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가문학에 나타난 불교사상 (二)

피안의 감성

2009-08-31     관리자
다음은 月明師와 함께 가장 수승한 향가 작가의 한 사람인 忠談師의 것을 들어 보자.
층담사는 역시 승려이며 國仙의 신분으로서 그의 탁월한 詩趣는 현대의 우리들만이 극찬할 정도가 아니고 당시의 景德王의 말을 빌려도 충분히 알수 있다.
즉 경덕왕이 三月 三月의 따뜻한 봄날 榮服僧을 구해서 만난 스님이 누더기 옷의 충담사였었는데 왕은 충담사에게서 기미가 이상한 신기로운 茶를 얻어 마시고 그의 향가를 극찬한 대목이 나온다.
( 내 일찍 들으니 師의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는 그뜻이 높고 높다 하는데 사실이 그러한가) 하며 왕은 충담사에게 다시 자기를 위하여 安民歌를 지어달라 부탁하는 것이다. 충담사가 지은 찬기파랑가가 그 격조 높음이 이미 왕가에 까지 널리 알려져 있음을 알수 있는 것이다.
열치고 나타난 달이
흰구름 쫓아 어디로 가는가.
새파란 냇물에 기바의 모습 잠겼에라.
逸鳥川 조약돌이
郞이 지닌 마음 가(際)를 쫓지만,
아, 잣나무 가지 높아
서리 모를 그대여.
구름은 지나가고 뚜렷이 나타난 달, 너는 필경 흰구름을 쫒아서 가는게 아닌가 하고 작자는 달과의 문답을 통하여 詩意의 목적을 달하고 있다.
절기는 높고 맑은 가을 하늘, 대보름의 둥근 달이 구름속에 쌓였다 나타 나면서 다시 떠오는 구름을 향하여 맑은 하늘을 비춰주고 있는 정서, 아마도 바람이 맑게 불고 있었던 모양 같다. 구름을 벗어난 달의 그 맑고 밝은 모양이 흡사 기바가 그리워 했던 淨土의 꿈과 이상을 그리워 동경해 찾아가는 것같은 것이다.
그러니 이 가요는 기바랑이라고 하는 불교의 신앙에 깊었던 한 젊은 화랑의 고귀한 인격과 이상을 표현함에 그에 대한 직접적인 아무런 서술도 없이 돌연 달과의 문답은 유로서 그의 높은 뜻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흰 구름을 쫓아 가는 것도 아니고 저 멀리 지상을 내려다 보니 샛파란 일조천 냇가에 耆郞의 모습이 있어 그 정이 어린 마음의 끝을 쫒아서 간다는 달의 대답, 오직 인간만이 아닌 저 창공의 달도 기랑의 인격과 이상을 쫓아 찾아 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충담이라는 한 노승이 기바랑의 뜻을 쫓고 존경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보다 저 달마저도 잣 나무가 높아서 기바랑의 마음의 경지를 알아 찾아볼 수 없다는 그 무궁의 경지 기바랑의 고매한 경지는 작가의 고매한 시상과 함께 훌륭히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더욱 여기에는 기바랑의 정토에의 동경과 귀의 영원한 피안에의 뜻을 분연히 나타내 주어서 충담사의 불교적 정신과 함께 하나의 입체화를 보여 주는 것 같다.
그러니 이 가요는 기바랑이라는 인격이 높고 고상한 한 젊은 화랑의 뜻을 찬양하면서 정토에의 귀의를 은연히 고취하고 있는 노래다.
작가는 은유와 상상으로써 기바의 뜻을 드러내며 높은 시격을 나타내고 있다. 이 讚耆婆郞歌가 경덕왕이 말한것처럼 (其意深高)로써 國評이 있는 노려였었다.
郞이 지닌 마음 가(際)는 곧 前際後際를 초월한 순결한 피안의 마음이기도 하다. 이 깨끗한 마음은 곧 정토의 마음으로서 당시 화랑들이 理想했던 이상 국토를 동경하는 마음이기도 한 것이다.
每 重三 重九日에 남산 三花嶺의 미륵세존님께 차를 닳여 공양하는 충담사의 정성, 이 미륵세존을 지극히 모시는 정성이 바로 미륵이 現身해 나와 차를 마신 것 같은 차의 맛의 신기롭고 특출한 정성을 보면 충담사의 이상 국토 건설을 위한 미륵불 신앙이 어떠했던가를 알 수 있고 이 사의 깊은 신앙속에서 기바랑의 덕을 찬양하는 훌륭한 시도 나왔으리라 생각한다.
이것이 다만 형식적인 가요나 시 형태뿐 아니라 훌륭한 정신이 잠겨져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王도 그를 공경하며 자기를 위하여 安民歌를 지어 달라 부탁하는 것이다.
이에 충담사는 혼연히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사랑스런 어미시라.
백성을 즐거운 나이로 여기시니
백성은 恩愛를 알리로다.
구물거리는 物生들
이 녹을 먹여 다스리니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갈손가.
나라를 지닐줄 알리로다.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할지면
나라는 태평하리다.
하고 安民歌를 불러 준 것이다.
임금과 신하가 부모와 같이 백성을 사랑하니 백성이 임금을 따르지 않을 리 없고 백성이 또 나라의 은애를 아니 나라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갈줄 모르는 것이다.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실로 훌륭한 철학이 아닐수 없다. 당시 仁王經 金光明經등을 위시한 호국 불교의 이념에 입각하여 불교의 국가관 통치관을 披歷한 내용이라 볼 수 있다.
이에 왕은 너무나 흐뭇하여 곧 왕사로 대하려 하였으나 충담사는 이를 한사코 거절하며 받지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충담사는 비록 초라한 衲衣를 입고 庶中에 있었지만 王師를 대하는데도 固辭不受한 청고한 정신으로 기바랑과 같은 고귀한 인격을 詩作함에 있어서 永世 不 朽의 名詩도 나오지 않았나 생각된다.
현재 향가중에는 화랑의 작이 六首가 있다. 융천사(融天師)의 혜성가(彗星歌), 월명사의 도솔가(兜率歌)와 제망매가(祭亡媒歌), 충담사의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와 安民歌, 그리고 득오곡(得烏谷)의 묘죽지랑가(慕竹旨郞歌)다. 이 중에도 승려이자 국선을 겸한 사람이 융천사 월명사, 충담사 세분이나 된다. 그런데 이들은 다 화랑을 소재하거나 정토사상을 중심하고 있다. 물론 당시 화랑이 이상이 현실의 지상 낙원을 목표한 미륵사상에 있었기 때문에 진자사의 경우같은 데서도 그 신앙이 연연히 드러 나고 있지만 이 향가에 있어서도 월명사의 도설가, 충담사의 찬기파랑가는 그 뚜렷한 예이다.
다음의 두 분 융천사와 득오곡는 다 화랑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전자는 사사무애의 화엄의 도리와 일념돈망(一念頓忘)의 禪의 경지를 드러내고 후자는 인생의 무상을 그리고 있다.
먼저 융천사의 혜성가로 보자
옛날 동햇 가의 건달바가 놀던 성을 바라보고
왜군이 왔다고 봉활를 들게 한
동햇가가 있도다.
세 화랑의 산에 놀러 옴을 듣고
달도 빨리 그 빛을 나타냄으로
길을 쓰는 별을 바라 보고 혜성이라
말한 사람이 있다.
아! 달이 아래에 떠 갔도다.
보아라 무슨 혜성이 있을 것인가.
이노래는 삼국유사 卷五의 융천사건에 나오는 것으로 진평왕때 삼화랑이 혜성이 나타난 것을 보고 풍악(금강산)에 놀러 가려는 것을 중단하였을 때 융천사가 이 노래를 지어 볼러 이를 없애고 그들을 놀러 보내게 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이 노래의 힘으로 동해를 처들어 오는 일본병도 물리쳤다는 자못 신비스러운 노래이기도 하다.
때에 일본병이 바다를 건너 쳐 들어오고 있음은 분명했다. 사람들은 놀래 아우성을 치고 있엇다. 때에 마침 혜성이 나타나 이 궤변을 암시해 주었다. 혜성이 나타남은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다. 불길한 증조임에는 틀림 없다. 이에 거열랑(居烈郞), 실처랑(實處郞). 보월랑(寶月郞)의 세 花郞은 풍악산에 놀러 가려던 것을 취소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는 곧 이 불길한 증조에 화랑들은 바로 전시자세에 임해야 될 형편이기도 했다.
그러나 항상 그들을 돕고 보좌하는 국선인 융천사는 이 궤변을 없애고 놀러 보내기 위하여 이 노래를 지은 것이다.
융천사는 분명히 왜병이 동해가를 쳐들어 오고 있었는데도 이 아우성의 형태를 왜병으로 보지 않고 천상의 약인 건달바가 내려와 노는 성으로 보았다. 또 그렇게 생각했다. 이곳은 곧 왜병이 웅성거리는 두려운 형태가 아니라 건달바가 노래하는 아름다운 웅성거림으로 돌렸던 것이다. 이것은 마치 미혹을 전도시켜 오리로 보려는 것과 똑 같다. 즉 두려움을 멸식시키고 안락으로 보려는 소재주(消災呪)와 같다.
또한 혜성이 나타난 것도 불길한 증조로 나타난 것이 아니고 세 화랑이 온다는 것을 듣고 이를 축하하는 길잡이 별로서 나타난 것이라고 읊은 것이다. 즉 세 화랑이 오는 길을 깨끗이 쓸기 위해서 나타난 慧星으로 害星을 바로 利星으러ㅗ 전도해서 바꾸어 논 경우이다.
여기서 혜성은 仁星으로 달이 먼저 길을 밝히기 위해 앞을 서 나타난 때문에 그 진실된 것을 몰랐지 실제는달 보다 훨씬 더 높은데 귀히 있어서 덕을 베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德星을 사람들이 공연히 잘 모르고 혜성이라고 한다며 이를 꾸짖고 그 덕을 찬양함으로 스스로 없어지게 한 경지인 것이다. 이것은 먼저의 월명사의 도솔가에서처럼 두 해로 변한 일괘를 오히려 찬양하며 이를 없앤 경우와 같이 작자의 법력에 의하여 그 덕을 부여해 줌으로써 스스로 이를 없애게 한 것이다.
그러나 이 헤성은 현실적으로 분명히 나타나 그 덕을 부여하고 찬양해 줌으로써 스스로 없어지게 했지만 다시 理的으로 볼때는 마음의 幻化로서 공연히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보아 혜성이니 일본병이니 하며 걱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본래가 청정하고 무애한 현상을 중생이 스스로 망견을 내어 현혹하고 고통을 받고 있다는 이치에로 귀결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 혜성가와 같은 것은 주력에 의한 단순한 신비적인 노래로만 넘겨 버릴 것이 아니라 그 내면과 환저에는 깊은 불교의 진리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아마 월명사나 융천사는 신라에서 진언 밀교계통의 고승이었을 것도 같지만 이들의 이러한 신비적인 힘은 단순한 주력을 넘어선 법력의 차원이 있는 것도 같다. 실로 차원있는 노래들이 아닐수 없다.
그리고 득오곡(得烏谷)의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는 효조왕시 죽지랑의 랑족였던 득오곡이 죽지랑이 죽은 뒤 그를 추앙하고 은모하여 지은 노래로써 단순한 인생의 무상을 그리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의 細述은 略하겠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