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토순례기] 중국 6 서안의 자은사와 흥교사

불국토 순례기

2009-09-22     이병주

1991년 8월7 일 섬서성 서안 호텔에서 일어나 커텐을 제치니까 멀리에 대안탑(大雁塔)이 아스라하고, 가까이에는 천복사(薦福寺)의 소안탑(小雁塔)이 반색을 한다. 이내 트레이닝을 입고 밖에 나왔다. 거리에는사람들이 평상에서 잠을 자고 있고 행인은 아직 없다. 다만 기공(氣功)에 나서는 노부부가 드문드문 희미한 새벽이었다.

 서안은 옛날의 장안(長安)으로 당나라가 번창한 8세기부터 동서문화의 집산지인 국제도시였다. 현재의 성곽과 누각은 내우외환으로 파괴되어 비록 명청시대의 재건이지만 시가는 바둑판처럼 구획이 돼 있다. 이른바 실크로드[絲路]를 통해서 대상[隊商]들이 중국의 값진 비단과의 교역으로 서역의 원색적인 문물이 거리를 수놓았던 장안이었다.

 더욱이 이백과 두보, 그리고 왕유(王維)를 비롯해 한유(韓愈)와 백거이(白居易) 등이 시문을 크게 떨쳐 중국 문학상 당시(唐詩)로의 자리를 굳힌 당나라의 수도였고, 게다가 우리나라 사절과 유학생들이 나들은 곳이어서 나의 발걸음은 자못 타임머신에 안주한 착각이었다.

 새벽산보에서 돌아와서 두곡(杜曲)에 있는 두보의 사당인 두공사(杜公祠)부터 참배하려고 사뭇 40년래의 기대에 부풀어 모시의 한복에다 도포를 입고 유건(儒巾)까지 쓰고 국제여행사 가이드 정태철 씨를 기다렸는데, 이미 스케줄이 짜여져 있어 캐주얼로 바꾸어 입으라는 바람에 노타이 차림으로 이미 아퀴를 맞춰놓은 세단에 올랐다.

 우선 현종(玄宗)과 양귀비(楊貴妃)가 자주 나든 온천궁인 화청궁(華淸宮)과 여산(驪山)의 동산 같은 진시황릉, 그리고 세기적인 발견이라는 병마용(兵馬俑)을 찾았고, 이튿날은 섬서성 박물관인 비림(碑林)을 둘렀다. 워낙 텔레비젼을 틍해 익히 듣보았던 것을 확인하는 걸음이긴 해도 정말 대단한 꾸밈이고 값진 문화재여서도 도시 발목이 자장(磁場)에 든 쇠붙이처럼 못내 떨어지질 않았었다.

 글쎄 불로장생을 꾀하고 더욱 저승에서 조차 친위대를 거느려 차린 병마용을 볼때, 인간의 욕심이 저럴 수 있을까 자꾸 도리질이 앞섰다. 그리고 비림에서는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새긴 석경(石經)을 비롯해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쓰는 대당다보탑비와 공자가묘비, 그리고 안진경(顔眞卿)의 근례비(勤禮碑)등을 직접 더듬어 볼때 비록 서예인 손방인 나이지만 감회가 새삼스러웠었다.

 그런데 마지막 석수실(石獸室)에서 어마어마한 크기의 상징수에 놀랬는데, 그벽에 실크로드의 경로를 밝힌『사로경로도(絲路經路圖)』는 공을 퍽 들인 전시였다. 그런데 오로지 현장(玄裝)법사만 돋보였을 뿐 우리 고구려 유민 고선지(高仙芝) 장군이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의 혜초(慧超) 선사는 아예 곁들이지도 않아 일방적인 자주만을 드세우는 중국인의 저의가 엿보여 못마땅했다, 그래서 실장에게 건의했더니 다만 참고 하겠다는 대답이어서 도리어 내가 무안했다. 

 8월 10일은 아주 무더운날이었다. 당나라 천보연간 (740)의 대찰이자 대안탑으로 유명한 자은사(慈恩寺)를 찾았다. 이 자은사탑에 관해서는 진작 두보가 여러 친구와 함께 탑에 올랐다가 지은 고시「동제공 등자은사탑(同諸公 登慈恩寺塔)」을 읽은 나여서 감회가 더욱 새로웠다. 실은 당시는 5층이었지만 명나라 때 보수하여 7층인 64m의 높이였다. 좁은 계단으로 7층의 망루(望樓)까지 오르니 서안의 시가가 한눈에 보인다. 비록 당나라 때의 복원도와 같지는 않아도 시멘트의 고층건물로 가려 다만 우뚝한 종루(種樓)를 비롯하여 거대한 성문이 등두렷해 옛수도의 면모가 역연했다. 그러나 매연으로 말미암은 공해는 거기라고 외면할 수는 없는 서안이었다.

 대안탑에서 내려와 현장법사기념관에 들렀는데, 낮가운 안내판에 성미가 상했다. 불경을 한역함에 있어 현장법사 다음이면 마땅히 그의 법사(法嗣)인 규기(窺基) 다음에 우리 신라의 왕자인 원측법사(圓測法師)와 순경(順璟)이 버금인 공로자인데, 원측법사는 맨끝에 적혀있고 일본승려는 도려(道麗)를 비롯하여 무려 6명이나 나란히 적혀 있는데, 그것도 바로 규기 다음이라 부아가 치밀었다. 아무리 일찍 수교(修交)를 해서 일본인이 떼를 지어 나들고 보수에 협조를 했기로서니 어엿한 차서(次序)까지 뒤바꾼 처사는 이해난이어서 관장을 찾아 수정을 간청했더니, 긍정을 하긴 했는데도 92년 4월에 다시 가서 보아도 여전해서 안타까웠다.

 물론 원측법사는 신라인이라서 현장법사의 강론도 실은 어깨너머로 듣고 배운사실도 어색하기 그지없는데, 그 거룩한 업적이 속절없이 흐려져 푸대접을 받다니 어이가 없었다. 딴은 우리 동국대 불교성적순례단도 다녀갔고, 또 여러 단체에서도 참관했는데 여전하다니 중국인의 자존(自尊) 의식보다 원측법사에의 예도가 아니어서 우리의 무관심이 두루 뉘우쳐졌다. 사실 그뿐이랴, 당시 우리의 자장율사를 비롯하여 의상대사 등 많은 고승대덕이 크게 활약했지만, 그의 자취느 묘연하기만 하니 생각사록 딱한 역사의 주사위다.

 자은사 대안탑에서 나와 별궁으로 유연장(遊宴場)이었던 곡강(曲江)을 찾았더니 상전벽해(桑田碧海)가 아니라 강은 아예 흔적도 없고 고속도로 공사가 한창이었다. 진(秦) 2세의 능묘가 복원 중이어서 하염없어 두보의 명작「애강두(哀江頭)」를 외우면서 한참을 우두켜니 서서 수고로운 현장을 응시했다.

 이윽고 두공사를 찾아나섰다. 가이드도 몰라 몇번을 묻고 물어서 비로소 찾았는데, 실은 서안사건(1936)당시 공을 세운 양호성(楊虎誠) 장군의 능원이 길가에 번듯하게 두공사를 가려 있어 그능원 뒤로 해서 찾자니 일반이 알리가 없었다. 특히 문화혁명 당시 앞이 가로막혔다는 두공사 관리인의 하소연이었다. 별로 참배하는 이가 없고 다만 일본학자와 대만학자가 찾아올뿐, 한국인은 처음이라는 바람에 보람차긴 했다.
 
 굳이 준비해간 꽃묶음과 향을 피워 공손히 재배를 올리고서 관리인 부부에게 구태여 나를 대신해서 자주 소쇄를 하고 향화를 올려 달라고 간곡히 당부를 하며 찬조금을 맡기고 돌아서는 마음은 몹시 언짢았다.
어둑하고 구질구질해서가 아니라 시성(詩聖)에의 대접이 너무 부실해서였다. 다시 차를 돌려 두곡시장의 왁자글한 시장경제의 실상을 목도하고 현장법사의 전탑과 유기와 원측법사의 전탑이 나란한 흥교사(興敎寺)를 찾아서 미처 포장이 안 된 길을 달렸다. 정문에는 청말의 대학자인 강유위(康有爲)의 현판이 걸렸고, 문에 들어서니 큼직한 현장법사의 전탑을 시립이나 하둣 유기와 원측법사의 잇묻은 전탑이 서 있어 합장 삼배를 올리고, 다시 중국불교협회장인 서예가 조박초(趙撲初)의 대웅전 현판이 새로운 법당에 들어가서 정식으로 예불을 올렸다. 종두가 "어디서 왔냐" 면서 주지실로 인도하기에 한국에서 왔다니까 작년에 남조선 동국대학교 불교성적순례단이 찾아와 원측탑을 보수하겠다더니 아직 소식이 없다면서 혀를 찼다. 이에 다소 무안해서 이내 자리를 뜨면서 귀국해서 채근하겠다고 물러났다.

 실은 한국의 관광순례단은 가끔 찾아오기는  해도 일본관광단만큼 많지는 않다면서, 지금 한참 보수중이어서 경내가 다소 어수선하지만 내년이면 말끔히 보수가 끝난다고 오히려 무관을 표하는 데는 듣는 내가 무안하기 그지없었다.

 다시 차를 돌려 옥의 산지로 유명한 남전(藍田) 왕유(王維)의 망천장(網川莊)을 찾아 달렸다. 가도가도 밀밭의 연속이었다. 역시 누구도 찾는 이가 없어 가이드는 가다가 묻고 또 묻다가 해묵은 모택동복을 입은 노인에게 물어서 왕유가 손수 심은 은행나무[王維手植銀杏樹] 입구의 표지판 을 따라 망천장을 찾았었다.
 아까 남전현으로 오다가 인진(引鎭)이라는 곳에서 우리의 장날과 같은 회(會)를 구경했다. 정말 없는 것이 없는 장이었다. 통제경제가 무너지고 시장경제로 바뀐 현장이었다. 마이크로 호객하는가 하면 핸드마이크로 온퉁 과갈스러운 난장이었다. 팔고 사는 인파로 발을 디딜 수도 없는 붐빔어었다. 실로 변하는 중국의 한마당이었다.

 이윽고 망천장을 찾았더니 공안당국의 허가가 없이는 근처의 사진조차 못 찍는 다는 공안원의 엄포에 지질려 아무리 간청을 해도 막무가내였다. 워낙 왕유는 안록산란(安祿山亂 : 755)에 현종을 호종치 못해 수복이 돼도 반역으로 몰린 데다 참선으로 평생한 성당(盛唐)의 시불(詩佛)로 거사로서 못내는 망천장을 절로 꾸몄고, 서화(書畵)와 음악 무용에도 능해 문인화인 남화(南畵)의 조종이었고, 이두(李杜)와 나란히 그 명성이 받들린 시의 대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