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성사 총간오도(塚間悟道)

연재소설 8

2009-09-04     관리자

2. 초개사(初開寺)

법과 법 아님을 온통 버린 원효는 탕탕무애(蕩蕩無碍)한 대자재(大自在)의 삼매에서
『금강경』의 사구게(四句偈)를 점검해 본다

 凡所有相 皆是虛妄
 범소유상 개시허망
 若見 諸相非相 卽見如來
 약견 제상비상 즉견여래

 무릇 있는 바 상이 다  허망함이니
 만일 보아서 모든 상이 상 아니면 곧 여래를 보리라.

 너무도 쉬운 도리를 여지껏 그는 어찌하여 사무치지 못하였던고?

 무릇 있는 바 상(相)이란 시간적으로 얼마만큼 유지하다가 결국은 공(空)으로 돌아간다.

 공(空)으로 돌아감을 짧은 안목으로 관찰할 수 없으니 중생은 현재 나열된 모든 상에 집착하여 그것이 실제 있는 것이려니 하고, 또 그리하여 그 상에 집착하여 갖가지 번뇌망상을 일으킨다.

 그래서 결국은 상[경계]에 얽매여서 상(경계)이 도리어 주(主)가 되고 내가 객(客)이 되어 갖가지 업을 짓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은 주와 객이 전도된 줄을 모른다.

 한번 전도된 견해는 갖은 업을 지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미궁에 빠지고, 그로 인해 무량겁을 고해속에 헤매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온 지난 날은 주객(主客)이 전도된 삶, 그것이요, 미망(迷妄)의 생애, 바로 그것이었다.

 설혹 악한 짓을 멀리 하고 선행을 쌓았다 해도 그다지 보배로운 삶이 아니요, 충효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행하였다 해도 그다지 자랑스러울 것이 못된다. 모두가 미망으로 지은 것이기에 말이다.

 그러나 마음의 눈을 뜨면 대각(大覺)의 장엄한 화장세계(華藏世界)에 이를 것이다.

 화장세계란 곧
불세계(佛世界)로서 온갖 시비(是非) · 선악 · 고락 등 일체 번뇌망상이 없는 오직 청정여여(淸淨如如)한 각(覺)의 경지에 이른다는 말이요, 각의 경지에 이르면 생사윤회를 벗어난다.

 "그렇다. 모든 중생은 현상계에 집착하여 실제 있는 줄로 알기 때문에 실상(實相)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중생이 보는 상(相)은 모두가 허상(虛相)이요 가상(假相)이며 환화(幻化)인 것이다.

 내 이제 우주의 실상(實相)을 바로 보매 눈을 몰고 오는 저 하늬바람소리며 개울에 흐르는 물소리가 곧 부처님의 무진법문이로다.

 어디 그뿐이랴? 저 우뚝한 뫼, 넓다란, 들판 모두가 부처님의 진신(眞身) 아님이 없구나.

 아 ! 나는 광겁을 미혹의 바다에서 생사의 굴레를 쓰고 허우적거리다가 이제야 열반(涅槃)의 저 언덕[彼岸]에 이르렀도다.

 아 ! 나는 이르렀노라. 불생불멸의 열반피안인 내 참 고향에 드디어 이르렀노라

 아 ! 나는 보았노라. 우주의 실상(實相)인 나의 본성(本性), 나의 참 고향산천을 이제야 똑똑히 보았노라……"

 그는 일어나 춤을 덩실덩실 추면서 외치고 또 외쳤다.

 그는 누구에게 자랑하고 싶으리만큼 기뻤다.

 그는 향을 사르고 남쪽을 향하여 세 번 절하였다.

 오늘의 기쁨을 있게 해 주신 원광법사에게 감사를 드리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그는 초개사를 나섰다. 하늘에서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 내렸다.

 지척을 분간키 어려우리만큼 쏟아져 내리는 함박눈을 시원해진 가슴으로 성큼성큼 받으면서 그는 갑사를 향해 날을 듯한 걸음이 된다.

 초개사를 수행의 도량으로 삼은뒤, 예닐곱 차례 내왕하였지만 그때마다 가슴에 막히는 게 있어 그 의심을 풀려고 치달리던 길이라 어쩐지 답답했었지만 지금 눈을 맞으며 가는 길은 그 무엇에도 비길 수 없는 환희로 충만해 있었다.

 그는 원광  법사의 가르침에 만분의 일이나마 보답하였노라는 자부심이 인다.

 이어 조부님과 부모님께도 오늘의 깨침은 정녕 보은(報恩)이 되리라고 여겨지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더 기쁘고 홀가분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깨침을 얻었노라는 자부심(?)은 수도인의 아상(我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치자 얼굴이 화끈해진다.

 '그렇다. 나는 지금 아상에 사로잡힌 거다. 아만심이 인것이다.…'

 깨쳤다 하여 무엇이 그리도 장하단 말인가? 또 이 깨침이 정작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에로의 첫걸음에 불과함일진대 무에 그리 대견하단 말인가 말이다.

 그는 내심 부끄러움이 앞선다. 원광법사를 뵈오러 가는 것부터가 아상이요 자만심인 것 같았다.

 "에잇 못난 놈 같으니라구."
 그는 스스로를 이렇게 꾸짖으며 남쪽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동쪽으로 돌렸다.

 어디를 향한다는 목적지를 정하지 않은 발길은 산을 넘고 들을 건너며 외로운 발자국만을 남기는 것이었지만 펑펑 내리 쏟는 함박눈은 그의 발자국을 이내 지웠다.

 그는 발자국을 내고 함박눈은 그것을 지우며 서로가 경쟁하듯 되풀이하는데 매서운 서북풍은 이 경쟁에 응원이나 하듯 쉬지 않고 불어대는 것이었다.

3. 유학(遊學)

화창한 날씨였다.
 입추(立秋) · 처서(處暑)를 지낸 근역(槿域)의 하늘은 연일 푸르렀고 오후가 되면 오동잎 끝에서는 서늘한 바람이 일었다.

 부처님이 계시던 서역천축국(西域天竺國)은 사시절이 더운 나라여서 비철[雨期]에는 행각하기가 몹시 불편하였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비철에는 출행을 삼가고 모두들 정사(精舍)에 들어앉아 정진에 힘쓰도록 가르치셨다.

 비철은 대개 음력 7월 중순 경이면 끝나게 되므로 7우러 보름날을 해제일(解制日)로 정하고, 4월 보름날을 결제일(結制日)로 정했다.

 '결제'란 바로 출행을 삼가는 기간을 일컬음이고 '해제'란 행각할 일이 있는 이는 출행하여도 무방한 시기를 가리킴이다.

 이 풍속이 중국으로 이어져서는 여름철의 석 달과 겨울철의 석 달을 결제기간으로 삼고 봄철과 가을철의 석 달씩은 해제기간으로 삼았다.

 그러나 해제 기간이라 하여서 필히 행각하라는 것은 아니다.
 부득이 출행해야할 사람만 행각하라는 것이지 무조건 너나 없이 나다니라는 것은 결코 아닌 것이다.
 춘하추동의 사계절이 뚜렷한 동양의 경우, 정진하기는 봄철과 가을철이 가장 알맞는 계절이다.

 그러므로 더위와 추위가 심한 계절은 '결제기간' 이라 하여 법으로 단속 정진하도록 하였고, 기후가 좋은 춘추는 정진하기도 좋으므로 수행자가 비교적 자율적으로 정진하도록 단속을 완화한 것이다.

 그러나 철저한 자유(自由)를 보장하고 있는 사원제도(寺院制度)는 해제기간을 전혀 단속하지 않으므로 수행승들은 해제기간만 되면 사해를 내집 삼아 행각하기에 바쁘다.

 더욱이 신라 사람들은 옛날부터 국선도(國仙道)의 수행을 모두들 익혔으므로 행각하기를 좋아했다. 국선도는 청소년들의 수행방법으로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아 행각하라고 가르친다.

 한 곳에만 정착하여 있느니보다 여러 지방을 순행하고 또 이름난 산을 찾아 오르면서 심신을 연마하는 것이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한 곳에만 머물면 때로는 권태가 나지만 여러 낯선 곳을 찾아 다니면 늘 정신은 새로워지고 항상 새 경계를 대하므로 마음도 또한 자연히 긴장되어 있기 마련인 것이다.

 이 국선도의 영향은 불가에 고스란히 받아들여져서 신라의 수행승들은 봄 · 가을만 되면 요란스럽게 떠돌아 다니는 것이었다.

 이 행각을 통한 심신 단련의 수행은 여러 가지로 이 점을 낳았다.
 가령 신라의 스님들이 백제국이나 고구려국에 행각하여 그 나라의 산천 지리며 풍속 등을 익혀오면 이는 곧 군사적 목적에 소중한 자료가 된다.

 '어느 지방에 갔더니 인심이 흉흉하더라. 그래서 민심의 동향을 살폈더니 그 고을 성주가 탐심이 많고 호색하여서 백성을 못살게 굴기 때문에 자연히 민심이 나빠졌더라.'

 이러한 정보는 작전상 중요한 자료가 된다. 어떤 고을을 점령하자면 먼저 민심의 추이가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고구려나 백제에 비교적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사람은 승려들이다.
 그래서 승려들은 나라를 위해 행각을 가장하여 이웃 나라에 다녀오는 이가 많았다. 물론 고구려도 마찬가지요, 백제도 역시 그러했다.

 그래서 삼국의 불교는 국가불교(國家佛敎)로 발전 성장하여 특색을 이르었다.
 출가위승(出家爲僧)한 승려는 마땅히 내 나라 네 나라라는 관념을 버려야 하는데도 삼국 모두가 각기 자기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터였으므로 삼국의 승려들은 은연중 적국 승려를 경계하고 또 적대시 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암투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좀 더 폭이 넓은 승려들은 아예 삼국을 떠나서 멀리 중국대륙으로 건너가서 철저히 수학하여 오는 이가 계속 늘어났다.

 신라에서는 원광 법사가 중국을 다녀온 뒤로 유학승이 부쩍 늘어나서 광활한 중국대륙이건만 고국승을 만나기가 그리 어렵지 않을 정도였다.

 아무튼 중국은 신라보다도 불교가 먼저 들어왔고 인구도 많고 문물도 더 발달되어서 고승도 훨씬 많았다.

 그래서 신라의 승려들간에는 중국에 유학하는 것이 마치 수행의 극치에 이르는 지름길인양 여겨 유학을 최고의 이상(理想)으로 삼는 경향이 짙어갔다.'

 오늘 같은 화창한 날씨에 조그만 걸망을 메고 서북으로 향하고 있는 두 구도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처서(處暑) 지난지가 며칠 되었지만 한낮은 꽤 더웠다.
 붉은 해가 정수리 위에 선 것을 보면 벌써 한낮이 된 듯했다 
 
"형님, 좀 쉬어 갑시다."


 어제 아침에 삭도로 깎은 머리가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의상(義湘), 고되지?"
 "아니요. 더워서요."
 둘이는 씨익 웃으며 마주 본다.
 "그래 좀 쉬어가세."
 길가의 귀목나무 아래에 걸망을 내려놓고 나란히 앉는다.
 "내 저기 가서 물을 떠옴세."
 원효는 걸망 뒤에 매어단 바가지 하나를 들고 산에서 흐르는 개울로 간다.

 먼저 세수하고 물을 퍼 마신 다음 바가지를 헹구어 다시 한 그릇 떠서 의상에게로 돌아온다.
                                                                                                             ㅡ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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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 : 화엄사, 범어사, 송광사에서 강주를 지낸 바 았으며, 현재 부산 미륵사 주지로 있다. 저서에 「양치는 성자」「초의 선사」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