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록화홍(柳 緣 花 紅)

수필

2009-08-31     관리자

만수천봉을 뒤덮은 진달래와 칭칭 늘어진 시냇가의 버들을 볼 때면 언제나 소동파의 선시 (유록화홍)이 생각난다. “ 버들은 푸르고 꽃은 붉다.” 이 선시는 再三再四 “如實知見”의 “不妄語戒) 임을 절감하게 한다. 소동파는 왜 하필이면 緣色과 赤(紅)色을 대응시켰을까. 혹 ”望春黃 주봉적) (개나리는 노랗고 진달래는 붉다) 이라고도 옲을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소동파의 혜안은 실상을 알리는데 있어서 결코 다른 색의 반응이 표준이 될 수 없기 때문에 홍녹색의 한쌍을 택한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우리의 시각현상에 있어서 소위 Hering설에 의하면 우리의 시신경은 세 개의 쌍으로 된 색시를 가능케 하는 감수성세포를 갖고 있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즉 적~백, 황~청의 작을 통하여 색감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침이 되면 새 날이 밝아오고 저녁이 되면 어두운 밤이 오는 낮(白)과 밤(黑)이 한쌍이 아니고 무엇인가. 흑백을 수용하는 감수성세포는 동화하면 흑색으로 보이고 異化하면 백색으로 보이는 것과 같이 赤緣을 수용하는 세포가 동화하면 연색으로 이화하면 적색으로 보인다는 원리에서 볼 때 적녹색은 분명히 한 쌍이라는 것을 알려준다.사람들 중에는 적색과 녹색을 색감하지 못하는 소위 색맹이 있다. 녹색을 색감하지 못한다고 한다.
심리학자들은 이것을 일컬어 적녹색맹현상이라 하는데 나는 문득 소동파가 일찍이 적녹색맹현상을 알고 (유록화홍)이라고 읊은 것이 아닌가 하고 연상해본다.
맹인이 명암을 시작하지 못하듯이 색맹은 적록색을 색감하지 못한다는 것을 견주어 볼 때 나도 색맹이 아닌가 하고 자신을 의심해본다. 그러나 또 한편 정사유하건대 내가 오히려 색맹이 아니기 때문에 적색과 녹색이 따로 따로 개별적으로 존재한다고 보는 분별지의 속물이 아닌가 하고 반성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차리리 완전히 색시가 가능한 정상인보다는 색맹이 낫고 색맹인보다는 맹인이 더 낫다고 말 할 수 있을련지도 모른다. 사실 저 유명한 대적사시(일리아드오디세이)를 쓴 (호메로스)가 맹인이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그리고 예언가들이나 점술가들 중에서 맹인일 경우에 오히려 예언의 그 적확도가 더 많다는 것을 참고할 때 맹인과 색맹현상에서 나는 보다 깊은 암시적 정보를 捕捉(포착)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물론 나는 색시의 분별지가 가능한 속물적 정상인가 전혀 시각작용이 불가능한 반부분별의 맹인과의 양자가 동시에 극복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감히 유록화홍의 선어와 적록색맹 현상을 비교해 보는 것이다.
유록화홍의 선어가 순수현존의 절대생명인 있는 진실 그대로 실상을 표한하는 것일진대 모름지기 주객이 통일된 無二智. 반야바라밀의 경지로 지향하는 결단과 실천만이 그것을 실감할 수 있으리라! 이렇게 생각하니 미망과 번뇌속에 1방황하고 있는 나는 그지없이 애처롭기만 하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세계는 정녕 슬프면서 아름답고 아름다우면서 슬픈 듯 하다. 버들, 진달래, 개나리, 목련이 환생의 봄잔치를 퐁요하게 베푸는가 하였더니 그 아름다운 인상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녀들은 자태를 감추고 산벚꽃과 철쭉이며 라이락 그리고 화초들의 새 얼굴들을 대하고 보니 계절은 무상하게 바뀌어 초여름에 접어들고 있다. 실로 자연의 변화와 생성은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하였듯이 소멸과 발생의 영원한 드라마요 유희인 듯하다. 그는 우주를 (영원히 움직이는 산 영상) 으로 보았고 시간의 미화 운동속에 원적 피환을 보았으며 불생 불멸의 영겁회귀를 투시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기에 니이체는 이 최고의 비극적 예술속에 모든 대립자가 화해된다고 외쳤다.
그러나 불타께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일체중생과 자기가 포함된 꿈속에서 무서운 갈애의 전쟁이 끝도 없이 계속되고 있는 질식할 듯한 고뇌의 꿈을 꾸면서 꿈인 줄을 모르는 인간들에게 일체가 평등화 되고 澄淨化(징정화)되는 (공)의 지혜와 자비를 가르치시어 영원한 구원의 길을 터주시었던 것이라고 회상해본다.
여기에 바로 나는 유록화홍의 각자실상이 현현됨을 정견해야 할 소이가 있다고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