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갓 입으로만 하고 마음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랴

선가귀감 강설 17

2007-06-01     관리자

제51장
禮拜者, 敬也, 伏也. 慕敬眞性, 屈伏無明.
예배라는 것은 곧 공경이고 굴복이니라.
(공경은) 참된 성품을 공경하는 것이고, (굴복은) 무명을 굴복시키는 것이니라.

몸과 입과 뜻〔三業〕이 청정하면 그것이 곧 부처님의 출세니라.

강설
철야 1,080배 절을 하면서 다음 몇 가지를 이야기한다.
첫째, 절은 곧 하심(下心)이다. 부처님 명호를 고성 염불로 외고 몸을 숙여 절을 하는 것은 자신의 아만심을 꺾는 일이다.
둘째, 절은 새로운 시작이다. 절을 한 뒷날부터는 새로 태어난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셋째, 절은 화합이다. 함께 땀을 흘리며 절을 하고 나면 이웃이 더 아름다워 보이며, 가족·친지·도반의 화합이 절로 이루어진다.


제52장
念佛者, 在口曰誦, 在心曰念. 徒誦失念, 於道無益.
염불은 입으로 하면 송불이고, 마음으로 하면 염불이니라.
한갓 입으로만 하고 마음이 없으면, 도 닦음에 무슨 이익이 있으랴.

강설
염불 시초는 아미타불이다. 아미타의 의역은 무량광(無量光) 혹은 무량수(無量壽)이며, 시공을 초월한 무량한 빛이고 무량한 생명이라는 뜻이다. 오늘날 대륙 중국 선방은 허운(虛雲) 스님의 제자들이 염불선(念佛禪)을 가르치고 있다. 선방 스님들은 좌복 위에 앉아서 이렇게 한다. “아미타불! 아미타불을 부르는 자가 누구냐?” 이렇게 아미타불을 부르는 당처를 찾기 때문에 화두와 통하여 염불선이라 이름한다.

평한다.
오조스님이 이르셨느니라. “본래의 참 마음을 지키는 것이 시방세계 제불을 모두 염불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육조스님이 이르셨느니라. “항상 밖의 부처님만 생각하면 설사 부처라 하더라도 생사를 면치 못할 것이고, 자기 본심을 지킨다면 곧 피안으로, 감이 없이 가게 되느니라.” 또 이르셨느니라. “부처는 자기 성품 안에서 지어야 할 것이니, 몸 밖에서 찾지 말지니라.”
또 이르셨느니라. “미혹한 사람은 염불하여 왕생을 구하지만, 깨닫는 사람은 마음을 스스로 청정하게 할 뿐이니라.”
또 이르셨느니라. “대저 중생이 마음을 깨달아 스스로 피안으로 건너가는 것이지, 부처님이 중생을 피안으로 건네주시는 것은 아니니라.”
옛 성인이 말씀하셨느니라. “염불 일성에 천마의 간담이 서늘해지고, 저승 명부에서 이름이 지워지며 금못〔金池〕에서 연꽃으로 피어나느니라.”
또 참회법에서 이르셨느니라. “자력과 타력에서 하나는 늦고 하나는 빠르니라. 바다를 건너고자 하는 사람이 나무를 심어 배를 만들려고 한다면 늦는 것이니, 그것은 자기 힘에 비유한 것이니라. 배를 빌어 바다를 건넌다면 빠를 것이니, 부처님의 힘에 비유한 것이니라.”
또 이르셨느니라. “세간에 어린아이가 물불의 위험에 쫓기어 고성으로 외치면, 부모가 그 소리를 듣고 급히 달려와 구원해주는 것처럼, 만일 사람이 임종할 때에 고성 염불을 하면 신통을 갖추신 부처님은 반드시 오셔서 영접할 것이니라. 이런 까닭에, 부처님의 자비는 부모보다도 낫고, 중생의 생사 고통은 물불의 재앙보다도 심하느니라.”
어떤 사람이 말하였느니라. “자기 마음이 정토이기에 정토에 태어날 필요가 없으며, 자기 성품이 아미타불이기에 따로 아미타불을 친견할 필요가 없느니라.”
이 말이 그럴 듯하지만 잘못된 것이니라. 저 부처님은 탐진치 삼독심이 없으신데 나도 그처럼 탐진치 삼독심이 없는가? 저 부처님은 지옥을 바꾸어 연화세계로 만들기를 손바닥 뒤집기보다 쉽게 하시지만, 나는 업력으로 항상 지옥에 떨어질까 두려운데, 하물며 연화세계를 만들겠는가? 저 부처님은 한량없는 세계를 눈앞에 있는 것처럼 보시지만, 우리는 담장 너머 일도 알지 못하는데, 하물며 시방세계를 눈앞에 있는 것처럼 볼 것인가? 이런 까닭에, 사람 개개인의 성품은 비록 부처라고 하지만 실제 행동에서는 중생이니, 그것을 대조해 말한다면 천지 차이니라.
규봉 스님이 말씀하셨느니라. “가령 단박에 깨달았다 하더라도, 결국은 점차로 닦아 가야 하느니라.”
진실로 옳은 말씀이심이여! 그리하여 자기 성품이 아미타불이라고 하는 사람에게 말하느니라. “어찌 태어날 때부터 석가여래였으며, 어찌 저절로 이뤄진 아미타불이 있었겠는가?”
자신을 헤아려 볼지니, 사람들은 어찌 스스로 알지 못하는가? 임종을 당하여 숨이 끊어지며 생사의 고통이 일어나는 순간에 분명히 자유자재하겠는가? 만약 이와 같지 않다면 한때 기백 좋게 우쭐거리다가 도리어 악도에 영원히 떨어지지 말지니라. 또 마명 보살과 용수 보살이 다 조사이신데도, 분명히 가르침을 말하여 왕생하기를 심각하게 권하셨거늘, 나는 어떤 사람이기에 왕생하고자 하지 않겠는가?
또 부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느니라. “서방정토가 여기에서 멀어, 십만(十萬)은 십악(十惡), 팔천(八千)은 팔사(八邪)인데 이 십만 팔천 국토를 지나야 하느니라.” 이것은 어리석은 사람을 위하여 생멸법으로 말씀하신 것이니라.
또 말씀하셨느니라. “서방정토가 여기에서 멀지 않으니, 마음(心, 衆生)이 바로 부처(佛, 阿彌陀佛)니라.” 이것은 총명한 사람을 위하여 불생불멸법으로 말씀하신 것이니라.
교문에는 권교와 실교가 있고, 말씀 표현에는 드러남과 비밀이 있으니, 만약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서로 일치된 사람은 머나 가까우나 두루 통하게 되느니라. 그러므로 조사의 문하에도 노산 동림사 혜원 스님과 같이 아미타불을 염불한 사람이 계시며, 서암 스님과 같이 방안에서 혼자 ‘주인공아!’ 하고 스스로를 부른 사람이 계시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