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인간주의적 치료법

권말기획 - 불교와 상담 (3)

2009-09-17     관리자
   서양의 카운슬링이나 정신분석을 통한 정신치료의 최고 목표는 불교수행의 목표와 같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목표에 이른 경지에서는 불교수행에 의한 경지가 훨씬 더 높다고 볼 수 있지만 그 지향점에 있어서 카운슬링이나 정신분석과 불교에 공통점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특히 카운슬링이론 가운데 ‘인간에게는 스스로 자신의 길을 발견하고 성정해 나갈 수 있는 능력, 자기실현의 의지와 아울러 선한 마음을 갖고 태어난다,’고 보는 미국의 로저스의 인간중심의 상담 이론은 인간 누구에게나 불성(佛性)이 있다고 보는 불교의 인간관에 접근하고 있다.

    공감적 이해의 인식
  치료받는 사람은 치료하는 사람이 자신에게 무조건의 적극적 관심과 이해를 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즉 상담자의 동사적(同事的) 자세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공감적 이해”하는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여기서의 ‘공감(共感)’이란 서양 사람들이 말한 것을 그대로 번역해 놓은 것으로 ‘동정(同情)’이라고 번역할 수 없어 공감이라 번역한 것이다. 서양 사람들은 이를 상담자는 상담을 하러 오는 사람의 내면적인 준거체제를 ‘공감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고 표현한다.
  여기서 ‘준거체제(準據體制)’라는 용어는 심리학적 용어로서 일상 시사용어로도 쓰이기 때문에 설명을 덧붙여 보면 ‘준거’란 기분이다. 가령 예를 들어 보면 한겨울 눈이 막 쏟아지는데 알프스 산중에서 어떤 기사가 말을 타고 호수를 찾아 헤매지만 호수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실은 자신이 호수위에 서 있으니 보일 리가 없다. 호수에는 얼음이 얼어붙었고 그 위에 눈이 높이 쌓였으니 기사가 보기에는 들판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기사는 호수위를 걷고 있지만 들판을 걷는 기분으로 걸었다.
  여기서 실제적 환경은 호수지만 마음의 환경은 들판이다. 다시 말해 지리적 준거는 후수이고 마음의 준거는 들판인 것이다.
  또 다른 예로서, 어떤 아이는 아버지가 제대로 벌이를 못해서 조그만 집에 살고 이웃집은 이층 슬레이트집에서 잘 살면 이 아이는 등록금을 낼 때마다 ‘나도 저런 아버지가 있었으면’하는 생각을 늘 하게 된다. 그렇게 생각할 때 이 아이의 아버지 준거는 이웃집의 아버지이고 실제 아버지는 자기 아버지이다.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나는 돈 많이 벌어서 미국에 이주하여 미국 시민권을 따야지’하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의 마음의 조국은 미국이고 실제 몸담고 있는 조국은 한국이다. 내적(內的) 준거(準據) 즉 진짜 마음의 주인은 미국인 것이다.

    노동은 신성하다.
  사실 현대사회는 ‘준거’가 하루가 멀다 하고 달라진다. 왜냐하면 옛날과 달리 마음을 괴롭히고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이 부지기이기 때문이다. 공장을 예로 들어 보자. 과거에는 물건을 만들 때 노동이 신성하다고 했다. 그것은 인형 하나를 만들어도 자신이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기 때문에 인현에는 나의 혼과 피땀과 욕심이 담겨 있다. 내가 밖으로 나가 확대된 것이요 커진 것이다.
  예술가가 그림을 그려 놓은 것이라든지 조각을 해놓으면 그것은 자기의 분신이다. 내가 나 자신 밖으로 나가 형성된 것이니 결국은 ‘제2의 나’이다. 그럴 때 그 일은 신성한 것이고 고상한 일이며 따라서 참으로 성스런 노동이라 할 수 있다. 노동은 성스러울 때 ‘노동’으로의 가치가 있다. 내가 피땀 흘려 뿌려 놓은 씨가 가을에 열매를 맺을 때, 그 열매는 정말 거룩한 것이 되고, 그 노동은 참으로 가치 있는 것이 된다. 내가 외화(外化)된 것이기에.
  그러나 요즘은 그렇지 않다. 하루 종일 하는 일이 납 때우는 일이거나 나사를 조이는 일이다. 그리고 나서 만들어져 나온 것을 보면 커다란 TV이다 그러면 ‘이것은 누구의 작품인가?’하고 묻는다면 납땜한 사람의 작품이라고 나사를 조인 사람의 작품이라고도 할 수 없고 그렇다고 그들의 작품이 아니라고도 할 수가 없다. TV를 만들긴 만들었지만 그중에 아주 적은 부분을 손 댓을 뿐 전체를 만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즘은 일을 해도 보람이 없다. 일한 결과도 보이질 않는다. 옆에서 같이 일하는 사람들끼리 같은 길을 간다는 느낌도 없다. 저 사람은 뭐하고 이 사람은 뭐하는지도 모른다.

    한울타리 속의 이방인
  점심때 시내의 재벌그룹 빌딩에 한번 가 보라. 경리과에 근무하는 사람, 판촉과에 있는 사람 또 생산과에 있는 사람들이 점심을 먹으러 엘리베이터를 타고 함께 내려온다. 그러나 같은 회사에 근무하건만 서로 서로 목례도 없다. 왜냐하면 서로가 무엇을 하는 일에 두려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경리과에 있는 사람은 판촉과 사람이외국어도 잘 하고 사람도 잘 사귀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무엇을 하는지 모르니까 두렵고 판촉과에 있는 사람은 생전 컴퓨터 놓고 장부정리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 사람들에게 돈을 맡기고 무엇을 하라고 하면 전혀 못한다. 서로 다른 분야에 대하여 모르기 때문에 상호 두려운 것이다. 외국인과 진배없다. 자신이 모르는 분야를 담당하고 있기에 나와는 이국인(異國人)이다 라는 기분이 들어 한울타리에 살아도 모두 남이 되어 있다. 따라서 같은 일을 해도 동료애가 생길 리 만무하고 일을 해도 일 자체에 재미가 없다. 그 일의 결과를 모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사실 우리가 무조건적인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그래서 상담자가 거울이 되어 상대를 비춰 줄 때, 상대편이 마음을 편히 가지는 이유도 바로 이렇게 현대사회 속에서 겪게 되는 상황 때문이다.

    가정으로부터의 소외
  예전에는 이것이 가정에서 모두 해결될 수 있었다. 가족들은 자기 아버지가 무엇을 하며 어머니가 무엇을 하는지 알았다. 그런데 요즘에는 자식들이 아버지가 회사에 가서 무슨 일을 하는지 전혀 모른다. 또한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그날 밖에서 했던 일을 집에 와서 설명해 보았자 식구들이 모르기 때문에 얘기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와 피곤하니까 맥주 한 잔 마시고 비스듬히 누워 TV나 보다 잠이 든다. 이는 일본이나 독일의 경우 지만 한국도 서서히 그렇게 되어 가고 있다. 다시 말해 같은 가족끼리도 서로 소외되어 있다는 얘기다.
  지금 내가 있는 대학의 모교수를 예를 들어 보면 그가 재작년인가 상처를 했다. 암으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는데 앞이 암담해지더라는 것이다. 상처의 아픔도 있었겠지만 평생 공부만 하면서 학교에 강의하러 왔다갔다만 했지, 살림을 산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서랍 속에 통장은 있는데 이것을 어디 가서 어떻게 찾아야 할지도 몰랐던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겠으니 당황하고 암담해질 수밖에.
  가정에 이렇듯 전문화되어 있다는 얘기다. 나 또한 내 와이셔츠 사이즈를 모른다. 내가 사본 일이 없기에 소비는 안사람이 하는 것으로 딱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소비에 관한 지식은 전혀 문외한이다. 완전히 별도인 것이다.
  가정교육 역시 마찬가지이다. 가정에서는 학교의 하청작업만을 하고 있을 뿐이다. 학교에서 숙제를 내 주면 집에서는 숙제 내준 것만을 봐 줄 뿐이다. 그 외에는 하는 일이 없다. 모두 다 이렇게 서로서로 소외되어 있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치료하는 사람은 어떠한 것을 제시해 준다거나 원조해 준다는 식으로는 이제 되지 않는다. 지금은 비춰만 주면 된다. 본인이 더 잘 아니까. 맑은 거울이 되어 비춰만 주면 된다는 뜻이다. 이러한 면에서 인간주의적인 상담은 그리 쉽지만은 않다. 그래서 지금까지 말한 조건이 성립되기만 하면 상담은 저절로 이루어질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이 인간주의적인 치료법이다.

    치료능력은 스스로에게 있다.
  지금까지 얘기한 인간주의적인 치료기법의 골자는 인간에게는 누구나 자기 자신을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상담자는 그 능력을 개발하는 역할만 하면 된다는 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상담자는 고도의 인간주의적인 셩숙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 점과 철저히 자기 나름대로의 인간관이 확립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상담자의 자실은 원만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처해 있는 여건으로는 그렇게 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최근 우리 사회에서도 이렇듯 원만한 인격의 성숙을 어렵게 하는 사회적 여건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 가지 움직임이 일고 있다. 그중의 하나가 ‘카운슬링’이며 대학에서도 강의가 개설되는 등 카운슬링의 기법에 대한 연구가 확산되고 있다.
  또한 회사마다 상담요원을 두는 경우가 늘고 있으며 외국의 경우 회사 내에 상담실과 유사한 부서를 두기도 한다. 그 목적은 물론 기업의 생산성 향상에 있다. 다시 말하면 생산적인 측면에서도 생산자의 마음의 안정이나 갈등의 해소 원만한 인격의 형성은 생산능력의 향상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인간주의적 치료법의 현황과 발전방향
  그러면 현재 우리사회에서는 생산성 향상이라는 방향에서 인간주의적인 치료요법이 얼마만큼 발전되어 있고 어떻게 현실로 나타나 있는지 알아보자. 이에 앞서 내가 사는 현대사회라는 사회적 조건을 이해한다면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에 이것을 앞서 짚고 넘어가도록 한다.

    고정된 모습은 없다.
  현상이라는 말이 있다. 현상은 모습이 나타난다는 뜻인데 모습은 고정적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다. 내 눈밖에 어떤 고정된 만들어진 모습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가령 예를 들면
  동녘에 달이 떠오를 때 어떤 사람이 ‘쟁반같이 둥근달’이라고 표현했다고 하자 그러면 그 달의 모습은 쟁반 같은 것이다. 그런데 물리학과에 다니는 어떤 대학생보고 ‘달은 쟁반같이 둥글다’라고하면 그는 당장 잘못되었다고 지적할 것이다. 지구학이나 우주과학에서 ‘달’은 수많은 ‘위성’중의 하나로서 그것을 우리는 ‘달’이라고 이름붙인 것이며 직경은 얼마고 어떤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등 ‘쟁반같이 둥근달’이라는 말을 일축해 버린다.
  이럴 때 물리학과 생이 말하는 것은 고정된 세계이다. 직경은 얼마고 구성물질이 무엇이라는 것은 교과서에 그렇게 써 있고 미국사람이나 독일 사람이나 한국 사람이 모두 그렇게 생각하므로 만고불변의 진리라는 얘기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은 그 물리적인 지식이 옳은지 모르지만 그것은 장담할 수 없다. 100년 200년 지나면 그 지식은 틀려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경험으로 증명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지금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수학에서 확률이니 대수의 법칙이니 집합론 등을 배우지만 일제시대만 해도 집합론과 같은 것은 박사들이나 하는 것으로 알았었다. 마찬가지로 순열이나 조합, 확률 등도 고등수학에 속한 것이었다.
  뉴턴의 만유인력 또한 당시는 최첨단의 과학이었지만 지금은 상대성원리라는 것이 나와 틀렸다고 되어 있다.
  유크리트의 기하학 역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만고불변의 진리로 인식되던 것이 요즘에는 전부 부정은 하지 않는다 해도 유크리트적인 공간은 일부 인정하되 그보다 더 큰 공간이 있음을 발견했던 것이다.
따라서 물리학이나 화학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고정된 정해진 세계가 있다고 하여도 우리가 보기에 쟁반같이 둥글고 밤에 보면 편안해 지는 달 그러한 달이 있다는 것 또한 틀림없다. 많은 사람들의 눈에 그렇게 보이는 이것을 현상이라고 한다. 이러한 현상이 인간에게는 더 큰 뜻을 주는 것이다. 물리나 화학에서 만들어 놓은 지식은 그만큼 큰 의미를 주지 못한다.
  서울에 「의학협회」라는 곳이 있어 한번은 요즘 어떤 회사가 많은지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요즘에는 기질적인 병보다 마음의 병이 더 많다고 한다. 기질적인 병이란 신체적인 병으로서 못 먹어서 나는 병, 다쳐서 비위생적이어서 유행병에 걸린 것 등을 말한다. 이러한 기질적인 병보다 신경성 환자가 늘고 있어 병원을 찾는 사람들의 70%가 마음의 병이 그 원인이라는 것이 의사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이는 물리적인 것, 만들어진 규전된 것에 사로잡혀서 현상으로 나타나는 마음의 생명을 소홀히 한 결과이다.

    과거의 지식만으로는 행세할 수 없는 시대
  지금 우리는 급격하게 몰려오는 지식의 홍수시대를 맞고 있다. 내가 대학을 나온 지 한 40년 되었는데 그때 배운 지식이 지금은 소용이 없어졌다. 그 당시 배운 지식만으로 내가 지금 대학교수를 하려고 한다면 무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의 어떤 학자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세계가 시작해서 1950년까지 쌓아 놓은 지식하고 1950년부터 1965년까지 15년 동안 쌓은 지식의 양이 같다는 것이다. 인류가 시작하여 500만년 동안 쌓아놓은 지식과 15년 동안 쌓은 지식이 같다는 얘기다.
  따라서 지금 사회가 어떻게 변화해 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확실히 알아서 그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따라 가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