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행원은 영원한 삶의 좌표

사면불 (四面佛)

2009-09-13     관리자
우리들은 현대 과학문명의 압도 속에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경우가 많지만, 알고보면 과학도 불법을 떠나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일체 만법은 불법 밖에 설 수 없고 일심(一心) 밖에 따로 존재할 수 없다. 이러한 진리를 모르는 데서 현대인은 방황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근원적 주체성을 상실하고 있다.

아무리 과학문명이 발달하여 생활이 풍부하고 편리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인간이 자신의 근원적 주체성을 상실하였을 때 인간은 인간성 상실로 인해 공허해 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거기엔 참다운 행복이 없다.

불법은 인간 존재를 여실하게 밝혀 주는 만고불변의 진리이기 때문에 불법을 알 때 인간은 제 위치를 찾게 된다. 참으로 불법으로서 세간법은 그 빛을 얻게되고 인간 생활은 윤기가 흐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불법을 현실의 삶 속에서 어떻게 닦아 가야 할 것인가? 불교는 아는 것으로 그치는 이론적인 철학이나 사상이 아니다. 진리대로 살고 진리대로 행동하는 것이 불교이다.

진리대로 행동한다 함은 보살의 행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보살의 행을 말할 때 우리는 보현보살의 열 가지 행원을 대표적으로 꼽게 된다. 보현보살의 몇 가지 큰 행원을 대할 때 우리의 마음은 새로워진다.

그 광대무변하고 곡진하신 대자비 원력 앞에 서면 눈물이 흐르는 듯한 감동을 느끼게 된다. 보현행원이야말로 인간들이 서로 사랑하며 인간답게 사는 길이며 이 땅위에 평화를 구현하는 영원한 지침이다.

우리들이 보현행원의 정신을 실천할 때 나라가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이보다 더 큰 보살의 길, 보살의 행은 없을 것이다. 종교가 중생을 제도하고 이땅의 평화와 번영을 기원한다면 결코 나라 사랑을 소홀해서는 안된다.

개인의 생명과 재산을 온전히 보전하기 위해서도 나라는 질서 속에 안정 되어야 하며 그러한 길은 국민들이 모두 한마음으로 서로를 존중하며 동포애, 형제애로 사랑해야 한다. 지금 우리 나라는 ‘빈약빈 부익부’의 양극화 현상으로 계층간의 반목이 심화되어 가고 있다.

참다운 종교정신을 몰이해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종교간 대립과 반목으로 상대방의 종교를 비방하고 있으며 자기 종교, 종파만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배타적이고 편협한 사고가 팽배하여

이러한 갈등은 다른 종교를 믿는 가족 간에도 불화의 씨가 되고 있으며, 앞으로 이 문제는 큰 사회문제가 될 염려가 있다. 종교지도자들의 깊은 통찰이 있어 대화합과 평화공존의 큰마음이 열려야 하리라고 본다.

각계각층의 지도자들이 소아병적인 이해타산을 떠나 모든 생명은 실로 대립하는 관계가 아니라, 우주 대생명의 한 뿌리에서 나온 형제임을 자각하고 서로 사랑하며 존중하는 인간정신을 발휘하도록 향도해야 할 것이다.

이에 보현보살의 십종대원(十種大願)으로 오늘의 국민정신을 바로 세워야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보현행원의 정신이야 말로 주체적 인간정신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법에 의하여 국민정신을 통일하는 데 힘써야 하겠다. 그리고 오늘의 어려움을 이겨나가야 하겠다.

보현행원품은 보현보살의 행원을 밝히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부처님과 같은 대지혜, 대자비의 무량한 공덕을 성취하려면 열가지의 행원을 닦으라고 하셨다.

보현행원을 닦으면 부처님의 대위신력을 성취하고 진리 본연의 자유, 평화, 행복을 이루고 정토가 실현된다는 뜻이다. 결국 행원의 실천이 요청된다. 관념이 아닌 행동으로서만이 진리의 성취도, 정토의 실현도 있게 됨을 알 수 있다.

행원품은 예경을 첫째로 말씀하셨다. 부처님께 예경하고 모든 사람을 부처님 같이 부모와도 같이 예배하고 공경하라고 하셨다. 부처님께 아무리 많은 예경을 한다 해도 일체 중생에게 예경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진실한 예경이 아니다.

일체 중생을 존경하라고 하는 이 말씀은 아무리 거듭해서 말하여도 모자라고, 또 그 깊은 뜻을 다 말할 수 없다. 모든 생명을 존중하고 모든 인간을 공경하고 인간의 존엄한 가치를 소중히 하며 인간의 능력을 개발하고, 인간을 존종히 여기는 이 인간존경의 가르침은 만고불변의 큰 진리이다.

불교의 역사적 사회적 가르침은 이 생명존중, 인간존엄 사상이 그 골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길 가운데 불자의 행위규범. 행동윤리로서의 계(戒)가 있다.

이 계는 출가인의 계와 재가인의 계가 있는데 이 계를 잘 지키면 자연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행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에게는 안락이 있게 되고 그들이 사는 사회에는 평화가 있게된다. 그만큼 계는 중요한 것이다. 물론 지키는 데에도 어려움이 있다.

계에 대한 현대적 의미와 사회적 의미를 논의하자면 보현행원의 실천 속에 다 들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예를 하나 들어보도록 하겠다. 보현보살의 열 가지 행원가운데 항순중생원(恒順衆生願)이 있다.

그 항순중생원은 ‘모든 중생을 부모와 같이, 부처님과 같이,아라한과 같이,부처님과 같이 받들고 섬기고 수순하라’라는 말이다. 모든 중생을 이와 같이 받들고 섬기고 수순하는데 어찌 악행이 있을 것인가.

거기에는 살생이 있을 수 없고 도둑질이 있을 수 없고 거짓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중생을 수순하라고 하는 것에는 일체 세간법(사회법)과 불법이 그 속에 온전히 포함되어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러니 따로 계행을 닦으려 하지 않아도 다 그 속에 구족하게 된다.

계의 사회적 의미가 보현행원의 실천에 있다고 했는데 이의 근본정신은 ‘자비’에 있다. 우리들 불자는 모름지기 부처님의 자비를 배워야하겠다. 부처님의 마음은 곧 자비심(佛心卽慈悲心)이며 보살의 근본 정신도 이 자비심에 있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사바 중생을 제도하시기 위하여 팔천 번을 이 땅에 출입하셨다고 한다. 그 사이 베푸신 자비와 지혜 방편은 한량이 없으시다. 경의 말씀과 같이 부처님을 대자비로 체를 삼으시고 중생을 교화하신 것이다.

부처님의 갖가지 가르침은 헤아릴 수 없다. 우리가 알 수 있는 부처님은 실로 중생을 위한 자비의 나툼인 응신(應身)이며 화신(化身)인 것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자비만으로는 살 수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자비가 가지는 적극적 의미를 모르는 데서 그런 말을 한다. 자비에는 진실로 중생을 위하고 그 사람의 참된 완성과 행복을 추구하는 깊고 넓은 헤아림과 지혜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비라고 하여 그 사람에게 타락이나 고통, 불행을 초래하는 일을 하거나 그런 것을 주장하며 자비행을 한다고 할 수는 없다. 동시에 많은 대중의 불행을 가져 올 집단에 참여하거나 그런 집단에 무조건 동조하는 것도 자비가 될 수 없다.

자비는 진실로 중생을 위한 뜨거운 열성과 진실이 있어야 함을 우리는 다시 알아야 하겠다. 또한 자비와 더불어 아주 소중한 것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지혜이다. 십중대계(十重大戒)의 결말도 지혜에 있고 육바라밀(六波羅蜜)의 맺음도 반야(般若)에 두고 있다.

지혜스러워야 그 행동이 빛나게 되어 있다. 발전도 희망도 참다운 성취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지혜의 입장에서 볼 때 우리는 불법을 만난 다행심을 잊을 수가 없다.

부처님 법이 우리 생명에 광명을 주고 있다. 부처님 법이 없는 곳에는, 거짓 행복에 속아 우리 인간이 죽음과 고난과 속박의 수레바퀴처럼 돌고 도는 운명을 벗어 날 길이 없게 된다.

부처님 법에 의하여 비로소 우리는 이런 고뇌와 속박의 멍에를 벗고 해탈하는 생명의 빛을 얻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영원히 고뇌의 멍에를 벗어버리고 대자유 해탈을 실현할 결정적 열쇠인 불법을 만났다.

이 다행심과 기쁨과 용기를 가지고  보현보살의 행원을 끝없이 실천해 나가자. 보현행원은 생명의 끊임없는 발전의 원리임을 굳게 믿고 이 크나큰 행원을 중생계가 다하고 허공계가 다하도록 줄기차게 실천해 나가자.

이것이 부처님의 크신 대비위신력을 받아 쓰는 길이며 또한 부처님의 한없는 은혜를 갚는 길이다. 보현보살의 열 가지 행원은 영원한 생명의 길임을 확실히 알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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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고산;  1.대한불교조계종 중앙종회의원 총무원 총무부장 역임 2.현 조계종 13교구 본사 쌍계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