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亡名] 노보살님의 선기(禪機)

우바이만세 여성불자만세

2009-09-22     관리자

지난 2월 타이완 타이뻬이(蔓北)시에 있는 린지츠안쓰(臨濟禪寺)를 방문하였다. 전부터 알고 있는 따오쥐에 (道覺) 스님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따오쥐에 스님은 타이완의 남부도시 까오시옹(高雄) 시 출신으로 타이완 국립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하다가 뜻한 바 있어 불문에 들어온 젊은 비구스님이다. 물론 린지츠안쓰가 상주하는 곳은 아니며 주로 행각하기를 좋아하여 한 곳에 오래 정착하지는 않는다.

 도착하는 대로  오후에 린지츠안쓰를 찾았더니 따오쥐에 스님은 차까지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몇 권 안 되는 불서가 책상 위에 놓여 있었는데 방금 읽던 중인 듯 연둣빛 표지를 한 책이 펼쳐져 있었다. 무슨 책이 냐고 했더니 『우떵후에이위앤(五燈會元)』이라 했다.

 송나라 때 푸지(善濟)가 쓴『우떵후에이위앤』은 모두 20권으로 상 · 중 · 하 세 책에 갈무리되어 있었다. 무슨 재미난 얘기가 있느냐고 했더니 따오쥐에 스님은 읽을 수 있으면 직접 한번 읽어보라고 했다. 『우떵후에이위앤』제6권 「왕밍따오풔(亡名道婆)」조였다.

 거기에는 네 사람의 이름없는 여성불자님의 얘기가 나오는 데 '따오풔' 라고 하듯 선(禪)의 예리한 기운이 번뜩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내가 불광지에 이미 연재한 것으로 "풰즈사오안 (婆子燒庵)', 즉 「암자를 불태운 노파」와 팡거사(龐居士)의 부인인 '팡풔(龐婆)', 즉「어떻게 회향할 것인가」에서 다룬 것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더 있는데, 그 중에 한 노보살님에 대한 얘기를 따오 쥐에 스님은 사족을 곁들여가며 재미있게 얘기해 주었다. 따오쥐에 스님도 중국불교사에 숨겨진 이름없는 여성불자님들에 대해 관심이 많다고 했다.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분야인 줄모르는 그는 내게 여성불자님들에 대해 많이 좀 다뤄 보라는 말까지 잊지 않았다.

 많은 얘기를 나누다보니 꽤많은 시간이 흘렀다. 우리는 그러면서 허핑똥루 (和平東路)의 한 쑤츠아이츠안팅(素菜餐廳), 즉 육류, 어류가 일체 들어가지 않는 음식점에서 저녁공양을 하고 다시 린지츠안쓰로 돌아왔다.

 그러면『우떵후에이위앤』제6권 에 나오는 노파의 얘기는 어떤 내용일까.

 어떤 스님이 미후(米胡) 선사를 참예하고 돌아오는 길에 암자에  사는 한 노보살님을 만났다. 스님이 물었다.
 
 "보살님께서는 권속이 있으십니까?"
 느닷없는 질문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노보살님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권속이 있고 말고요. 그런데 왜그러세요? 스님"
 스님이 말했다.
  "지금 어디 있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노보살님 혼자이신 것같은데요."
 노보살님이 대답했다.
 "산하대지(山河大地)와 온갖 초목들, 그리고 기는 짐승, 나는 새들이 다 나의 권속인데, 그래 스님의 눈에는 보이지가 않습니까? 만일 보이지 않는다면 분명 스님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그려."

 스님이 정색을 하며 나무라듯 말했다.
 "노보살님, 조금 겉넘은 것 아니십니까? 혹 비구니 행세라도 하시렵니까?"
 노보살님이 대답했다,
 "비구니 행세라니요? 스님께서 보시기에는 늙은이가 뭐로 여겨지십니까?"
 스님이 말했다.
 "속인으로 보입니다."
 노보살님이 단호하게 말했다.
 "제가 만일, 스님께서 보시기에 속인으로 보이신다면 스님은 제가 보기엔 스님이 아닙니다."

 스님은 화가 치밀었다. 마음 속으로 부터 치밀어오르는 부아를 감추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노보살님, 보살님은 겉넘어도 한참 겉넘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삼보를 회롱하시면 못씁니다. 불법을 혼란시키고 외람되게 하는 일은 결코 용서할 수 없으니, 차후로는 조심하십시오."

 하지만 노보살님은 조금도 흔들림없이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저는 결코 불법을 혼란시키거나 외람되게도 하지 않으며 더욱이 삼보를 희롱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다만 진실을 말할뿐입니다."
 스님이 따지듯 다시 소리를 질렀다.
 "노보살님께서 지금 하시는 꼴을 보니 그게 바로 불법을 혼란하고 외람되게 함입니다."
 노보살이 웃으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은 남자요, 나는 여자입니다. 이처럼 본지풍광(本地風光)이 역연한 데 혼란과 외람됨이 어찌 있겠습니까?"
 스님은 할말을 찾지 못했다.

 위의 내용을 대하면서 우리는 몇가지  노파의 예리한 선기(禪機)를 감지할 수가 있다. 우선, 미후(米胡)선사는 웨이산링여우(僞山靈祐 761ㅡ853)의 법을 이은 고승으로 생몰연대는 자세하지 않으나 대체적으로 9세기 사람임을 짐작할 수 있으며, 그 미후 선사를 참예하는 객승이었다면 이얘기는 9세기 중엽으로 보아 무난할것 같다.

 이처럼 고승을 참예한 객승이었지 만 그의 내면에는 이른바 승려, 즉 성직자라는 딱지가 덜 떨어져 있었다. 노보살님은 바로 그러한 납자의 딱지를 떼어 주기 위하여 문수나 관음의 시현(示現)이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둘째로 위의 대화에서 보이듯 노보살님은 산하대지, 온갖 초목, 기는 짐승, 나는 새들이 모두가 권속이다. 즉 눈에 보이는 온갖사물들, 귀에 들리는 온갖 소리, 그리고 냄새 맛 등 갖가지 대상들이 바로 자신의 권속이라는 날카롭고도 푸근한 마음을 갖고 있다. 권속이란 바로 자신의 분신이란 뜻이다. 자기 본래면목과 온갖 대상을 나누어 본 것이 아니라 하나로 본 것이다.

 깨달은 자에게 있어 이들은 이미 둘이 아니다. 하나다. 영원한 서클이다. 항상 함께 더불어 존재함이다. 노보살님은 이미 깨달음에 서 있었다. 깨달음에 서 있었기에 미혹의 세게도 함께 싸 안을 수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미혹과 깨달음은 본디 하나였다. 그러나 원만함 속에 차별이 있다. 그것이 바로 세번째로 지적해낼 수 있는 차별의 원리다.

 노보살님은 말했다. 부드럽게 했다.
 "당신은 남자요. 나는 여자입니다. 이미 이처럼 본지풍광, 즉 본질과 현실이 역연한데 혼란과 외람됨이 어찌 있겠습니까?"

 그렇다, 불교에서는 이를 항포(行布)라고 한다. 전자가 원융아라면 이 항포는 차별현상을 말한다. 왜 항포가 필요한가. 아니 노보살님은 어찌하여 그 납자에게 항포의 원리를 말했는가. 그것은 납자가 아직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앞서 '산하대지 운운'하며 원용의 원리를 말했지만 납자스님은 알아듣지 못했다.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는 차별의 위치에 서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차별의 원리, 즉 항포를 말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야말로 노파심절의 간절함을 다한 것이다. 그랬으나 스님은 여전히 깜깜하였다. 그래서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것이다.

 몰라서 그렇지, 오늘날도 우리 주변에는 선기가 번뜩이는 여성불자들이 많다. 방포원정(方布圓頂)의 스님네를 능가하는 불자들도 한없이 많다. 산하대지, 온갖 초목이 모두 권속이란 말은 감관에 의해 지각되는 대상들이 모두가 스승이요, 깨달음의 기연이 될 수 있다는 얘기도 된다. 그러한 경지에 이르렀을 때 우리 주변에 시골아낙의 모습을 한 수더분한 여성들에게서도 안으로 내재한 선의 예리한 칼날이 번뜩이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결코 깨달음은 출가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깨달음은 재가자가 넘볼 수 없는 그런 곳에 있는 게 아니다. 또한 깨달음은 남자에게만 한정되어 다가오는 게 아니다. 비구나 거사뿐만 아니라 비구니나 보살, 즉 여성불자들에게도 공평하게 배분되어지는 몫이다. 우리 여성불자들은 그 몫을 찾을 권리가 있다.

 절에 나가는 여성불자들을 여성이라고 만만하게 보았다가는 그야말로 큰 봉변을 당할 수도 있다. 불교사 전면에 드러난 이면에 감추어진 그 무엇은 소프트웨어다. 하드웨어는 소프트웨어의 시스템이 있기에 운영할 수 있으며 소프트웨어는 하드웨어를 통해서 참 모습을 드러낸다.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을 갖고 있어도 하드웨어로의 컴퓨터가 없으면 진가를 발휘할 수 없고, 아무리 훌륭한 컴퓨터를 갖고 있어도 그 컴퓨터를 운영할 수 있는 컴퓨터의 운영시스템을 비롯한 각종 프로그램이 없으면 고철덩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둘은 항상 상보적 관계에 놓여야 한다.

 남성이 하드웨어라면 여성은 바로 소프트웨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