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돈성불(圓頓成佛)

특별강연/보조 스님의 핵심사상

2009-09-01     관리자
 

 오늘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작년 11월 달에 제가 이 자리에서 「보현행원품」에 대하여 강연을 하고 반 년이 조금 지나서 또 오늘 이렇게 왔습니다. 오늘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제목은 「보조 스님의 핵심사상」으로 되어 있는데, 학문적인 천착은 하지 않고 오늘날 우리들이 현재를 살면서 이 보조사상이 현실과 어떻게 결부되는가 하는 데에 초점을 맞춰서 말씀드리려 합니다.

 먼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간단하게 제 소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란 한마디로 말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못된 짓을 하지 않게 하는 가르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못된 짓을 안 하면, 정신상태가 안정이 됩니다. 그러면 사람이 아주 슬기로워집니다. 지혜로워진다는 말씀입니다. 반면에 사람이 못된 짓을 하면 정신상태가 불안정해지고 즉, 마음이 불안해지고 사람이 아주 어리석어집니다. 사람이 어리석으면 마음이 불안해지고 그러면, 사람도 못된 짓을 하기 마련입니다. 같은 말을 조금 빙빙 돌리는 것 같은데, 즉 이러한 말을 통해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사람의 일상생활에 있어서의 일종의 악순환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문제는 어떻게 해야 이런 잘못된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느냐를 밝혀내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오늘 강연이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2세기말, 13세기 초에 살으셨던 보조국사 지눌, 그 스님의 가르침도 이러한 저술 가운데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사상이 원돈성불(圓頓成佛)이라는 사상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지금 우리들이 문제삼고 있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지혜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 원돈성불이라는 말입니다. 저는 오늘 보조국사의 저술 가운데 어려운 원문을 인용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런 어려운 원문을 놓고 학자들이 주고 받는 가지가지 학설이나 이론을 소개하지도 않겠습니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보조국사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처럼 들릴지 모르는 극히 상식적인, 극히 세속적인 얘기를 주로 예로 삼겠습니다.

 오늘 제 강연의 목적은 오늘날 우리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우리 주변의 얘기를 분석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누구나 할 것 없이 경험하고 있는 소위 악순환의 핵심은 어리석음에 있습니다. 어리석음은 잘못된 생각에서 비롯한 일종의 교만이 그 본질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들이 가지고 있고 경험하고 있는 어리석음에는 독특한 구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리석음의 집단적인 성격’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어리석음의 집단적인 성격, 사회적 성격, 역사적 성격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만 어리석음이 자기 개인에게서 비롯하지 않고 자기가 속해 있는 단체건 가정이건 마을이건 종교단체건 정치단체건 혹은 인종적이건 자기가 속하고 있는 어떤 단체, 그룹에 관련이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잘못된 생각을 저 혼자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한 집안 식구가 모두 다 가지고 있거나 또는 한 동네 사람이, 한 마을 사람이 모두다 함께 가지고 있으면 그 잘못된 생각이 마치 가장 올바른 생각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 앞에서 자기가 올바르다고 느끼고 따라서 그 어리석지 않은 사람을 오히려 어리석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교만에 빠져버립니다.

 사람이 이 지경에 이르면 즉, 사람의 어리석음이 집단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면 그 피해가 참 무섭습니다. 일본 군인들이 집단자살을 했습니다. 사이판이랄지, 오끼나와 남양열도에서 소위 ‘옥쇄’라는 이름으로 집단 자살을 했습니다.

 흔히들 군인들이 소위 하라끼, 세부꼬라는 일본말로 표현하는 집단 자살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가끔 신문을 통해서 어리석은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자살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오대양사건이라 하는 것을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미국에서는 ‘피플 스탬플’이라는 종교인들이 집단 자살을 했습니다. 이것도 어리석음의 집단적 성격입니다. 이러한 예는 너무 흉측스러워서 듣기만 해도 혹은 목격을 하면 치를 떨면서 골을 찌푸리는 것이 우리의 상정입니다만 사실 우리들 주변에서는 그런 일들이 매일매일 무수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현대적인 어리석음으로 이러한 집단적인 성격을 몇 가지만 들추어 보겠습니다. 첫째는 조금 전에 말씀드린 군벌들의 집단적 자살, 사이비 종교인들의 집단적인 자살. 이런 것이 전부 다 어리석음의 집단적 성격에서 비롯합니다. 그 다음에는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국가적, 혹은 민족적 어리석음입니다. 그 어리석음을 전 국민이 시행하고 있을 때, 그 어리석음은 정당화되고 비판하는 사람은 오히려 역적처럼 몰리고 오히려 규탄을 받습니다.

 소위 반체제 인사니 저항 인사니 하고 규탄을 받는 것은 그 비슷한 예라고 생각이 됩니다.

 요즘 신문에 보면 브라질에 있는 리오라는 도시에서 소위 유엔이 주도해서 지구회의, 지구정상회담, 지구환경회담이 열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 지구 환경회의의 중요한 의제중의 하나가 생물 다양성 협약이라는 것입니다. 생물은 그 다양성을 그대로 보존하자고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이 유일하게 거기에 서명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자기 나라의 국익을 위해서, (그가 말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만) 지구가 멸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는 싸인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냐 하면 국민들의 상당수가 적어도 투표행위를 통해서 볼 때, 자기가 그렇게 행동하기를 바라고 투표해주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양이 항상 문제입니다.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측에 자기가 붙어야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느냐, 12월 선거에 이길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기서 분명히 어리석음의 집단적인 성격이 여실히 노출되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아주 무서운 일입니다. 가지가지 생물이 다 함께 살 때 지구는 건강하고 지구가 건강할 때, 인간도 그 행복이 보장되는 것입니다.

 『화엄경』의 마지막 장인 「보현행원품」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어떠한 생물이건사람처럼 두 발 달린 생물이건 소나 말처럼 네 발 달린 짐승이건 거미나 지네처럼 많은 발을 달린 짐승이건 모든 동물을, 생물을 내 친부모처럼 부처님처럼 존중하고 받들라”고 이런 것이 보현행원의 사상입니다.

 이것은 제9 중생수순장에 분명히 또렷하게 밝혀져 있습니다. 이런 것이 불교의 보현행원사상의 근본적인 성격인데, 결국 이런 것이 유린되는 것이 무엇에서 기인하는가 하면 국가를 위해서는 민족을 위해서는 정의도 뭣도 없고 인류의 공헌이랄지 인류의 멸망이랄지 이런 것도 문제가 안 되고 오직 자국의 이해, 자기 민족의 이익, 이것만 추구한다고 하는 어리석은 견해에 기인합니다.

 그런데 그 어리석음이 집단적인 국가와 민족이라고 하는 성격 때문에 합리화되고 옳은 것처럼 여겨지고 그 반대하는 사람이 오히려 나쁜 사람으로 지탄을 받는단 말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 우리 불교인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 것인가. 불교사상을 공부한 사람들은, 화엄경 사상을 공부한 사람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 꾸준히 정진한다는 말은 결국 그런 데까지 미쳐져야 하지, 그런 것이 연결이 안 될 때 꾸준히 정진한다고 한다는 말에는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둘째로 인정적인 어리석음입니다. 벌써 ‘인정적’ 이렇게 말할 때에는 거기에 집단적 성격이 들어있습니다. 우리가 얼마전에 미국의 로스앤젤레스 흑인 폭동의 보도를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이 사건을 두고 흑인폭동이라고 얘기하고 마치 흑인만이 어리석은 양 얘기했습니다. 더군다나 우리 한국 사람들은 공격의 대상이 되어가지고 죽기도 하고 재산, 생명의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이 L.A흑인 폭동 사건을 잘 분석해 보면,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흑인이 그렇게 행동하도록 만든 미국의 배후에 백인들이 있습니다. 백인 우월 의식, 백인이 인종차별, 백인은 우월하고 흑인은 열등하다는 그러한 태도, 그러한 사고방식, 가치관 모든 백인에게 속속들이 박혀있는 이것이 흑인들로 하여금 갈 곳을 잃게 만들어버리고 결국 갈 곳 없고 해결책이 없는 그러한 상태가 인간을 그렇게 광폭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사실인지, 거짓인지 모르겠습니다만, 1960년대 중반에 미국에 이민법이 제정되었습니다. 그래서 전에는 그렇게 못들어오게 했던 동양사람들을 무더기로 이민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명절날만 되면 L.A에는 한국사람들이 한국촌을 이룰 만큼 몇 십만명으로 막 불어났습니다. 왜 그렇게 했느냐 저는 그 방면에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잘 모르겠습니다만 떠돌아다니는 얘기에는 이런 것이 있습니다. 미국의 장래를 걱정하는 인구전문가들이 미국의 미래를 점쳐봅니다. 미국 백인들은 애를 잘 낳지 않습니다. 흑인들은 열 명, 스무 명 낳는 흑인들이 많습니다. 얼마 안 가서 흑인의 인구는 백인의 인구를 쫓아올 것이다. 지금은 10퍼센트밖에 안 되는 데, 앞으로 이것이 비슷해지고 나중에는 증가할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면 우리는 큰일 난다. 방패막이가 필요하다. 동양 사람을 갖다 방패막이로 쓰자. 그래서 동양사람하고 흑인하고 싸움 붙여서 분노의 대상을 그쪽으로 흘려서 자기들은 뒤에서 싸움을 양쪽에 붙여가면서 좀 오래 살아보자. 이렇게 모두가 꾸며진, 정확하게 계산되어 꾸며진 하나의 각본이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만 확인되지 않은 얘기입니다. 이 말이 자꾸 퍼져가는 것은 사람이 어리석음을 가지고 있고 그 어리석음이 집단적인 성격이 있을 때, 능히 그런 짓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의 하나의 본질이라고 할까, 사람의 하나의 한계입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