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는 공부 하는 학교

*직장인의 불교신앙

2009-09-01     관리자
 우리가 사는 세계는「사바세계」이다. 사바세계라는 것은 참으며 살아가야 하는 세계라는 뜻이다. 세상 사람들의 얼굴 모양이 각각 다르듯 그 생각하는 내용, 목표 등이 모두 각각 다르고, 그 다른 것들은 서로 부딪치지 않을 수 없으니 제멋대로 살아가도록 허용하게 되면 싸움 그칠 날이 없을 것이다. 이속에서 싸움 없이 살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길은 참으며 사는 것이다.

   〖1〗육바라밀의 하나인 인욕바라밀

 불교에는 우리의 불교를 완성하기 위한 수행법으로서 「六 바라밀 행」이 있다. 그 셋째 덕목이 인욕(忍辱)바라밀이다. 그 앞에 나오는 덕목들, 즉 보시(布施)와 지계(持戒)는 내가 자진해서 적극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일인데 반해, 이 인욕바라밀만은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닦을 수 없고 나에게 인욕할 기회를 마련해 주는 남이 있을 때에만 가능한 수행이다.

   〖2〗나를 잊는 공부가 곧 불도 수행

 생각컨대, 불도를 닦는다는 것은 나를 잊어버리는 공부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나」라는 것은 남들과 대립되어 있는 나, 남들과 이해 상반되어 있는 나를 이르는 것인데, 이런 상대 세계의 나를 잊어버렸을 때 그 자리에 절대 무한의 나가 드러나는 것이므로 절대무한의 나를 실현시키기 위하여서는 상대 세계의 나를 완전히 부정해 버려야 하는 것이다. 불도의 수행이라는 것은 모두 상대 세계의 나를 부정해가는 공부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나」를 부정하는 것이 허무주의에 빠져드는 것인 줄 착각하는 분들이 있으나, 실은 그 정반대인 것이다. 상대 세계의 「나」는 본래가 허무한 것이고 실재가 아닌 것이므로, 이러한 허무하고 실재가 아닌 것에 국집하는 것이야말로 꿈 속에서 헤매는 몽유병상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다루어야 할 것은 참으로 있는 것, 즉 실재(實在)만이어야 하는데, 그 실재는 영원 · 절대의 것인 것이다. 그리고 그 영원 · 절대의 실재는 우리 모두의 「참나(眞我)」인데 그 「참나」는 「거짓 나(假我)」인 상대 세계의 「나」가 부정되었을 때에,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불도 수행은 곧 이 「참나」를 남김없이 드러내자는 것이므로 곧 불도 수행이란 「거짓 나」를 잊어버리는 공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3〗참는 것은 「거짓 나」의 부정

 참는다는 것은 자기 주장의 포기이다. 자기 주장만이 아니라 자기 권리의 포기이기도 한 것이다. 아니 더 극단으로 표현하면 자기 존재의 포기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경우 「자기」라는 말은 말할 것도 없이 남들과 대립되어 있는 존재를 뜻하는 것이므로 어디까지나 상대적 존재, 곧 거짓의 나를 말함은 두 말할 나위 없다.

   〖4〗환경의 어려움을 참는다

 첫째는 생활환경의 어려움을 찾는 것이다. 춥고 더운 것을 비롯해서 나의 생활을 지탱해 가는 과정에 나타나는 모든 불편한 일을 참는 것이다. 우리가 생존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 불평하고 있는 일들이 꼭 절대 필요한 것인가 하고 반성해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은 것이 사실인 것이다. 생존에 필요한 일들은 반드시 공급되어진다는 확신을 가지고 여러 가지의 어려움을 참게 될 때 나에게서는 생각지 않았던 큰 힘이 솟고, 기대하지 않았던 밝은 지혜가 열리는 법이다. 환경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비결은 불평과 한숨과 책임 전가 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참는 데에서 찾아지는 것을 잊지 말자. 허둥대고 불평하는 것은 나의 생명을 「거짓 나」에게서 찾으려는 착각에 말미암은 것이다. 광산의 갱 속에서 十四일만에 살아 나온 광부의 경우도 참았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었던 것이 아니가? 참는 것은 본능의 억제이기도 하고 경쟁심의 극복이기도 하며 허영심의 포기이기도 한 것이다.

   〖5〗자존심의 도전을 참는다

 둘째는 자존심에 대한 도전을 참는다. 자존심에 대한 도전은 남으로부터 모욕을 받는 경우와 경쟁에서 패배한 경우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다. 남들이 이유 없이 나에게 모욕적인 언사나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취하는 경우, 우리의 마음은 분노심을 일으키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이러한 때에 참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어떤 사람에게 이유 없이 뺨을 맞은 일이 있었다. 뺨을 맞고도 태연히 있는 스승에게 제자가 그 심경을 물었다. 소크라테스는, 「내가 미리 투구를 입고 오지 않은 것이 잘못이냐」 하더라고 한다. 고대 중국의 한신이 거리의 부랑배들에게 모욕을 당하고도 참았다는 것은 아주 유명한 이야기이다. 이분들은 그 마음이 지극히 컸기 때문에 순간적인 모욕을 잘 참아 넘긴 것이다. 부처님은 선세에 인욕선인으로 계시면서 가리왕의 무도한 모욕을 참아 넘기셨다. 남으로부터 가해 오는 모욕을 참는 사람이야말로 적극적으로 자기의 삶을 사는 사람인 것이다.

   〖6〗경쟁에 졌을 경우

 자존심이 상하는 다른 경우는 경쟁에서 졌을 경우가 그것이다. 경쟁은 꼭 이겨야 한다는 고정 관념에서 보면 진다는 것은 곧 자존심의 손상을 뜻하므로 그 경우 심한 모욕감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이 경우에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그 하나는, 「경쟁에 진 것만 해도 손해인데 다시 또 성내는 마음을 일으켜 건강까지 해치다니 이렇게 못날 수가 있는가」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성내는 마음이 우리의 건강에 얼마나 해로운 것인가」 하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일이다. 다른 또 하나의 생각은 경쟁을 「단 거리 경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적어도 장거리 마라톤을 뛰는 사람들의 경우처럼 짧은 시간의 승부를 관심 밖으로 몰아내 놓고 생각하여야 한다.

 그런데, 불자에게 있어서의 최종의 승리는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성불이다. 부처가 되는 것이다. 부처되는 공부의 과정에 있는 것이 우리 불자들이다. 그렇다면 그 과정에서의 우열(優劣)이 무슨 의미를 가지겠는가? 오직 참음으로써 나의 무한 가치가 드러나는 것이니 결코 경쟁에서 패배하였다 하여 나의 자존심이 손상을 입었다고 생각하지 말자. 그리고 영원히 계속되는 나의 인생인 까닭에 일회적 의미의 승부를 크게 생각하지 말도록 하라.

   〖7〗시기를 기다리며 참는다

 옛날 우리나라 고려 때에 윤 관(尹觀)이란 장군이 계셨다. 하루는 여인숙에서 묵으시는데, 그 집에서 기르는 거위 한 마리가 그 집에서 지극히 아끼는 구슬을 삼키는 것을 보았다. 얼마 안 있으니 그 여인숙 주인이 윤 관에게 구슬을 훔쳤는가 다구친다. 윤 관이 대답을 망설이자 주인은 곧 밧줄로 이 어른을 포박했다. 그때에 윤관은 그 주인보고 그 집의 거위도 자기 옆에 붙들어 매어 둘 것을 요구한다. 다음 날 아침 거위 똥에서 그 귀중한 구슬이 나왔다. 그때에 주인이 윤관에게 물었다. 『어째서 어제 밤에 거위가 구슬을 삼켰다고 말하지 않았오?』윤관의 대답은 이러하였다. 『내가 어제 밤에 그런 말을 하였다면 당신은 당장 거위를 죽이고 배를 갈라 구슬을 찾았을 것 아니겠소?』우리는 진실이 밝혀지는 시기를 참으며 기다리자. 성과가 나타나는 시기를 참으며 기다리자.

 직장은 참으로 우리가 참는 공부를 할 수 있는 좋은 학교임을 잊지 말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