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하문] 시와 인생 / 서정주

2009-09-08     서정주

 시와 인생이라는 제목을 쓰고 보니, 웬일인지 내게는 먼저 「샤를르 · 보오들레에르」의 詩「뜨내기 길로 부르는 말씀」 속의 한 구절 ㅡ

안개 낀 하늘에
어리인 해는
눈물 속에 반짝이는
네 외면하는 눈만큼이나
내게는 정말 기막히누나.

Les Soleils mouillés
De ces ciels brouillés
Pour mon esprits ont les charmes
Si mystérieux
De tes traitres yeux,
Brillant à travers lents larmes.

ㅡ하는 것이 맨 먼저 생각난고, 그 다음에는 저 당나라 이백의

둘이 잔 드니 산꽃 망울 벙그네.
한잔들세. 한잔들세. 또 한잔들세.
내 취해 조을 걸랑 그댄 그냥 가시고,
내일 아침 생각나건 거문고나 안고 오게.

 兩人對酌山花開
一杯一杯復一杯
我醉欲君旦去
明朝有意抱琴來

― 하는 것이 또 아울러서 생각난다.

 이거 왜 이러는가를 가만히 생각해 보니 詩거나, 인생이거나 정든 사람 사이에서 못 잊어라. 연연해하는 것도 아까 「보오들레에르」가 표현해 보이고 있는 것처럼 나 역시 버리기 어렵고, 그러나 또 이렇게만 가슴 메이게만 살려다가는 심장이 첫재 견디어 낼 수 없는 것이니 이백이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좀 신선다웁게 『……내 취해 조을 걸랑 그댄 그냥 가시고’ 정도의 탐착 완화의 연습도 사람은 또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나 같은 사람이 이 세상엔 많은지 적은지 그건, 나도 모르지만서두, 하여간 나는 이 두 정황에 한쪽 다리씩을 걸치고 겨우 산답시고 있는 것만은 사실인 상싶다.

 그래 나는 어느 사인지, 그전부터 때때로 생각해 오던 버릇대로 지금 이 자리에서도 또 시인의 자격은 첫째 애인의 자격이다고 되풀이해 생각하고 있다.

 성인의 자격은 인류의 스승 자격을 가진 이라고 한다면 詩人의 자격은 아무래도 그 애인인 점에 있는 것같다. 「보오들레에르」가 서러웁고 딱한 현실의 바닥의 친우였다면 이백은 그 딱한 그들을 자연의 세연(洗然)한 기운으로 씻어 자연에 매접(媒接)시키는 그런 훤출한 애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성인에게는 아무래도 성인으로서만 걷는 지엄을 허트리지 않는 걸음걸이가 있어야 한다. 이백처럼 취해서 건들거리거나 강물속의 달을 만지려다가 육신의 목숨을 버리는 그런 따위의 비계율의 자유 속에 일순도 살아서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언제부터인가 성인보다 詩人쪽이 훨씬 人間的이고 매력이 있다는 생각에 기울어져 살아오고 있다. 물론 이렇게 해서 나는 聖人보다 훨씬  아래 사람으로 죽은 뒤에 평가될 것도 헤아릴 줄 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先人 ― 우리들의 정신의 역사속에서 가장 정밀했고 또 가장 명철했던 선인 석가모니 선생이 임종에 그 제자를 보고 「너희들은 애써 지옥으로 들어가거라. 되도록이면 오래오래 거기 머물며 그들의 마지막 마음의 벗이 되어라.」하신 뜻을 잘 안다. 그러나 나는 여기 영주해 떠나지 못할 것이고 어떤 스승의 걸음거리도 가지지는 못 할 것이고, 그래서 때로는 두 다리 중 한 다리씩을 따로따로 걸치는 일도 있을 것이다. 한 다리는 「보오들레에르」나 그런 사람들의 쪽에, 또 한 다리는 저 훤출한 이백이나 또 그런 사람들의 쪽에…·· .

 

미당 서정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