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고난 이기오리다

신앙수기

2009-09-17     관리자



  “일심으로 기도하라, 대립하지 말고 결코 미워하지 말라. 내 마음이 밝으면 국토가 밝아진다.” 하셨지만 저로서는 그럴 수만은 없었습니다. 제 마음 깊은 곳에 꽁꽁 묶여 도저히 풀 수 없는 감정과 미움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불광인연
  돌이켜 생각하니 저의 한 삼은 부처님의 크신 은혜속에서 끊임없이 계속되어온 것으로 생각됩니다.
무의미한 하루하루의 반복이 아니라 우리를 깨닫게 하시고 진리의 마당으로 이끌어 주시는 자비의 연속인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 속에서 태어나고 성장하고 인생을 가꾸어가는가 봅니다. 확실히 저는 일찍이 불법인연이 있었고 그것이 저의 성장과 함께 면전에 들어나 거룩한 이연의 뜻을 깨우치게 하였습니다.
  저는 대구에서 7남매 중 6 째로 태어났습니다. 대구에서 학교를 마치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26살에 결혼했습니다. 저는 자랄 때부터 어리석고 순해서 별명이 둘레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결혼하고 보니 결혼 전 생각과는 너무나 다른 시집생활에 많이 시달렸습니다. 남편은 착하고 너그러운 분이여서 저를 위하여 많이도 애써주셨지만 저의 순하고 어리석은 마음은 몇 년 동안에 간곳이 없고, 자신이 생각해도 무섭고 강하고 바뀌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원망스러웠습니다. 하루하루 불평불만 속에서 살았습니다. 우리를 중매해준 중매쟁이가 죽이고 싶도록 미웠고 시집식구는 말할 것도 없고 이런 인연을 맺게 하신 부모님까지 원망스럽고 미웠습니다. 그러다가 시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둘째아이를 낳을 무렵 저희들은 따로 직장을 갖고 나와 살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제가 대구 가면 다니던 절의 스님께서 잠실에 불광사라는 절이 있으니 가서 공부하라 하시며 불광지와 「생의 의문에서 그 해결까지」를 주셨습니다. 그때 저는 영등포 구로공단 부근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잠실은 너무나 멀어서 다닐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교통사고
  몇 해 동안 편안하게 살아온 저희들은 뜻밖의 큰 사고를 만났습니다. 어쩌면 이 사고는 저에게 큰 시련이기도 하였습니다. 이 사고를 기연하여 지극한 마음으로 부처님 가까이 올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1983년 2월 11일 눈이 많이 내린 날이었습니다. 남편이 출장 다녀오시다가 천안입구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를 만났습니다. 연락을 받고 급히 천안으로 달려갔습니다. 늦은 밤 시외버스를 타고가면서 손에는 염주를 들고 관세음보살님을 부르면서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때만 해도 불교에 대해서는 정말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부처님은 자비하시며 급할 때는 관세음보살님을 부른다는 것이 불교에 대한 지식의 모두였습니다. 병원에 도착하니 남편은 도착하니 남편은 중환자실에 혼자 누워있었습니다. 외상은 전혀 없었지만 척추를 몹시 다져 4개월 가료라는 진단이 나와 있었습니다. 대개 척추를 다치면 모두 신경을 걱정하는데 다행히 신경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저는 부처님을 생각하며 차리고 남편을 서울 한양대학병원으로 옮겨 다시 검사했으나 결과는 똑같은 중증이었습니다. 남편은 침대에 누워 꼼짝할 수 없었고 정말 고통스러운 병상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남편은 제가 갖고 간, 책과 염주를 손에 지니고 읽으면서 부처님이 계시면 왜 다치게 하느냐고 물어 옵니다. 그때만 해도 반야심경조차 외우지 못하는 저였지만 부처님이 계시고 조상님이 돌보시기에 이만한 것이라 생각하며 관세음보살을 생각했습니다. 남편은 겨드랑 밑에서 무릎까지 기부스를 하여 꼼짝할 수 없었으니 얼만 답답하겠습니다. 정형외과에 모인 사람들은 허리는 대들보인데 4개월이 8개월이 되고 1년이 된다면서 푹 기다리라고 하였지만 저는 4개월 후면 꼭 퇴원하리라는 예감이 들었습니다. 정말 저는 부처님이 계신 것을 생각했습니다. 다행히 예정대로 4개월 만에 퇴원하였습니다. 그러나 1~2년간은 힘든 일을 하지 말고 물리치료 받으면서 쉬라는 권고였습니다.
  이 사고를 만나고 나서 저는 많은 것을 생각했습니다. 우리에게는 부처님이 계시지 않은가. 그런데 우리는 부처님에 대하여 아는 것도 없고 성의도 없었습니다. 앞으로 부처님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 마음을 굳혔습니다.

    처음 본 불광법회
  그럭저럭 시간이 흘러 85년 3월 24일 일요일 아침에 석촌호수 옆 불광사를 찾아갔습니다. 이제까지 제가 가끔 다니던 절하고는 너무나 많이 달랐습니다. 모두가 어색하고 어리둥절해 맨 뒤에 앉아 있었습니다. 왠 사람들은 그렇게 많은지 ....
  어릴 때 다니던 교회처럼 법회순서가 기둥에 붙어 있고 몇 차례인가 노래를 부르고 모두들 소리 높여 책을 읽었습니다. 마치 교회에서 성경 읽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대구스님이 왜 이곳엘 가라고 하셨는지 생각하면서 어설프게 앉아 있었습니다. 법문이 끝나고 노래를 부르는데 책은 없고 가만히 들어보니 “온갖 고난 기어이 이기오리다.”하는 구절이 들려왔습니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정말 오늘부터 온갖 고난 기어이 이기리라. 앞으로 어떤 고난이 닥치더라고 기어이 이기오리다. 그리고 아무리 멀어도 부처님 앞에 열심히 다니리라.”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정말 신기한 일입니다. 어색한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해 생각은 다른 데가 있을 그때, 노래 한 구절이 이같이도 나를 뒤흔들고 순간에 바꾸어 놓다니... 저는 부처님의 자비 위신력이 저의 귀를 열고 마음을 열어 흔들어 주고 깨우쳐 주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찬불가 「부처님께 기원합니다.」는 영원히 잊지 못할 크신 은혜의 노래입니다.
  다음 일요일부터는 아이들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아이들을 위한 법회가 따로 있어서 좋았습니다. 몇 번인가 저는 아이들과 법회를 다녔는데 어느 일요일 남편이 일찍 서두르시더니 저희들을 따라 나섰습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우리 식구 모두의 가슴에 자비하신 은혜의 횃불이 점화된 것입니다.

    불자로 성장하는 아이
  저희들은 매 일요일마다 빠지지 않고 법회에 나왔습니다. 불자 된 감동이 더욱 새로워졌습니다. 일상생활도 믿음으로 중심을 잡아갔습니다. 수행일과를 힘써 지켜갔습니다. 그러던 중 온갖 고난 이기려면 우선 법회의 일을 해보고 배워야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법등가족모임을 저희 집에서 가졌습니다. 많은 법등 형제들이 참석해 주셨습니다. 그때 영등포구 명등보살이시던 시각거사님께서 매일 기도정진하고 금강경 읽고, 발원문을 읽을 때엔 꼭 세계인류평화와 남북 평화통일 발원을 먼저하고 자기 발원을 하라고 하셨는데 이 말을 듣고 저는 답답하게 느꼈습니다. 내 발등에 불도 못 끄고 있는데 주제넘게 인류평화 남북통일이라니 말도 안 되는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그때만 해도 한 사람의 평화안녕이 나라와 세계의 평화안녕과 이어져 있고 우리와 온 중생이 함께 성불한다는 도리를 짐작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선 일하지 못하고 쉬고 있는 남편이 하루 빨리 회복되어 일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저희 원이었던 것입니다.
  그해 가을 저희들은 절 가까운 동네로 이사하기로 했습니다. 힘들게 장만한 집을 정리하고 지금 살고 있는 문정동 아파트로 옮겨 왔습니다. 마음은 편하지 않았지만 절 가까이 갈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 기뻤습니다.
그해 가을 처음으로 불광 창립 법회에 참석했습니다. 우리는 정말 법회와 깊은 인연 이 있는 듯 합니다. 저희들 결혼날과 창립기념일이 햇수로 날짜도 틀리지 않는 같은 날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새로 시작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새로 시작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이제껏 살아온 10년은 그냥 덮어버리고 오늘부터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고 다짐했습니다. 그해 11월 22일 저희들은 계를 받았습니다. 저의 남편은 도천(道泉)거사님, 저는 정광화(淨光華) 보살로 새로 태어났습니다. 그날은 마침 또 제 생일날이었습니다. 제 생일날 큰 스님께서 불자로 탄생된 저희에게 새 이름을 지어 주신 것입니다. 저에게서 맑고 빛나는 것을 보셨는지 아니면 맑고 빛나라고 축복을 주신 것인지 ... 어쨌든 저는 감사했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누구 엄마, 누구 아줌마라 불리지 않고 정광화보살이 되었습니다. 그 무렵 저희들은 법등임원을 맡았습니다. 법등가족 모구가 한 식구였습니다. 좋은 일이나 궂은일이나 법등식구들을 위해 모두 열심히 기도하고 의논했습니다. 법등식구들은 저와 나이가 비슷해 더 없이 친해졌습니다. 눈만 끄면 절에 가서 새벽기도하고 만나고 또 수요일이면 함께 무여 불경공부하고 일요일이면 법회에서 만나고... 법등형제와 함께 하는 시간들은 정말 값지고 희망찬 하루하루였습니다.
  그러나 혼자 집으로 돌아올 때는 부처님 법도 좋고 법등형제들과 만나는 것도 다 좋은데 그때 저희의 형편은 그렇게만 지낼 때가 아니었습니다. 남편의 건강이 회복되었고 일을 하여야 하는데 잘 되지 않아 모든 일에 주저하게 되고 않아 모든 일에 주저하게 되고 용기가 나지 않았던 때입니다. 저는 기도 중 부처님을 한참 쳐다보면서 원망을 하기도 했습니다. 어려울 때, 어려운 데에 마음 두지 말고 부처님의 무한공덕과 자비하신 가호를 믿으며 감사하라는 법문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기도 성취의 원을 충분히 소화시키지 못했던 때였습니다.
  큰 스님께서는 “일심으로 기도하라. 대립하지 말고 결코 미워하지 말라. 내 마음이 밝으면 국토가 밝아진다.” 하셨지만 저로서는 그럴 수만은 없었습니다. 제 마음 깊은 곳에 꽁꽁 묶여 도저히 풀 수 없는 감정과 미움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두를 다 좋아하고 원만할 수 있지만 이것만은 절대로 안 된다고 생각하며 이 감정을 숨겨 두고 기도 성취만 바라고 있었습니다. 어째서 그 당시 그렇게도 법문을 소화하지 못했는지 지금 돌아보면 스스로 의아해집니다. 정말 마음 바꾼다고 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울 수가 없었습니다. 중생들의 이런 생활면도 모르시면서 법문하시는 스님이 답답하게도 생각되었습니다. 정말 스님 말씀대로라면 내가 기도할 자격이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부처님 법문에서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염불하고 독경하고 법문 듣고 법등모임 열심히 참여하고 수행일과를 거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사이 세월은 흐르고 문정법등이 새로 출범하지 과분하게도 마하보살 부촉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기도도 부족한 제가 법등형제와 의논하고 법등 가꾸어 갈 책임을 맡게 된 것입니다. 큰 스님께서 내리신 부촉장을 받는 순간 항상 부족한 저였지만 연세 드신 분은 친정어머니 같이 나이 비슷한 분은 형제 같이 의논하여 법등을 잘 키워 가겠다고 가슴 깊이 다짐했습니다. 법등 가꾸는 일이 부처님 받드는 일이니 저에게는 성현의 가호가 있을 것을 믿고 다시 원했습니다. 그리고 정성 다해 기도하며 법등일에 뛰었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겨울 명교사(明敎師) 교육이 있었을 때 제가 불광사에 처음 오던 날을 생각해서 불자의 내실을 가꾸어 가야겠다는 일념으로 힘든 교육을 받았습니다.

    부처님 감사합니다.
  이젠 모든 일이 감사하기만 합니다. 지난날 그렇게도 원망하고 불평불만만 가득하였던 저였는데 그 모두가 감사하기만 합니다. 그 모든 게 아니었다면 오늘의 제가 될 수 없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원망하고 대립하고 미워한 인연에 감사하며 마음을 비우고 나를 이겨가며 힘들게 살아가는 것에 감사합니다. 저는 이렇게 해서 진실불자로 진실인간으로 성장해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법당 새벽정근에 참석할 수 있는 건강에 감사합니다. 2년 전 새벽기도 다닐 때 버스에서 내려서 한참 걷다보면 술취한 사람을 만나 무서움에 가슴 두근거리며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 마하반야바라밀” 하면서 미끄러운 길을 걸어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고마우신 법우가 매일 새벽 차를 가지고 나와 함께 갑니다.
  큰 원 속에 생각지도 않던 작은 원들이 하나하나 성취되고... 이제는 원망하며 부처님 보던 마음은 옛날이야기입니다. 저의 남편도 지난겨울부터 일을 하고 계십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주위 모두가 감사한 사람뿐입니다. 지나간 모든 사람도 지금의 모든 사람도 앞으로의 모든 사람도 제겐 다시 없이 소중하고 감사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난 동안 지은바 모든 악업은 무시이래 탐진치로 말미암아서 몸과 말과 뜻으로 지었사오니, 제가 이제 그 모두를 참회합니다.” 정말 갚은 마음으로 참회합니다.
  지난 1월 마지막 일요일 저는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분에 넘치는 부촉을 받았습니다. 송파2구 교무보살 부촉을 받은 것입니다. 아직 저에겐 너무 무겁고 큰 옷이었습니다. 저는 너무 빨리 과분한 인정을 받았습니다. 저는 이 소중한 부촉이 부처님의 크신 은혜인 것을 굳게 믿습니다. 저희들을 더 빨리 키우고 더 많은 부처님 일 받들며 밝은 날을 살아가라는 부처님의 크신 뜻인 것을 압니다. 저는 맹세코 크신 부촉을 저버리지 않고 법등 가꾸기에 정성을 바칠 것을 다짐합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저의 발원은 달라졌습니다. “부처님 저에게 모두에게 베풀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주소서. 모든 이에게 꼭 필요한 자가 되게 하소서. 부처님 항상 함께 하시는 크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법회에 오던 날 처음 찬불가 부르면서 다짐했던 것처럼 “온갖 고난 기어이 이기오리다. 이 고난 기어이 이겨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겠습니다. 불자 정광화는 기어이 진실정광화가 되겠습니다.”하고 다짐합니다.
저를 불광법회에 인도해 주신 대구 황룡사 스님께 감사의 말씀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