을 세워보자. 불교의 국가적인 공인에 앞서서, 구체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불교인이 사회의 일각에 상존하고 있었으리란 것이다. 그것도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세력으로 인정될 만큼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무엇을 공인했다고 하는 대상(對象)이 허구로 끝나게 된다. 또한 공인이 이루어졌을 때 쯤에는, 위에 나열한 토착화 조건들이 상당한 수준까지 충족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 기왕의 신앙인들을 소외(疎外) 시킨다면, 역으로 권력이 다수로부터 소외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곧 공인이라는 합법화(合法化)과정이, 사실은 만연되어 있던 불교 신앙생활을 추인(追認)한 수준을 넘지 않으리란 것이다. 때문에 기존 불교도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불교는 이미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굳이 달라졌다면, 숨어 행하던 삶의 방식에 더 이상 거리낌을 갖지 않아도 된다는 정도다.

 더구나 국가권력에 의하여 공인화가 추진되었을 때, 상황은 반전(反轉)한다. 탄압의 주체였던 국가가 오히려 협력자 내지는 동반자적 관계로까지 등장하기도 한다. 이런 힘이 더해지면, 신앙의 돌출 강도는 자못 강하게 된다. 이전까지의 억눌림에서 오는 역반응( 逆反應) 이기도 하지만, 그 확산의 폭이 증푹되는 것은 당연하다.

 결국 불교 자체적으로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기에, 공인이 가능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로부터 순풍(順風)을 만난 불교라는 뗏목, 이 땅에 사는 생명들의 괴로움을 보듬어 안는다. 고해(苦海)를 헤쳐가는 사공을 수시로 등장시킨다. 이 땅이 바로 불국토 (佛國土)임을 증명하는 보살들을…

 그렇게에 삼국유사(三國遺事)는 뚜렷한 흐름을 갖는다. 우리의 삶과 불교를 따로 떼어놓을 수 없다는 강한 확신이 그것이다. 곧 인위적으로 분리하려는 시도는, 코끼리 다리를 만지는 것과 다르지 않는다 말이 된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의 평범한 남자를 상정해보자.

 그는 선거철이면 정치권을 행사한다. 직장에서는 생활인으로 일에 매진한다. 집에서는 가장(家長)으로 자리한다.

 그렇다면 그는 정치인인가? 직장인인가? 아니면 가장인가? 어느 하나도 그가 아닌 것은 없다. 그의 삶은 모두 에 해당한다. 때와 곳에 따라 삶의 표현이 그렇게 다르게 되었을 뿐이다.

 이와 같이 불교는 우리 삶의 전체의 내용이며 표현이다. ‘사회학적’이니, ‘역사학적’이니, '국문학적'이니 하는 구별은 공연한 분류에 지나지 않는다.

 불교를 다른 체계와의 종속이나 독립관계로서가 아닌, 총체적(總體的)인 관계로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참된 삶을 의미하는 상징체계가 불교 인 것이다. 어찌 불교를 '~적(的)'이 라는 미적지근한 말로 얼버무릴 수 있겠는가? 이는 시대나 장소를 달리하지 않는다.

 삶은 불교에 근거한다. 불교는 삶으로 구체화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