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루공양의 정신

더불어 함께 사는 자연

2009-09-21     관리자

오늘날 지구촌에 공동 관심사로 부각되고 있는 환경문제는 우리 사회의 각계에서도 지대한 관심이 싹트고 있는 현실이다. 삼천리 금수강산 천지(天地)은혜를 자랑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우리의 자연환경은 서구문명과 함께 밀려들어 온 산업화 물결에 반만 년 아니, 수억 년의 수려함이 파괴되기에 이르렀다.

 우선, 5대강의 수질은 물고기가 살수 없는 죽음의 강으로 변하고  있으며 대도시 (서울)의 대기오염은 세계2위에 달해서 40대 간암환자 벌생률이 세계 1위에 이르고 있다.
 
 '물 좋고 공기 좋고'가 삶을 살아가는 데 으뜸이란 옛말이 있듯이 우리 몸은 물과 공기 밖에서는존재할 수없는, 자연과 불가분의 인연을 맺고 있는 자연의 일부이다. 그래서 우리 문화 구석구석 자연의 아름다움과 조화를 맺지 않는 것은 찾아 볼 수 없고 자연과 호흡하지 않은 곳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강산이 세계의 어느 곳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오염된 현실을 볼때 서글픈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더 할 뿐이다.

 수년 전 우리 모임(자연의 친구들)의 돈연 스님께서 일구고 있는 정선의 콩밭에서 한나절 일할 기회가 있었다. 말이 콩심는 일이지 실은 강원도 산세나 구경하러 놀러간 것이다… 님도 보고 뽕도 따고.

 스님이 사는 모습을 직접 가까이에 서 접해본 것은 아마 그때가 처음일 것이다. 가끔 등산길에서 주변 사찰을 들를 기회가 있었지만 걸어서 대충 절 모양새나 절 분위기을 살피는 정도에 그쳤던 것이다.

 그날 퍽 인상적이었던 것은 바루공양 때였다. 음식은 먹을 만큼 각자 알아서 식기(바루)에 담고, 다 먹은 다음 밥알 한 톨 남기지 않을 뿐 아니라 빈 바루에 물을 붓고 손가락으로 설겆이를 한 다음에 그 물바저 마셔야하는 그 역겨움(?). 밥이 하늘이란 말이 철저히 느껴지는 식사법이다,
그 혼탁한 설겆이 물까지 마실때, 목구멍에 잘 넘어가지 않아 곤욕을 치루었다. 단숨에 마시지 못하고 여러번 망설이며 꾸역꾸역 목구멍에 넘기면서 불교의 심오한 우주관, 생명관들을 미루어 짐작하게 되었다.

 개눈엔 뭐만 보인다고 주위에서 환경운동가란 시각으로 봐주는 나는 곧바로 이 바루공양과 환경문제를 관련시켜 보았다. 모든 사람이 바루공양을 한다면 쓰레기 분리수거 등 골치아픈 오늘날 환경문제는속시원히 해결될 것같이 생각하게 되었다. 나아가 온 세계, 전인류가 이 바루공양만 제대로 한다면 지구의 환경문제는 손쉽게 해결될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정말 환경문제 해결책으로 특허(?)라도 충분히 따낼 수 있지 않겠느가?

 이"특허"라는 말이 갑자기 튀어나온 배경에는 이런 일화가 있었다. "

 "91년도에 독일정부 초청으로 「환경정책기술」이란 프로그램에 환경연수를 갈 기회가 있었는데 그중에 폐수처리기술을 살펴불 기회가 있었다. 지금까지 폐수처리는 공업적, 화학적방법에 의존하였으나 이즈음부터 생화학 즉, 박테리아 따위의 생명체들을 이용, 물을 정화하는 기술로 접근하고 있는 시점이었다
자연생태 순환구조를 환경기술에 도입케 된 첨단기술이란 설명이었다. 
 
 이런 사례는 태양열과 풍력을 이용해 무공해 에너지원을 찾는 기술개발 노력처럼 환경기술의 첨단 방향인 자연순환질서를 회복하는 차원의 과학적 노력에 그 근본을 두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때, 지금까지의 골치 아픈 환경문제의 원인은 이렇게 풀이해 봐도 될 둣하다. 즉 지금처럼 우리 환경이 오염되기까지에는 우리의 생활 터전인 지구를 한자인'人間' 에서 '間'이 빠진 '人'만의 활동영역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그것은 결국 자연생태 순환질서를 이루지 못하여 공해라는 환경문제를 낳게 되었던 것이다. 

 현대 산업문명 구조의 기조는 바로  이 '人'에서 출발하여 '人'으로 끝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인류는 지구환경문제에 골머리를 앓게 된것이다.

  근래 유럽의 첨단 과학기술의 추세는 바로 '人'의 범주에서 '間'의 영역을 찾고자 고심하고 있는 추세라 볼수있다. 이때, 우리 바루공양을 '人'의 문화권에 '間'을  수출하기 위해 특허라도 내야겠다는 것이다. 이를 황당하다고 치부할 것이 아니라 바루공양의 정신을 오늘날 지구촌 환경문제를 푸는 하나의 근본적 대안으로 삼아 전인류와 더불어 공유하자는 것이다.
의 · 식 · 주 전반에서 자연과 맥을 이루며 살았던 우리 고유문화의 존재방식이 '人' 문화권의 유럽보다는 확실히 선진국임에 틀림없다.

 유럽의 '人'문화권의 상징이 맥도날드 햄버거라 가정해보자. 독일 연수 당시 유학생과 함께 맥도날드 햄버거 체인점에 들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맥도날드 햄버거의 전 세계적인 체인망의 공통된 철칙이 있다고 했다. 당일의 재고분은 절대로 외부로의 유출은 물론직원도 가져가지 못하며 전량 쓰레기 처분하는 것이 경영 방침이란 것을 들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약간 놀라웠으나 더욱 놀라운 것은 전 세계체인점에서 매일 버리는 쓰레기 양이 소 수만 마리의 생명과 맞바꾸어진다는 것이다.

 인간 중심의 시장경제 논리는 더나아가 최대의 생산과 최대의 이윤추구과정에서 소들의 대량생산(방목)을 위해 아마존 열대림과 같은 원시림들을 벌목하여 초지로 만들기도하고 다양한 생물의 공존공간을 파괴하여 무수한 자연생태계의 생명체들이 결국 체인점의 쓰레기통에 들어가기 위해 죽음을 기다리는 기현상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人' 문화권의 시장경제 논리를 이해하고 나니 웬지 서글픔만 일어났다. 강원도 정선에서 바루공양할 때, 설겆이 물이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아 곤욕을 치뤘던 것이 얼마나 큰 영광이고 보물스런 일이었던가 절로 감동치 않을 수 없었다. '人' 문화권과 '人間'문화권에서의 환경문제가 어떻게 차이가 나고 결과적으로 왜 지구환경문제가 일어나는지에 대한 이유를 바루공양의 설겆이 물이 설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바루공양이란 보물을 갖고 있는 불교정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불교계에선 맥도날드 햄버거맛에(그 논리에) 길들여지고 있는 세태를 접하니 가슴 답답할 뿐이다.

 작년 북한산 국립공원지역 내의 모 사찰 진입로 확장공사 과정에서 수 많은 나무들이 무참히 잘려져 사찰 마당에 쌓인 것을 보고 이젠 법당 앞까지 현대문명의 이기심의 표현인 맥도날드 햄버거의 논리가 들이 닥치는 차량 행렬에 실려 오는구나 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산자락 물자락 건너 부처님 법문처럼 들리던 새소리도 간데 없고 자동차 엔진소리, 크랙션 소리에 혼잡해진 법당, 자동차로 편하게 극락정토하려는 오늘의 세테는 불자들로 하여금 바루공양 자체의 모습보다 그 속에 깃든 깊을 뜻을 되새길 때가 되었음을 경종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무수한 나무들을 무참히 자르고 차도를 내는 행위가 생불생존(生佛生存)인지 살불살존(殺佛殺存)인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누구에게라도 붙잡고 묻고싶다.

 "저 돌이 살았소? 죽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