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목소리] 불빛(佛光)을 向한 길목에서

▨ 푸른 목소리

2009-08-30     김의숙

  도대체 내 영혼을 지배하고 있는 이 부질없는 망상들은 어디서부터 연유하여 어디로 가는 것이냐?  끊임없이 나를 현혹시키는 의식(意識)의 흐름을 쫒다가 나와 내 이웃들은 늘상 지쳐버리고 만다.  무일심(無一心)의 계곡에서 방황하다가 밤을 만나고는 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말했지, 인간은 수많은 의식속에서 산다.  그러나 그중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의식은 ¼이면 충분하다고.  원(願)을 세워 일심(一心)을 찾을 일이다.  마지막 밤을 맞이하기 전에 서둘러 한마음을 찾을 일이다.

  부처님을 향한 지극한 신심(信心)에 불타던 한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그의 믿음의열망(熱望)에 따라 부처님 고행시(苦行時)에 사용하시던 발우(鉢)를 찾아 나섰다.  헤일 수 없는 고난과 배고픔을 인내하면서 멀고도 긴 여행을 계속하였지만 그의 소망은 이뤄지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불모(不毛)의 황무지 끝에서, 좌절의 목메임을 풀기위해 마지막 물방울이 남은 수통을 집어들었다.  그 때 형편없이 남루한 한 늙은이가 다가와 물을 청했다. 마지막 한 모금의 물, 그러나 그는 선뜻 내주었다.  그런데 물을 마시려던 노인은 갑자기 거룩한 부처님의 상호로 변모하시더니 「젊은이여, 내 발우를 찾지 말라.  그대가 목마른 노인에게 내준 이 물통, 이것이 내 발우이니라」하시며 모습을 감추시는 것이었다.

  우리의 믿음도 이 젊은이와 같은 유(類)의 것이나 아닌지? 진리는 항상 내 이웃에 있고, 그것의 원천은 내 마음에 있는것을......

「길모어 충살형(銃殺刑) 집행, 말썽의 사형수.....오늘새벽 0시6분」

  이것은 살인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이에 대한 사형집행을 요구하여 두번이나 옥중자살을 기도하던 끝에 그의 소원대로 총살된 사형수 마크 길모어(36세)에 대한 신문기사다.  자신만만해 뵈는 사진과 함께 실린 기사에서 특히 우리 불자들은 인간적인 아픔을 느끼리라.  불법은 그와 같은 처지의 인간에게 최상의 필요선(必要善)이며, 아울러 그의 독방은 최선의 선방(禪房)인 것을, 그는 알았어야 할 터였다.  전법(傳法)은 진즉 그에게 필요한 것이었는데........전법은 그런 사람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지.  돌이켜 노래하자.

  이 역시 심히 깊고 미묘한 법백천만겁에도 만나기 어려워라 내 이제 보고 듣고 받아지니리 부처님의 진실한 뜻 알아지이다.

「이모님, 고모님, 절에 갑시다.」「절에 그냥 갈 수 있나? 요 다음에 날 잡아서 가지.」불자된 이들은 이렇게 전도된 인식을 깨우치기에 열심이어야 한다.  어느, 날마다 전국의 사찰이란 사찰의 종이 함게 울려 퍼졌으면 싶다.  법당문은 활짝 열리고 스님의 법문에 귀기울이는 뭇 중생들의 가슴속에 저마다 빛나는 환희가 철철 넘쳐나게 할 수는 없는가?  그리하여 택일(擇日)해서 만이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할 수는 없을까?

「중생은 본시 부처님, 물과 얼음의 이치로 물을 떠난 얼음 없고, 중생 밖에 부처없느니.」

  플라톤은 세가지를 신(神)에게 감사한다고 했다.  첫째, 이 시대에 그리스에 태어난것, 둘째, 남자로 태어난 것, 그리고 소크라테스를 스승으로 모시게 된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주가 나에게 3가지의 감사한 걸을 말하라면 나는 분명히 이렇게 말하리라.

  첫째 인간으로 태어난것.  둘째로 불법을 만난 것.  세째로 선지식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佛光」형제와 함께 공부하는 것이라고.

(서라벌高 교사. 佛光會傳法委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