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寺의 향기] 호서제일의 참선도량 덕숭산 수덕사

고사의 향기

2009-09-04     관리자

충절의 고향 예산고을. 태안반도의 남쪽 천수만으로 흘러드는 와룡천 상류에 위치한 덕숭산. 이 산자락에 자리잡은 수덕사는 백제시대에 창건된 고찰이다. 사기에는 백제말엽 숭제 법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하며, 제30대 무왕 때 혜연 법사가 여기에서 법화경을 강론했으며, 고려 31대 공민왕 때 나옹 화상이 중수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일설에는 신라 제26대 진평왕21년(599)지명 법사가 창건하였고 원효 대사가 중수했다고 하기도 한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1865년(고종2) 만공 선사가 중창한 후로 선종유일의 근본도량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역사를 담고 있는 수덕사는 한암 스님과 더불어 근대고승의 쌍벽을 이루었던 만공 스님이 이곳에 수년간 주석하면서 무수한 대덕을 배출하고 선풍을 크게 떨친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일반인들에게는 고려 때 지어진 대웅전(국보49호)과 그 벽에 그려진 고려벽화로 널리 알려져있다. 호서의 금강산이라고 일컬어질만큼 주위의 경관이 수려한 수덕사는 시인 고은 씨의 ‘상원사는 경건하고 수덕사는 호방하다’는 표현이 맞을 성싶다.
그것은 걸리는 바 없이 넓은 기개를 펼쳤던 만공 스님의 선맥이 그대로 끔틀거리고 있는 까닭이다. 일세의 대선사였으며 호탕하고 적정하고 무섭고 인자했던 숱한 일화를 남겼던 만공 스님은 1905년 봄 정혜사 밑에 금선대라는 초가암자를 지어 살면서 제자들을 길러내기 시작했고, 인근의 충의지사들을 은유로 격동시켜 항일 구국의 전열에 서게 했다.
이렇게 본다면 김좌진 장군을 비롯하여 윤봉길 의사 등의 독립지사들이 이곳에서 배출된 것이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닐것 이다. 태안반도가 본디 백제 이래 충철의 땅으로 국난이 있을 때마다 충의열사들이 쏟아져나와 신명을 바쳐 순국하는 전통이 있음을 잘 알고, 선사가 이곳 수덕사를 민족정기의 보고로 삼고자 하였던 것이 아닐까 추측하는 이도 있다.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만공 스님은 부근 결성출신인 만해 한용운 스님과 손을 잡고 한국불교가 완전히 일본화되는것을 막기 위해 이를 획책하는 본산 주지회의 석상에서 일본총독에게 호령한 일이 있다. 사찰령이니 사법따위를 제정하여 조선승려들을 대처, 식육, 음주로 파계시켰으니 이를 제정한 전 총독은 무간지옥에 떨어질 것라고 말하고,‘청정본연하거늘 어찌하여 문득 산하대지가 나왔는가’라고 호령하여 총독이 만공 스님의 도력에 기색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일제가 2차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전쟁물자 부족으로 놋쇠공출을 강요하여 민가의 식기 수저는 물론이요, 사암의 법구들까지 강탈해 갈 대 스님은 분연히 일어나 대종불사를 일으켜 이를 완성시킴으로서 민족정기가 건재해 있음을 과시하고, 안동 김 씨가 차지하고 있던 간월도 간월암 터를 되찾아 간월암을 다시 짓고 조국광복 천일기도 도량으로 삼아 광복을 기원하는 등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대무외행을 감행하였다.
이러한 대무대행은 스님의 선적 깨달음에서 비롯된다. 태허 스님를 은사로 하고 경허 스님을 계사로 하여 출가한 만공 스님은 1893년 23세에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의 화두에 의문이 생겨 공부하던 중 홀연히 한소식 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도 화두를 흩트리지 않고 하루밤을 지내던 중 새벽 쇳송을 할 때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를 외우다가 문득 법계성을 깨달아 기쁜 마음을 무엇에 비길 데가 없었다.
그 후 ‘만법귀일 일귀하처’의 화두는 더 진보가 없으니 조주 무자화두를 들도록 권하는 경허선사의 말씀따라 무자화두를 열심히 의심하던 중 새벽 종소리를 듣고 문득 재차 깨달으니 백천삼매와 무량묘의를 통달하게 되었다.
스승인 경허스님으로부터 전법계와 만공의 호를 받은 스님은 1905년부터 덕숭산 금선대에서 수년간 주석하면서 제산의 수행자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법을 펴기 시작하고, 수덕사, 정혜사, 견성암을 중창하여 무수한 대덕을 배출 하였다.
결국 만공 스님은 활연대오한 그의 선풍을 이곳 수덕사에서 드날렸으며, 수덕사 또한 만공 스님에 의해 그꽃이 만개하였다. 이렇게 만공 스님의 호방함이 겹겹이 배어있는 수덕사 일주문에서 경내로 향하는 긴 돌계단을 올라가면 현재 신축중인 황하루가 보이고, 동쪽으로는 커다란 관음바위가 보인다. 관음바위 옆에는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과 함께 현존하는 최고의 목조건물 중 하나인 대웅전이 있다. 대웅전 양옆에는 스님들의 수도장인 백련당과 청련당이, 그리고 앞에는 조인정사와 3층석탑이 있다.
또한 덕숭산 정상에는 수덕사 아우격인 정혜사가 있으며 수덕사 대웅전에서 정혜사까지는 숲속으로 나 있는 1천20돌계단이 있다. 이 1천여 돌계단을 오르다 보면 수덕사 뒷 등성이에 만공스님의 수많은 선승들을 지도하며 지낸 소림초당이 있고,스님이 수덕사에 있을 적에 세운 25척의 관음석입상이 있으며, 만공스님이 얼을 기리는 만공탑이 있다.
그리고 이 탑에서 조금 떨어져 금선대라고 불리는 곳에 진영각이 서있다. 이곳은 만공스님이 주로 수도하던 곳으로 진영각 안에는 경허, 만공, 혜월, 선사의 영정과 만공스님의 유물들이 보관되어 있으며, 뜰 아래에는 만공스님이 좌선하던 만공대가 있다. 이 외에 부속암자로 국내 최대의 비구니 참선도량인 견성암이 있고, 개화시대의 신여성을 대묘하며 여류시인으로서 만공선사 밑에 출가수행했던 일엽스님이 기거한 환희대가 있다.
특히 견성암의 대중방은 놀랄만큼크다. 장판지 2백40장이 깔려 있는 이방은 1백여명이 함께 공부하고 잠잘수 있는곳이다. 현재는 80여분의 비구니들이 이 선방에서 수선하고 계시다. 절이 있는 곳치고 어느 한곳 경치가 빼어나지 않은 곳이 없으며,또한 전설이 없는 곳이 없듯 수덕사에는 수덕각시의 전설이 있다.
한때 절이 무너졌는데 흉년으로 재건할수 없었다고 한다.그런데 어느날 남루하지만 아리따운 여인이 절의 공양주를 자청해 왔다. 그 여인이 공양주를 하고 있던 어느날 지방장관이 여기를 시찰하러왔다가 그 여인을 보고 반했다.여인은 수덕사 재건을 전제로 마을로 내려갈 것을 약속했다. 재건불사를 회향하는 날 드디어 그 여인에게 장관은 내려가자고 했다.
나만 잘 따라오라고 말하더니 그 여인은 뒷산으로 올라갔다. 장관이 아무리 쫒아가도 한걸음이 앞서는 여인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문득 그 여인의 자취는 없고 여인의 신발만 바위 위에 있었다. 바위가 갈라져서 바위 속은 깊었다. 장관은 비로소 그 여인이 불보실의 화신인 줄 알고 탐색을 부끄럽게 여겨 거사가 되었다고 한다.
현재 수덕사는 중창불사가 한창이다. 먼저번 주지 설정 스님에 이어 지난해말에 이곳에 오신 우송주지스님에 의해 수덕사는 새로운 면모를 갖추어 가고 있다. 선원, 율원, 강원을 갖춘 덕숭총림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국제선원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해 가기위해 황하루를 신축중이며, 누각의 돌계단 밑으로는 대형인공연못을 새로 만들고 있다. 그리고 수덕사 경내 입구에 너무 가까이 형성된 대규모의 상가들을 이전시키는 개발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다. 또한 세계평화를 기원하는 탑불사도 계획중이다. 인도의 복발탑 현식으로 조성될 이 탑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실 예정이다.
외형적으로 총림으로서의 면모가 갖추어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것은 정신사적 맥을 잇는 일이 아닐까. 만공 스님은 팔만사천의 법문이 부처님의 말씀이 아닌 바가 없지만 모두 어린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함에 지나지 않고 오직 마음을 가르쳐서 견성성불케하는 참선법이 있을 따름이라고 하셨다. 참선이야말로 참나를 깨닫게 하는 유일한 정로로서 세상학문은 현세의 이용레 끝나고 말지만 참선은 세세생생 구애없이 활용되는 학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현대인에게는 행주좌와, 어묵동정에 간단없이 정진할 수 있는 생활선이 필요한 입장이고 보면, 수덕사가 만공스님의 유지를 받들어 굵직한 선맥을 분출시켜 그 맥을 이어주었으면 하는 마음 금할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