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게 알고 널리 전하라(1)

나의 믿음 나의 다짐

2009-09-09     관리자

인간은 누구나 깨달음을 얻으면 동등한 절대적 인격을 지닐 수 있다. 이것이 대학생시절 불교를 처음 접하고 나서 얻은 내 나름대로의 불교와 타 종교의 비교관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대학교를 미션(Mission)계통의 학교를 다닌 덕택으로 원치는 않았으나 약 7여 년간 교회를 다닌 적이 있었으며 대학시절 리포트 과제중 '기독교 입장에서 본 타 종교의 비교'를 준비하느라 각 종교에 대한 발생근원, 발달사 및 교리를 접할 기회가 있었다. 그 중 불교라는 종교만이 유독 신을 부정하며 절대자와의 관계가 타 종교와는 사뭇 달랐던 것이 꽤나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었다.

 그래서 관련서적을 이것저것 들춰보게 되었으나 책만으로 얻은 나의 호기심은 더 이상의 진전없이 차츰 망각속에 묻혀져 버렸었다.

 1988년 봄, 나에게 크나큰 시련이 닥쳐왔다. 이제껏 건강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속에 살아왔던 내가, 그간 누적된 과로, 폭음과 불규칙한 생활로 인해 '간염'이라는 병명으로 생전 처음 병원침대에 누워있는 신세가 되었다.

▲ 그림 / 성파 스님
 병을 모르고 살아 왔던 터라 주위사람들로부터 주워들은 상식으로만 상상하여 나의 병은 간경화, 간암으로 진전되리라 믿었다. 하루하루가 불안과 초조의 연속이었다. 매주 검사결과 역시 더욱 악화되는 것으로 나타나 나의 불안감은 더욱 점증되어 갔다.

 그러던 어느날 병간호를 하던 처가 들어보라고 건네준 테이프를 받은 지 1주일이 지나서야 호기심으로 한 번 들어 보았다.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나에게 별로 와닿는 것은 없었으나 그중「보왕삼매론」의 한 구절이 내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일게 하였다.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성현이 이르기를 병약으로 삶의 양약을 삼으라'고 말씀하셨다. 그 뒤로 잠이 안 올 때마다 수면용으로 그 테이프를 계속 듣곤 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내 자신이 조금씩 변화를 갖게 되었다. 테이프는 물론 불교관련 서적, 특히 「불광요전」은 한글로 되어 있어 자꾸 보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병에 대한 불안감은 차츰 엷어져 가고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게 되었다.

 계속 검사결과는 좋지 않았으나 병상생활 한 달만에 의사의 권유를 뿌리치고 퇴원을 하여 집에서 한 달간의 요양을 취한 뒤 회사에 복귀하였다. 담당 의사는 극구 안정을 취하라고 하였으나 내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회사 복귀 후 3개월만에 건강은 아주 악화되어 GOT 655, GPT 971(정상인 : GOT 25, GPT 30)이라는 경이로운 숫자까지 치솟았다. 나는 내 판단이 옳지않아 드디어는 일이 잘못되는구나 싶었다.

 담당 의사 역시 다시 입원을 명령하였으나 나는 계속 고집을 꺾지 않았다. 나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퇴원 후 부터 불광법회를 나가게 되었고 일과정진하는 방법을 배워 집에서 식구 모르게 늦은 시간을 골라 다소 생소하고 어설프지만 나름대로의 기도를 하였던 것이다.

▲ 그림 / 성파 스님
 '부처님, 저로 인해 제 식구와 주위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루속히 이 병고를 떨치고 일어나 이들을 위해 열심히 살겠습니다. '병을 낫게 해 달라고 하는 간청이 아니라 일종의 자신에게 대한 다짐이었다.

 그 뒤 수차례 법회를 참석하면서 불교에 대한 나의 생각이 차츰 변하게 되었다. 이제껏 기독교적 입장에서 부정적으로만 보아왔던 문제점이 한 겹 두 겹 벗겨지기 시작했다.

 모든 중생의 생명을 중요시하며, 중생 모두가 무한한 능력을 가졌음을 그 법회에서는 특히 강조하며 교육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르침은 나 자신의 병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해주면서 차츰 불교를 신앙의 대상으로 간주하도록 변화를 주었고 좀 더 공부하겠다는 마음으로 불자기본교육을 받게까지 하였다.

 또한 교육이 도화선이 되어 불교에 대한 관심이 점증되면서 드디어는 '89년에는 법사자격을 주는 교육까지 욕심을 내어 수강신청을 하였다.

 회사 일과 후의 시간이지만 일이 많아 항상 늦게까지 잔업을 하는 동료들의 눈치를 살피며 하루도 빠짐없이 약 4개월간의 교육을 수료하고 나서 큰스님으로부터 직접 개근상을 받았을 때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나 그보다도 그간 많은 배움에 대한 만족감이 나에게는 실로 더욱 컸었다.

 실제로 이 두 가지 교육은 단지 불교를 좀 더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시작되었으나 교육을 받으면 받을수록 불교가 외부에 비쳐진 것이 너무나도 왜곡되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었다. 불자가 아닌 사람은 물론 불자 자신들도 불교를 올바르게 알지 못할 뿐더러 바른 신앙생활을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이를 하루속히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여야 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우선  내 가정에서부터 올바른 불교를 실천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나보다 먼저 불교에 입문한 처의 불교에 대한 이해와 신앙생활에 대해 지적과 토론을 자주 갖게 되었다.

 아울러 앞으로 한국불교를 이끌어 나아갈 세대인 내 자식부터 올바른 불교관을 갖도록 권유하였다. 그리하여 일요법회는 가족 모두가 참석하고 그 날 법문에 대해서 서로의 의견을 나누기도 하였다.

 또한 식탁에서는 온 가족이 합장을 하고 식사에 대한 공양계를 같이 합장을 한다. 요즈음은 이제 막 네 살이 된 막내녀석이 말을 제법 배워 눈을 지그시 감고 큰소리로 선창을 한다.

 "대자대비 부처님 크신 은혜 이 공양, 일체 중생 발보리 마하반야바라밀."

▲ 그림 / 성파 스님
 나는 다시 눈을 밖으로 돌렸다. 우선 작은 일부터 시작하였다. 불교잡지를 20권 구입하여 회사내 각층 휴계실에 비치하기 시작하였다. 사내 불자나 불교에 관심있는 사람을 위해서 였다.

 약 일주일 지난 뒤에 확인해 보니 한두 권만 남아 있고 모두 없어져 나는 속으로 '사내에도 생각밖으로 불자들이 많구나'하는 기쁜 마음으로 매달 잡지를 비치하였다.

 그러나 책들이 휴게실 책꽂이에 남아 있는 시일이 점점 짧아져 어떤 경우에는 비치한 다음날로 모두 없어져 버리곤 하였다. 하지만 매달 거름없이 반 년 이상을 계속하였다.

 그러던 중 이웃 부서에 근무하는 2명의 불자동료를 알게 되었으며 그들과 불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보다 더 적극적인 방법으로 전법에 나서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사내의 불자들을 모아 신행단체를 만들어 불교를 올바르게 배우고 전법하고자 주변의 불자들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내가 몸 담고 있는 회사는 3만 여명의 직원에 900여개의 전국 사업장을 갖고 있는 규모가 아주 방대한 회사이다. 본사에만 약 2,500여명이 근무하고 있어 통계상 우리 국민의 약 1/4이 불자임을 감안하여 수 백명의 회원을 확보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이 사람 저 사람 소문으로 본인을 접촉하여 우리의 취지를 전하고 동참을 권유하면 자기는 불교를 알지는 못하고 다만 좋아할 뿐이다. 단지 집사람이 다니고 자신은 가끔씩 따라 다닐 뿐이라는 등 자신이 불자라는 것이 노출되는 것을 무척 꺼려하는 것이었다. 특히 간부들일수록 더욱 심하엿다.

▲ 그림 / 성파 스님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열 명도 안 되는 사람들이 모여 약 3달간의 준비를 거쳐 89년 3월 7일 드디어 역사적인(?) '반야회'의 첫 법회가 열리게 되었다.

 비록 몇십 명 안 되는 인원이었으나 창립요원들은 뿌듯한 마음으로 계속 박차를 가하여 회원확보에 정진하기 시작하여, 인원수가 적어서 뒤로 미루어 왔던 창립기념법회를 같은 해 6월 30일에 갖게 되었던 것이다.

 무진장 스님을 초빙하고, 대불청, 조계사 청년회, 불광법회 마하보디 합창단 및 강동구 길2법등 등의 약 300여 명의 내외 불자들의 따뜻한 격려속에서 본사 강당에서 갖은 성대한 법회였다.
                                                                                             ㅡ다음호에 계속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