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가를 권하는 진정(眞定) 스님의 어머니여!

우바이 만세 여성불자 만세!

2009-09-14     관리자

부처님이 출가하신 달이다. 3월이지만 음력으로는 출가재일과 열반재일이 들어있는 2월이다. 필자도 이 음력2월에 출가했다. 부처님의 열반재일을 넘기고 이틀 뒤, 문득 나는 출가를 했다. 내가 출가하는 데 가장 큰 힘이 되어준 분은 나의 어머니다. 어머니는 아들 셋 중에 하나는 부처님께 바쳐도 괜찮다고 생각하셨고, 지금도 당시의 당신 생각에 대해 매우 잘한 것이라고 하신다. 이미 몇 년 전에 작고하셨지만, 나의 아버님도 출가 당시에는 길길이 뛰고 하시더니 몇 년이 지나고 나자 가끔씩은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아마 나라도 너처럼 젊었다면 출가의 길을 택했을 것이다. 네 어머니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더구나."

 해마다 이맘때면 내 출가할 당시를 회상하면서 마음을 다잡곤 한다. 아버님의 눈에 눈물이 고인 것을 훔쳐보면서 내 갈 길을 가야한다고 마음에 다짐하던 기억이 새롭다. 무엇이 진정한 효도인지, 출가자의 효(孝)가 과연 무엇이며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는 이론적으로는 훤하면서도 막상 실행하기는 너무나 어렵다는 것이 요즈음 나의 생각이다.

 『삼국유사』제9「효선편(孝善扁)」에 나오는

'진정사효선쌍미(眞定師孝善雙美)'를 읽으면서 오늘날 우리가 진리를 대하는 마음과 구도자의 자세, 그리고 자식을 훌륭하게 가르치는 어버이의 생각들을 비교해가며 느껴보고 싶다.

 법사 진정(眞定)은 신라 사람이었다. 출가전에 병정[卒伍]에 속하였는데, 집이 가난하여 장가를 들지 못하고 부역(部役)의 여가에 품을 팔아 곡식을 얻어 그 홀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집안의 재산이라고는 오직 다리 부러진 솥[鐺]한 개가 있을 뿐이었다. 하루는 한 스님이 문간에 와서 절을 지을 철물의 시주를 구하매 그의 어머니가 솥을 주었다. 얼마 아니하여 진정이 밖으로부터 돌아오니 어머니가 그 연고를 말하고 아들의 뜻이 어떠한가를 살펴보았다. 진정이 기쁜 빛을 나타내고 말하기를

 "불사(佛事)에 시주하는 일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비록 솥이 없더라도 상관없습니다"하고 오지그릇[瓦盆]으로 솥을 삼아 음식을 익혀 봉양하였다. 일찍이 항오(行伍 : 兵役)에 있을 때에 남들이 의상법사(義湘法師)가 태백산(太白山)에서 법을 설하고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말을 듣고 향모(向慕)하는 마음이 있어 그의 어머니에게 고하기를

 "효(孝)를 다한 후에는 의상법사에게 투신(投身)하여 머리를 깎고 불도를 배우겠습니다"하였다.

 어머니가 말하기를 "불법은 만나기 어렵고 인생은 너무도 빠른데 이에 효를 다한 뒤라고 하면 또한 늦지 않겠는가. 어찌 내 생전에 네가 가서 문도(聞道)하였다고 듣느니만 하겠는가. 너는 주저치 말고 속히 가라"하였다.

 진정이 "어머님 만년에 오직 제가 옆에 있을 뿐인데 어찌 차마 어머님을 버리고 출가할 수 있겠습니까"하니, 어머니가 "나를 위하여 출가를 못한다면 나를 곧 지옥에 빠뜨림이니 비록 살아서 삼뢰칠정(三牢七鼎)으로 봉양하더라도 어찌 효라고 하랴. 나는 의식(衣食)을 남의 문간에서 얻어서라도 타고난 수명은 누릴 수 있을 것이니 나에게 효를 하고자 하거든 그러한 말을 말라"하니 진정이 오랫동안 생각하였다.

 그 어머니가 곧 일어나서 집에 있는 쌀 자루를 모두 털어보니 쌀이 일곱 되였다. 그날 그것을 밥을 다짓고 이르기를

 "행로(行路)에 밥을 지어 먹으면서 가자면 더딜 것이니, 내 눈앞에서 그 한 되를 먹고 나머지 여섯 되 밥은 싸가지고 속히 가거라"하였다.

 진정이 울음을 머금고 굳이 사양하며 "어머님을 버리고 출가하는 것도 인자(人子)의 차마 하지 못할 일인데 더구나 배장(杯漿)과 수일의 양식을 모두 싸가지고 간다면 천지가 저를 무엇이라 하겠습니까"하고 세 번 사양하며 세 번 권하였다.

 진정이 그[母]의 뜻을 어기기 어려워 길을 떠나 밤낮으로 가서 3일만에 태백산에 이르러 의상에게 투신하여 머리를 깎고 제자가 되어 이름을 진정(眞定)이라 하였다.

 그 후 3년에 그 어머니의 부음(訃音)이 이르매 진정은 가부좌를 하고 선정에 들었다가 7일만에 일어났다.

 설자(說者)가 이르기를 '추모와 슬픔이 지극하여 거의 견디지 못하여 입정(入定)으로써 슬픔을 물에 씻은듯이 하였다'하고, 혹은 입정으로써 그의 어머니의 환생한 곳을 보았다 하고, 혹은 이렇게 함은 실리(實理)와 같이 명복을 빈 것이라 하였다. 이미 입정에서 나온 후에 사실을 의상에게 고하였다. 의상이 문도(門徒)를 이끌고 소백산 추동(錐洞)에 가서 초가를 짓고 무리 3천을 모아 약 90일간 '화엄대전(華嚴大典)'을 강(講)하였다. 문인 지통(智通)은 강에 따라 그 요지를 뽑아 두 권을 만들어 『추동기(錐洞記)』라고 하여 세상에 유통하였다. 강을 마친 후 그 어머니가 꿈에 나타나 "나는 이미 하늘에 태어났다"고 하였다.         一李丙燾譯 三省출판사 刊    81. 2. 20. 서울ㅡ
                  
 좀 지루한 편일지 모르나 전편을 모두 인용하였다. 진정 법사가 의상 큰스님의 제자라면 7 세기 중엽의 신라 스님이었음을 알 수 있다. 7 세기라면 이 땅의 불교가 토착한 후 한창 무성하게 자라고 있을 때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곧 우리들의 삶속에 항상 함께 하고 있다는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요즈음에 와선 서양의 종교가 들어오고 서양의 스님과 서양의 무당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기에 '우리들의 삶과 가까운 종교가 불교'라는 생각만은 하기가 어렵게 되었지만 말이다.

사진 / 관조 스님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부모가 자식의 출가를 바라보는 마음은 예나 이제나 같은 법이요, 독실한 불자거나 아니거나 간에 마찬가지다. 남의 자녀가 출가하여 스님이 되고 하면 그에 대해 고개를 끄덕이지만 막상 자기 자식이 출가한다치면 어느 부모 하나 반대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진리에 대한 소중함은 귀로만 들어 알았고 입으로만 되뇌일 뿐이다. 그보다는 인간의 끈끈한 정(情)이 우선하기 때문에 자녀의 출가를 권고하는 자는 없다.

 시집가고 장가가기 전에는 '저는 자녀가 몇 된다면 그 중에 한 녀석은 꼭 출가하도록 권할 생각입니다'라고 하다가도 막상 결혼하여 자녀가 여럿 태어났건만 어느 하나 출가시킬 생각은 않는다. 출가하겠다는 아이가 있으면 오히려 펄쩍 뛰고 야단인 것이다. 하물며 권할 마음을 내겠는가.

 진정 스님이 훌륭한 사문이 되고, 의상조사의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의 어머님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그녀는 인생의 의미와 불법의 소중함을 이론으로서가 아닌 몸으로 체득한 분이었다. 머리로써 불법을 이해한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낀 것이었다.

『삼국유사』에 표현된 대로 진정을 출가시키는 그의 어머니에게는 오직 문도(聞道)만이 가장 소중한 가치였다. 공자의 어록(語錄)에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으리라[朝聞道而夕死可矣]'는 말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진정 스님은 그의 어머니로 인해 새로운 태어남을 얻는다. 그에게는 육신의 어머니도 정신세계의 어머니도 동일한 분이었다. 그의 스승은 그의 어머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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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봉 : 스님. 치악산 구룡사에 입산하고 그해 합천 해인사에서 윤고암 대종사를 의지하여 축발수계하였다.
          현재 원각사 주지로 있으며 역저서에 「반야심경연구」「대각사상과 전개」「선의 진수」
         「코스모스와 만다라」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