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실록] 22. 死門을 닫아준 光明

▨ 신앙실록(22)

2009-09-15     오용현

인민군에 의해 이북으로 끌려갈 처지에 있었지만 「나는 살 수 있다.  성인이 나를도우신다」라는 생각에 내 마음은 사뭇 편안하고, 거룩한 힘이 나를 감싸주고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1] 온 생애를 비춰 주신 부처님

  그동안 불광을 읽고 보면 그 속에 부처님 가르침도 많이 있었고 부처님 법을 믿고 수행하여 은혜입은 사례도 많이 보았습니다.  모두가 커다란 신심과 놀라운 염불경전을 하여 부가사의한 공덕을 입은 것을 보면서 참으로 불보살님이 감사하였고 또한 그러한 복을 받은 이들을 충심으로 축복해 하였습니다.  「신앙실록 」에 나오는 분들의 경우에 비하면 저의 경우는 비교가 안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다른 분들은 어려움을 이기면서 큰 용단심을 내어 기도하고 염불한 공덕으로 부처님의 큰 은덕을 입었지만 저의 경우는 부처님께서 저에게 은혜를 먼저 주셨고 저는 지금 조금이나마 부처님 은공에 보답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의 경우를 통하여 생각해 보면 부처님께서는 항상 저희들을 감싸주시고 보호하여 주시며 어려움을 당하여 난을 막아주시는 커다란 자비를 항상 우리에게 주시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부처님께 기도하고 구원을 청하기 전에 먼저 우리 인생전부를 다비춰 봐 주시고 살펴주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점에서는 틀림없이 불보살님은 우리의 과거도 전생도 다 알고 계시며 그 인연으로 앞으로 나타날 금생의 일도 다 아시며, 긴 미래의 일까지도 다 알고 계시는 것으로 믿습니다.  그렇지 아니할때 저의 경우에 합리적 해석이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수행 영험기와는 좀 색다른 본인의 체험과 현재를 적어 보겠습니다.

[2] 死門이 닫히다

  그때는 6.25가 한참인 1950년 8월2일입니다.  6.25의 공산군 침입 중에도 저는 다행히 착한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지금의 서울 강남 청담동에 숨어서 지냈습니다.  수일전 심한 폭격이 있는 다음 당시 지금 서울 연지동에 계시던 누님댁이 걱정이 되어 살며시 서울 시내에 들어와 봤습니다.  다행히 별일 없이 연지동까지는 왔는데 누님댁을 백미터도 안남긴 지점에서 공산당 청년대원에게 붙잡혔습니다.  그 곳에서 보니 계속 행인을 붙잡아 들이는데 나중에 안 일이지만 전 서울시내의 젊은 사람을 모두 잡아 들이는 모양이었습니다.  「동무 좀 봅시다」해서 끌려 온 살람이 모여 드는데 그날 저녁 집합한 곳이 청계천 곁에 있던 일신 국민학교 입니다.  밤이 되면서 계속 잡혀 들어오는데 약3천명은 넘어 보였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동무들은 미제의 압제 밑에서 고생하다가 이제 다행히 인민군대에 의하여 해방되었다.  지금 이북 땅에는 미국의 폭격으로 많은 주요 시설이 파괴되어 있으니 이것을 복구하는데 참여하여 은공에 보답할 기회를 주겠다.  그러니 모두 자진해서 참가하라 」는 것이었습니다.  몽땅 이북으로 강제 노역장에 끌려가는 판국이었습니다.  학교요소 요소에 집총한 공산군이 깔려 있어서 어찌할 도리가 없는데 시간은 흘러 다음날도 계속 그 곳에 갇혀 지내고 8월 4일이 되어 새벽 1시가 되니 모두를 운동장에 세워 놓고 대열을 정돈하기 시작했습니다.  5인에 한 사람씩 감시원을 두고 10인에 1명 꼴로 경비병이 들어섰습니다.  이제는 꼼짝없이 죽음의 대열에 낀 것입니다. 

  그 때 연지동에서 함께 붙들려 온 일행 중에 학생들이 셋이 있었는데 한 삶은 연희대(지금의 연세대) 학생으로 병원에서 맹장수술하고 귀가 도중 잡혀온 사람이었고 또 한 사람은 고대생으로 반공학생 투쟁을 하던 열렬한 학생회 간부였고, 그리고 당시 경희대에서 적을 가지고 있던 저입니다.  서로들 헤어지지 말고 무슨수로 든지 탈주하자고 굳게 다짐하였는데 그때에 이르러서는 아무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마음 한구석에는 「나는 살 수 있다.  성인이 나를 도우신다.」라는 한가닥 생각이 있었습닏.  그러기에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성현의 도움을 입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된것은 전 날의 꿈에서 비록합니다.

  눈 앞에는 많은 군중들이 서울 동대문 안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군중대열 밖에서 구경하고 있다가 어느덧 군중에 휩싸여 행렬 뒤에 말려들어 막 동대문 안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동대문이 철커덕 닫히고 말았습니다.  그 때 나도 모르게 훌쩍 뒤를 돌아보니 눈부신 광선일 동북쪽으로부터 나에게 비춰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마음은 사뭇 편안하고 그 빛속에서무엇인가 거룩한 힘이 나를 감싸주고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는 중에 꿈은 깨었던 것입니다.  학교 운동장에서 점검을 마치고 새파란 소년병의 호령에 따라 막 죽음의 행렬이 시작한 순간 정지명령이 내렸습니다.  행렬을 지휘하던 소년병이 큰 소리로 외치기를 「오늘밤중에 3.8선을 넘어서야 한다.  그러니 각자 최선을 다하여 낙오하지 않도록 하라.  만약 병이 있어 행군을 따르지 못할 자는 밖으로 나와라 」합니다.  그러니 행렬중 약 3분의2가 열 밖으로 나왔으므로 큰 혼란을 일으켰습니다.  경비병들은 하늘을 향하여 총을 난사하면서 열을 정돈하였고 「만약 위장자가 발각되면 엄중처벌한다 」고 여러차례 협박하는 바람에 거의 모두가 행렬에 돌아갔고 최후까지 남은 것은 200여 명이었습니다.  모두가 떠난 다음 저희들 200여명은 다시 교실에 감금되었다가 명색 심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심사는 다른 것이 아니고 집총한 공산군이 하나 하나 사유를 물어보는 것이었습니다.  차례로 심사가 진행되다가 제차례에 이르자 경비병이 「동무는 왜못간다는가 」추궁해 왔습니다.  「나는 토목기술자인데 얼마전 한강철교 복구작업에 철교 위에 서서 감독하다가 공습을 당하여 철교에서 떨어져 허리를 다쳤습니다.」「기술자가 왜 여기를 왔는가 」「길에 나서니 잡혀 왔습니다.」「동부, 잡혀왔다는 말 하지마오.  여기는 자원해서 온 사람 뿐이요」하루종일을 갇혀있다가 저녁때에야 소위 심사발표가 있었습니다.  결국 고대생과 저를 포함한 50명이 귀가 조치되었고 나머지는 그날 밤 다시 이북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당시 저는 어떻게든지 살아나야겠다고 생각했지만 토목기사로서 한강철교 보수공사를 감독하다가 공습으로 낙상하였다는 이야기는 생각지도 않았던 말입니다.  그런데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술술 말이 나왔던 것입니다.  이래서 그날밤에 풀려나와 조심 조심 한강을 건너 집에 돌아왔습니다.

[3]報恩을 맹세하다.

  집에 돌아 온 후도 꿈속에 나를 비춰 주던 서울 동대문 청룡사 쪽에서 비춰 온 거룩한 빛은 무엇이었던가하는 생각이 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빛을 받을 때의 감동이 되살아 나는 것 같았고 또한 그 문이 닫혔기에 내가 살 수 있었다는 다행스럽고 고마운 생각이 마음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여러 어려움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꿋꿋이 소신을 가지고 일하였고 관직에서 물러날 때 까지 저는 최선을 다하여 일에 임해 왔습니다. 그동안에 포상 표창은 수십번이었고 공무원으로서 대통령으로 부터 훈장도 받았습니다.  저희집은 바로 산너머에 봉은사(奉恩寺)가 있어서 자주 갔고 부모님이 독실한 신앙가여서 저는 비록 별다른 신앙은 없어도 부처님 그늘에 있다는 생각은 항상 있어왔습니다.  서울 숭인동 청룡사는 저희 처가편의 신앙사찰이어서 종종 출입하였습니다.  그러나 공직에서 물러나면서 청룡사에 많은 일들이 저의 노력을 필요로 하였습니다.  그러 태조대 청건한 청룡사가 사찰부지 등기를 등한히 하여 경내지를 확보하지 못하게 되었고 이에 관련된 수많은 행정 또는 법적으로 곤란한 일들이 산적해 있었습니다.  제가 주지스님의 부름을 받아서 그동안 6.7년 동안을 동분서주하는 사이 부처님의 위신력을입고 관게당국의 혐력과 여러불자들의 도움으로 사찰기지는완전확보를 보았습니다.  저는 오늘의 제목숨이 있게 된 것과 평생의 공무원 생활 동안 대과없이 오늘에 이른 것이 오로지 청룡사부처님의 자비하신 은덕이라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불보살님께서는 저에게 힘껏 불사에 헌신하라는 고마우신 부촉이 있는 것으로 믿으며 오늘도 저의 심신을 기울여 부처님 은혜에 보답할 것을 기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