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영상(靈像)과 혜달스님

옛 중국의 신이한 스님

2009-09-17     관리자
(1)불상 출현을 예언하다
위(北魏) 태무제(太武帝)의 태연(太延) 원년(435)에 혜달(慧達)이라는 스님이 서역(西域)으로 가고자 하여 양주(凉州一甘肅省永昌縣)의 망어곡(望御谷)이라는 골짜기에 찾아왔다. 이 깊은 골짜기를 멀리 바라보면서 혜달은 골짜기를 향하여 예배하였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저 스님은 골짜기를 향하여왜 예배를 하는가. 머리가 돈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그래서 스님에게 가까이 가서 절하는 이유를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이 골짜기의 벼랑에 부처님의 모습이 완전하게 갖추어져있으며 세상은 평화롭다는 징조입니다.

만약 부처님의 목이나 수족이 하나라도 갖추어져 있지 않으면 세상은 어지럽고 백성들은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한 예언이었다. 망어곡 벼랑에 원만한 부처님의 모습이 나타나면 세상이 평화롭고, 불구의 부처님이 나타나면 세상이 어지럽다 하니 사람들은 놀라 그 스님에게 모여들었다.

(2)행각하는 신이승(神異僧) 혜달
달이란 어떤 분일까. 혜달의 형은 유(劉)씨이며, 이름은, 졸화(窣和) 함양(咸陽-협서성) 출신이다. 젊었을 때는 부처님을 몰랐고 학문도 없었다. 성격은 용감하고 힘이 세어 사냥을 좋아했다.또한 산을 잘 탔다. 어떤 때는 돌격 기병이 되어 양양성(襄陽)을 지키는 무장으로서 싸움터에 나아가기도 했다.

부모형제가 풍요한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도 혜달만은 제멋대로 자유롭게 살았다. 전쟁터를 달리는 청년이라면 술을 마실 기회도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독한 술을 과음하여 병이 들고 말았다. 온갖 환각현상이 나타나는 증세가 보였다. 그러던 중 한번은 환각 가운데 지옥이 나타났다.

지옥에서 죄지은 사람들이 귀신들에게 얻어 맞으며 고통받는 모습이 보였다. 온갖 고통을 받고 있는 모양을 본 혜달은 본연이 깨닫고 세간을 버리고 출가하였다. 출가한 혜달은 하북성 평원(平原)에 있는 절에서 불도 수행에 힘썼다. 군인에서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다는 것은 인생에 있어 대전환이었다.

호용스러운 무장이었던 혜달은 아마도 맹렬한 수행을 하였을 것이다. 좌선이나 독경에 목숨을 걸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예언자로서의 초능력을 갖출수 있었을까? 전쟁터를 달리던 체력을 불도 수행에 쏟아 넣었던 것이다. 그 결과 갖가지 초능력, 예언이나 투시능력을 갖출 수 있었다.

'속고승전'의 저자 도선(道宣-596~667)이 그 지방에 있는 안니사(安尼寺)라는 절을 찾았더니 그 절에는 혜달스님의 상이 안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 지방 사람들이 그를 존경했던 것을 짐작 할 수 있다. 초능력을 갖춘 혜달은 한 곳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생각나는 대로 곧 어디든 갔다. 강소성(江蘇省)이나 절강성(浙江省)에도 갔다. 강남의 여러 절을 행각한 것이다. 435년 화서회랑(華西廻廊)인 양주(凉주)에 와서 망어곡을 예배하며 예언한 것은 앞서 말한 바 있다. 혜달은 거기서 감숙성(甘肅省), 주천현(주천현) 서쪽 7리까지 왔다.

주천에서 옥문관(玉門關)으로 갈 작정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지방의 돌이 많은 냇물에 와서 목숨을 마쳤다. 개천 속에서 죽은 것이다. 그의 뼈도 모두 부서져 흩어졌다고 한다. 도선이 살아 있던 7 세기 전반 주천현성 서쪽에 절이 하나 있었는데, 거기에는 혜달의 소상이 안치되어 있다.

그 절에는 비석 한개가 서있다. 비문은 알아볼 수 없으나 '나는 대성(大聖)이 아니다. 행각을 업으로 한다'라는 글만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혜달의 행동 범위는 넓었다. 황하 유역에서 장강유역, 황하 남쪽에 이른다. 만년에는 서역에서 천축을 목표로 나아가면서 어쩌면 스스로 골짜기 벼랑에 불상을 조각하면서 나아갔는지도 모른다.

서쪽으로 서쪽으로 홀로 길을 걸으면서, "나는 성자가 아니다"한 것은 출가하기 전에 많은 목숨을 살상한 것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사람이나 짐승을 죽인 죄를 참회하면서 행각하였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산야를 행각한 것은 그의 수행이었고 그의 후반의 생이었다.

(3)부처님이 나타나다
위의 효명제(孝明帝), 정광(正光) 원년(520)의 일이다. 양주지방에 큰 폭풍우가 몰아쳤다. 벼락이 내리치면서 산이 찢겨나가자 거기에 부처님이 나타났다. 크기는 등신대이고 모습은 단정했으나 목이없었다. 그래서 석공을 시켜 머리를 만들어 석상 위에 놓았지만 또 떨어졌다.

망어곡 석상에는 목이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혜달이 예언한 것처럼 세상이 어지럽고 백성이 괴로워 할 징조였다. 정광 원년에는 북위라는 위풍 당당하 나라도 서서히 기울어가고 있었다. 치안이 문란하고 인심이 흉흉했다. 혜달이 예언한 것처럼 망어곡 불상에도 목이 없었다.

북주(北周), 효민제(孝閔帝)원년(557)의 일이다. 양주성 동쪽 계곡에 한줄기 서광이 나타났다. 모두들 이상하게 여겼다. 광명이 나는 곳을 찾아가니 부처님의 머리가 있었다. 그것을 망어곡 불상에 가져다 놓으니 정확히 부합되는 것이 아닌가. 37년 만에 부처님의 목이 회복됐다. 망어곡 불상이 완전해졌다는 것은 세상에 평화가 찾아 올 표시였다.

북주는 그 당시 우문호(宇文護)가 권력을장악하고 있었다. 우문호는 법왕사. 미륵사 등 5사를 세웠는데 사탑은 장엄하기 이를 데 없었다. 북주 초기에 불법의 전성시대를 맞이했다. 망어곡 부처님이 거룩한 모습을 완전히 나투자 그 자리에 서상사(瑞像寺)가 세워졌고, 등빛은 빛났으며 종소리는 끊임없이 울렸다.

(4)신앙을 모은 유사불
주 건덕 원년(572)의 일이다. 망어곡 부처님의 목이 땅에 떨어졌다. 재상인 우문호와 부게왕의 후주(565~577) 두 사람은 망어곡에 와서 부처님의 목을 안정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낮에 이어놓은 머리는 밤이 되면 땅에 떨어졌다.

수십 번을 반복했지만 허사였다. 돌이 무겁다 하여 다른 가벼운 것으로 머리를 만들어 붙였지만 결과는 매 한 가지였다. 이 일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나쁜 징조였다. 북주 나라에 변고가 생길 전조였다.

북주의 무제(武帝)는 건덕 3년(574) 북주 전국에 대폐불을 결행했다. 경전을 불사르고 불상을 허물며 승려 3백만 명을 환속시켰다. 이폐불사건으로 하북의 불교는 파괴되고 승려는 환속되거나 살해되었다.

그리고 북주도 581년에 수(隋)에 의하여 멸망되었다. 망어곡 부처님의 목이 떨어진 것은 불법쇠멸의 징조였다. 그러나 북주의 이 부처님은 폐불을 만나고도 파괴되지 않고 , 살아 있는 듯 단정한 모습을 보였다.

수 대업 5년(609) 양제(陽帝)는 친히 망어곡에 행차하여 예경하고 공양을 올렸다. 그리고 서상사의 이름을 감통사(感通寺)로 바꾸게 했다. 양제는 이 부처님을 많이 모사 시켰다. 모사된 부처님은 혜달을 모신 절에도 안치되었다.

그 도상은 엄숙단정했고, 사람들은 엎드려 예배했다. 협서성(陜西省)을 중심으로 많은 절에서 이 부처님은 신앙을 모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부처님을 유사불(劉師佛)이라고 불렀다. 유씨인 혜달 스님의 신이력에 감응하여 나타난 부처님이기 때문이다.

(5)평화 실현의 염원
북주의 재상 우문호나 수양제가 이 망어곡에 행차하여 부처님을 예경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장안(長安)에서 멀리 떨어진 양주 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될 것은 양주라는 지역에 이 세간의 우위기를 감득할 부처님이 나타났다는 의미에 대해서다. 원래 북위가 건국되면서 도읍을 평성(平城)으로 정했는데 그때 양주의 주민 3만여 가구를 평성으로 옮겼다.

북위가 양주를 점령하므로써 양주의 인구, 재보 그리고 문화가 그대로 형성으로 옮겨져 양주 불교는 북위 불교로서 발전한 것이다. 양주 또한 인도나 서역승들이 중국 본토로 가는 중개지로서 동. 서 교통의 요로이기도 하다. 세간의 평화와 전란을 예언하는 유사불이 나타나기에 알맞은 땅이다.

유사불의 기적은 여행자에 의하여 곧바로 중원 땅에 전해질 것이다. 양주는 일찍이 구마라습 삼장이나, 신통력을 나타내고 열반경을 번역한 담무참 삼장이 있었고, 아함경전을 변역한 축불염(竺佛念)도 양주 출신이다.

양주 망어곡에 나타난 부처님은 상호가 완비하였을 때는 세상이 평화하고, 머리가 없을 때는 흉란의 징조였다는 사실은 사람들이 평화를 간절히 바랐다는 뜻이다.

불법을 파괴하거나 전란을 좋아하는 광폭한 성질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을 평화를 바라는 마음으로 바꾸는 데 도움이 되었다. 세간이 어지럽고 불법이 쇠퇴할 때 아무리 머리를 만들어 올려 좋아도 곧 떨어지는 기현상을 보고 다시 사람들이 얼마나 두려워하고 평화를 바랬을 것인가.

혜달은 한권의 책도 이 세상에 남기지 않았지만 영험이 넘치는 부처님을 남겼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싫어했으니 어려운 불교 논전을 보고는 그 뜻을 헤아리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출가 전에는 살생으로 지새운 사냥군이고 군인이었다.

그 사람이 한번 출가하여 스님이 된 것은 죽임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마음속에 바란 것이 아니겠는가. 여러 나라를 행각하면 할수록 민중 생활의 불안과 괴로움을 자기 눈으로 확인하였을 것이다. '다툼이 없는 편안한 세상은 오지 않을 것인가'라고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던

혜달의 마음 속에 하나의 강렬한 원이 응결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세간의 평안을 가져오는 부처님의 출현이다. 이 부처님의 출현을 바라고서 강남에서 하북으로 가고 다시 하서 회랑으로 향한 것이다.

그렇게 하여 그 원이 달성된 것이 양주의 망어곡이다. 이곳이야말로 부처님이 출현하시기에 알맞은 곳인 것을 알았을 것이다. 생애를 걸고 구해오던 원을 이루자 혜달은 주천현성 교외에 있는 개천에서 목숨을 마쳤다. 이제는 더 생존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혜달의 생명은 '유사불'이 되어 영원히 살게 되었다. 사람들이 이 유사불을 그려서 각지에 모시고 공양한것은 당연하다. 혜달의 원은 그대로 민중의 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 글은 일본 大法輪 제54권 7호의 초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