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스승

나의 믿음 나의 다짐

2009-10-05     관리자

내가 이 세상에 머문 시간은 55년이다. 남편을 만난 것은 26년째이고, 아들을 만난 것은 23년째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만나는 사람 모두가 스승일 수 있었다. 아니, 관세음보살이고 지장보살이고 신장님이었다.
 
 어렵게 만난 아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론 딸 아이가 대학 일차 시험에 떨어지고 2차에 붙은 충격도 가미되었지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보내야겠다는 마음에서 내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들과 같이 공부하는 것이었다.

 다른사람은 절에 가서 백일 기도를 하고 입시기도를 하느라 하루에 천배씩도 하는 열의를 보일 때 나는 야간불교대학에서 강의를 듣느라 바쁘게 다니고 있었다. 뜨거운 줄 알고 쥐는 쇠붙이는 모르는 쪽보다 덜 다친다는 말씀처럼 불교의 실상을 좀 더 알기 위해 불교대학에 입학을 하게된것이다. 이론으로 접한 불교교리는 너무도 심오하고 어려워 갈수록 앞이 답답했다.

 학기가 끝나자 해탈관에 대해서 쓰라고 과제가 주어졌다. 맛만 본 것 같은데 해탈관에 대해 쓰라니 막막할 수 밖에 없었다. 곰곰이 생각하다가 깨달음의 경지에 머물렀던 고승들의 법어집과 열반송을 열심히 읽으면서 그 경지속에 함께 머물기도 해 보았다. 그즈음 하루는 참선을 하고 있는데 무엇인가 체중이 내려앉은 것같이 속이 후련해지면서 온몸의 기가 자유자재로 통하는 것을 느꼈다. 물론 머리가 맑아지고 이제까지 깜깜했던 경전들이 입으로 술술 풀어지면서 거뜬하게 리포트가 작성되었다. 물론 뜻도 제대로 모르는 채.

 그 후 삶에 자신감이 들고 그 누구도 두려운 사람이 없어졌다. 어떤 문제가 안 풀릴 때는 절에 가서 백팔배만 하면 어느덧 후련하게 해답이 풀리곤 했다. 그런데 그 당시 내가 다니던 절에는 이상하게도 신도회가 구성되지 않았었다.

 승가의 의미가 화합단체임을 채득한 나는 내가 부처님에게 받은 무한한 힘을 이상적인 불교단체를 만드는 것으로 회향하리라 다짐하였다.

 아들 딸이 무난히 대학교를 들어간 것이나 남편이 박사학위를 받은 것이나 다 부처님의 가피력임을 긍정하는 이상 나는 자비단체를 꼭 만들고야 말리라 거듭 다짐했다. 다행히도 총무스님으로 오신 분도 같은 뜻이라 힘들지 않고 방생회라는 자비단체도 만들수가 있었다.

 실천 방안으로 부모님이 돌아 가실 때 금강경을 읽어드리고 조위동참을 하기도 하였다. 원하면 화환도 보내기도 하였다. 그밖에도 일주일에 한번씩 법문공부도 하고 장학금을 주고, 성지순례도 하고 선방 방문을 하기도 하였다. 4년이란 세월 속에 37명이던 신도가 140명이라는 큰 숫자가 되었다. 후생사업으로 참기름을 짜다 팔았는데 그 수익이 천만 원을 육박했다. 참으로 부처님의 가피력은 한 단체를 자비로써 키워주었다.

 이 모든 일이 제대로 될 즈음 그 어렵다는 아파트가 당첨돼서 분당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너무도 많은 일들이 실현되는 것을 보고 스스로 감격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만은 금물이었다. 딸을 시집보내고 나서부터 차츰 몸이 쇠약해지면서 삶의 의욕이 상실돼 가고 있었다. 입에는 어느 음식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모든 음식이 비리고 느글거렸다. 온 몸이 갑갑하고,가슴은 통증으로 움직일 수 없고, 오른쪽 팔은 마비가 오고 있었다.

 삶의 의욕이 상실되면서 절에 가는것, 사람을 만나는것, 이 모두가 의미가 없었다. 병원조차 기피하고 싶었지만 하는 수 없이 종합 진찰을 받았다. 자궁 폐쇠증에 무기력증, 장이 약해지는 이상한 병이 진행되고 있었다. 약은 먹으면 전부 토해서 먹을 수가 없었다. 식구들이 알까봐 조심하면서 죽음의 그림자를 의식하였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것은 죽음이 두렵지가 않았다. 다만 아직 아들을 결혼 못 시킨 불안감이 더 살아야 된다는 안간힘을 쓰게 만들었다. 어떤 경우에도 내 삶의 마지막은 누구에게도 해를 주어서는 안된다는 강박관념이 들었다. 아들 얼굴만 보면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면서 안타까워졌다.

 만나는 사람마다 수척한 내 얼굴에 관심을 쏟지만 나는 진작 죽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내가 없는 이 세상에서 나대신 길을 밝혀줄 불경을 아들에게 남겨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선 쉽게 금강경 풀이를 하였다. 아주 빨리 터득하하고 사문 사구로 송을 썼다. 부처님 일생도 썼다. 그분의 삶을 알아야 불교를 안다는 생각 때문에 근본교리를 조금썼다.

 하루는 아들에게 이 글을 읽어 보라고 넘겨 주었다. 아들은 그 글을 보더니 컴퓨터에 입력하겠다고 자청하였다. 나는 너무나 고마워서 그날부터 선가귀감의 송을 불렀다. 서산대사가 후진을 위해 쓰신 선가귀감은 나에게 는 언제나 스승이었기에 그것을 아들에게 읽게 할 욕심으로 부지런히 붓으로 옮겼다. 그리고 육조단경, 가장 좋아하는 선종의 육조 스님 말씀을 송으로 붙였다. 힘들다는 생각보다 확실한 자신감에 밤새는 줄도 몰랐다.

 어머니를 인정해 주는 것 같은 아들의 눈빛에 너무도 속으로 감격해서 열심히 밥도 먹고 약도 먹고 산에도 가기 시작하였다.

 매일 아침 여섯시에 도서관으로 가는 아들을 배웅하고 곧바로 산에 올라가 나무기둥에 아픈 가슴을 문지르곤 했다. 답답하고 쓰린 가슴이 차츰 골이 터지듯 내려가기 시작하면서 땀이 나고 피가 돌기 시작함을 알았다.

 사실 피가 안 돌아 손발이 저려서 머리를 항상 흔들어 피를 돌리곤 하였었다.

 팔, 다리, 위장, 얼굴, 머리 어느 곳하나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던 온몸이 차츰 가라앉기 시작하였다. 신기하고 이상했다. 더불어 무기력하던 마음이 생기가 나는것을 알았다.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못하던 운전도 다시 하게되고, 그림공부도 다시하게 되고, 붓글씨도 다시 하게되었다. 영원히 못쓸 것 같던 행서화체나 난 그림 등이 이 모두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술술 써졌다.

 더욱이 신앙에 자유가 오고 있었다. 성철 스님의 예수도 있고 마리아도 있고 석가도 있는 그 한 자리가 내 눈에도 보였다. 산에 가든지 연수원을 가든지 종교는 가지 각색이고 오히려 신홍 종교인 기독교인이 숫자적으로 우세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서도 거리감 없는 친숙함을 스스로 맛보면서 다행함을 알았다.

 한때는 내 존재를 의심하면서 자식의 성숙도 순간이고 남편의 성공도 잠깐의 위안일 뿐 병든 나 자신과는 무관한 것이라는 자책감에 자살까지 마음 먹었었다. 그러던 내가 다시 나이를 잊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게 되니 그 기쁨 말할 수가 없다. 이 모두가 자식때문이고 부처님의 말씀을 되씹은 때문인 것이다.

 결국 아들 때문에 육신에 온 병마를 이겨낸 셈이다. 아들에게 내가 한 불교공부를 보여야 된다는 일심으로 열심히 먹고 마비된 손을 움직인 것이다.

 무념은 앉아 있는 것에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무엇인가 열심히 할 때가 진정한 무념이고 무아임을 알았다. 전에는 불교대학에서 이론으로 부처님 말씀을 이해하였지만 지금은 생활속에서 문득문득 부처님의 뜻을 터득하게 된다. 이 모두가 진정한 자유를 알게 하고 또 끊임없는 일행 삼매의 닦음을 실천하게 하는 것이다.

 만남의 폭의 넓어지고 자유로우니 어디를 가든지 걸리는 것없고 즐겁기만 하다. 산에 가면 산에 간 대로 많은 부처님이 계시고, 거리에 나가면 그곳이 만다라꽃이 된다. 울긋불긋 성철스님의 사리처럼 아름다운 구슬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기쁨을 충만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