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바사라왕 일가의 호법

영산의 향풍 (3)

2009-08-31     관리자
1) 관무량수경과 위제희 부인
부처님께 귀의한 최초의 왕은 마갈타국의 빈바사라왕이다. 왕은 초기의 불법호법자로서 많은 일을 했다. 죽림정사의 건립이라든지 부처님의 교화에 많은 힘을 보탰다. 뿐만 아니라 정토삼부경으로 불리는 경중 관무량수경은 빈바사라왕의 왕후인 위제희부인의 신앙에 의해서 설해진 것이다. 아미타불의 명호를 일컬으고 신행을 행하여 중생에게 장애를 초월하고 마땅히 오는 세상에 정토에 태어난다고 하는 믿음은 거의 모든 불자의 가슴속에 젖어있을 것이다. 이러한 아미타신앙의 골격이 될 수 있는 경의 하나가 한 신자의 뜨거운 신앙을 기연해서 설하게 된 것이다. 이를 생각하면 이들 왕부처의 공덕은 만겁을 가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원래 부처님의 법은 있는 것이 아니다. 설법도 설법이 아니라고 경에 말씀하셨다. 그것은 이것이 법이다 저것이 법이다 하고 마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그러한 형상적이거나 생각으로 담겨질 수 있는 것을 사뭇 넘어선 큰 것이기 때문이다. 중생의 근기와 상황에 따라서 한량없는 법륜을 굴리게 된다. 이와같은 부처님의 법의 말씀을 나오게 하는 것은 부처님의 뜨거운 자비심에서 이지만 동시에 그 자비의 말씀이 흘러 나오게 한 기청자의 공덕을 잊을 수 없는 것이다.

2) 빈바사라왕과 그 인품
빈바사라왕은 부처님 당시의 북인도 마잘타국의 영주로서 왕사성이 그 수도였다. 인도의 역대제오왕중 부처님께서 가장 먼저 귀의 하였던 왕이다. 구마라습삼장이 번역한 구역에는 방사왕이라 했고 현장삼장의 신역에서는 빈바사라왕이라고 번역하였는데 영승(影勝)이라는 뜻이다. 신상이 잘 생긴 것을 뜻한다. 왕은 부처님보다 다섯 살이 적었으며 십오세에 왕위에 올라 십육세에 부처님께 귀의하였으니 부처님과의 다음 인연을 생각하면 퍽이나 신근이 있었던 왕임은 틀림없다. 부처님이 태자의 몸을 버리고 출가하여 아직 수도의 길에 올라서 사방으로 행각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날 태자는 마각타국 왕사성에서 바루를 들고 걸식했다. 이때에 왕은 높은 누각에 앉아 많은 신하들에게 들러싸여 있었다. (아마도 이것은 빈바사라왕이 사뭇 어렸을 때의 일로 보인다. 따라서 아직 왕이 아닐 듯) 왕은 부처님의 거룩하신 위의를 보고(아직 불은 아니였지만) 부처님께로 달려갔다. 그리고 말하였다.
“태자시여! 이곳에 머무시고 구도의 고된 길을 포기하십시오. 제가 나라를 반분하여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태자는 이를 거절하였다. 왕은 도 다시 “태자께서 왕이 되십시오. 이 나라 전체를 양도하고 저 자신은 신하가 되겠습니다.” 하였다. 왕은 부처님의 위의에 어지간히도 감복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태자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이를 거절하였다. “내가 전륜왕의 지위도 버리고 출가하였는데 어찌 변거의 자그마한 나라의 왕을 부러워하겠습니까? 이는 마치 바닷물을 본 다음 소 발자욱에 괸 물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때 왕은 태자의 뜻이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태자께서 성도하시거든 맨 먼저 저를 찾아 제도해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태자도 이를 승낙하였다. 우리는 이 대화에서 빈바사라왕의 순직한 마음과 부처님을 추앙하는 그 심정을 십분 이해할 수 있다. 동시에 수행당시의 부처님의 자세가 권력이나 명예나 재산이나, 이 세상에 있는 그 무엇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태산보다 무겁고 확고한 것임을 또한 엿보게 한다. 빈바사라왕이 어떠한 인물이었는가에 대하여 태자시절에 세웠던 육가지 서원으로써 충분히 이를 알 수 있다. 여섯가지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첫째,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이어 왕이 될 것.
둘째, 와이 되어 나라를 다스릴 때 부처님이 출세하실 것.
셋째, 나의 몸으로 부처님을 직접 침견할 수 있을 것.
넷째, 내가 부처님을 친견하고는 환희심을 발할 것.
다섯째, 이미 환희심을 발하고는 정법을 들을 수 있을 것.
여섯째, 법문을 듣고 깊히 이해할 것 등이다. 이와같이 서원을 세운 빈바사라왕은 과연 그 소원을 성취해서 영원히 빛나는 불법의 호지자가 되었다.

3) 죽림정사
부처님은 성도하신 후 빈바사라왕과의 약속을 생각하셨다. 그리하여 왕사성을 향하여 떠났다. 왕은 제자를 거느리고 오시는 부처님을 맞았다. 그때에 왕은 코끼리에서 내려 코끼리의 안장을 땅에 내려놓고 그 위에 부처님을 모셨다. 그리고 왕은 부처님께 아뢰는 것이다.
“세존이시여! 이곳은 마각타국에서 가장 좋은 곳입니다. 제자가 이곳에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를 모시기 위해 정사를 짓고자 합니다. 저의 뜻을 저버리지 마십시오.” 하고 정사를 지을 것을 간청하였다. 부처님은 그 청을 허락하였다. 왕은 크게 기뻐하고 곧 가란타 장자로부터 그 땅을 십만냥에 매입하고 그 땅에 많은 방사와 누각들을 건립하고 또 대중들이 목욕할 욕지를 만들었다. 이것이 죽림정사다. 많은 경전들이 이곳 왕사성 죽림정사에서 설해졌으며 오늘날 뿐만 아니라 영겁으로 천상천하의 태양이 될 큰 법음이 여기서부터 퍼져 나갔던 것이다. 죽림정사가 인도 최초의 사원이다. 왕사성의 부처님과 그 제자를 모시게된 빈바사라왕은 그 환희심을 어찌할 수 없었다. 있는 힘을 다하여 호법에 힘썼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날마다 세 번씩 부처님께 가서 예배드리고 또한 법문을 들었다. 연로한 후에는 노구를 이끌고 직접 갈수 없어서 부처님의 조발(손톱과 머리카락)을 얻어 궁중에 탑을 세우고 거기에 예배드리면서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 얼마나 뜨거운 신앙인가!

4) 아사세왕자의 발심
빈바사라왕은 늦도록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왕자 얻을 것을 걱정하던중 어떤 점복가가 말하기를 (비프라산에 있는 선인이 죽으면 완가에 기탁한다)하였다. 왕자를 기다리던 왕은 선인이 국기를 기다리지 않고 사람을 시켜 선인을 죽였다. 그후 얼마 아니하여 위제희부인은 잉태하였다.
왕자가 태어나자 당시의 습관대로 왕자르관상가에게 보였다. 말하기를 이 아기가 원한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귀하게 얻은 아들을 죽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원한을 품고있는 아들을 살릴수도 없었다. 고민한 나머지 높은 누각 위에서 덜어뜨리기로 하였다. 그렇지만 위데희부인은 누각밑에 솜이불을 쌓아놓고 그를 받아서 죽이지 않고 살려 키웠다. 이 왕자가 후의 아사세 왕이다. 극진한 부모의 사랑과 따뜻한 보호속에서 큰 아사세는 장성해서 제바달다와 사귀게 되면서 빗나가기 시작했다. 제바달다는 이사세에게 아버지를 죽여 신왕이 되고 자기는 부처님을 죽이고 신불이 되어 함께 나라르 다스리자고 하였다. 아사세는 꾀임에 빠져 그에 동조하여 부왕을 왕사성에 유폐시켰다. 그리고 아버지를 구명하고저 음식을 공급하던 어머니 위제희부인마저 유폐하였던 것이다. 이때의 감옥이 영축산 밑에 지금도 남아있다. 아들의 반역으로 유폐신세가 된 위제희 부인은 깊이 부처님을 생각하고 구원을 청했다. 부처님은 그를 알아보시고 곧 제자를 보내어 그를 위로하고 부처님이 신통력으로 친히 그 앞에 나타나 법을 설하였다. 위제희는 환희용약하여 부처님께 감사드리고 장차 새로 태어날 국토를 선택하기 위해서 부처님께 시방국토의 장엄한 모양을 간청하였다. 부처님은 위제희를 위해서 시방불국토의 장엄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위제희는 그중 극락세계가 가장 원만장엄국토로 생각하고 그곳에 태어나기를 원했다. 여기서 부처님은 위제희에게 그 나라에서 태어나기 위한 수행의 방법으로써 십육가지 관법을 말씀하시게 되었으니 이것이 관무량수경이다. 한편 제바달다는 부처님교단을 분열시키고자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자 이번에는 악심을 품고 부처님을 해치려하다가 마침내 지옥에 떨어지고 말았다. 아사세는 제바달다의 꾀임에 빠진 것을 뉘우쳤다. 악심을 품고 대역죄를 범했던 아사세는 온몸에 흉측한 부럼이 났다. 오늘의 나병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마음을 돌이켜 전비를 뉘우치고 깊이 깊이 참회하였다. 부처님을 믿고 불법을 호지할 것을 맹세하였다. 그는 모후의 지극한 돌봄을 입어 병을 퇴치했다. 그후 아사세는 왕위에 오르고 극진히 불법을 호지하였다. 부처님께서 입멸하신 후 부처님 가르침을 결집하는 제일차 결집의 큰불사도 아사세왕의 외호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5) 커다란 공덕
빈바사라왕과 위제희부인 그리고 왕자아사세의 일가에는 그 생애동안 풍파도 많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의 남긴 공도 또한 큰 것이 아닌가. 최초의 사원인 죽림정사- 이곳에서 부처님은 수많은 경전을 설하셨고, 또한 위제희 부인의 뜨거운 신앙은 오늘날의 관무량수경을 남기게 하였다. 아사세의 참희는 부처님 입멸후 그 가르침을 결집하는 대사업을 외호하였다. 그들의 생애가운데 있었던 풍파도 결코 헛된 것은 아니었다. 오늘날 우리들은 빈바사라왕 일가에 있었던 고난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면서 한편 그 비참한 고난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끼쳐준 커다란 공덕을 생각하며 함께 감사의 정을 금할 길 없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