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토순례기] 미얀마 4 민궁 파고다

불국토순례기

2009-08-28     관리자

새벽에 일어나 안개 낀 이라와디 강변에 나아가 배를 빌려 타고 강물을 거슬러 민궁 파고다로 향한다. 한 시간 반의 뱃길, 강은 넓어 건너편 기슭이 아늑한데 어쩌다 스쳐가는 다른 배의 승객들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이방인에게 미소 띈 얼굴로 손을 흔든다.

 강바람의 시원함이 몸에 배어들자 여름철 원두막에 오른 듯, 뱃전 그늘에 깔아놓은 대나무 돗자리에 누워 통통배의 흔들림 속에 몸을 맡긴다. 달콤한 잠이 해변의 파도처럼 들락날락하는 사이 어느덧 민궁 파고다가 아스라이 물안개 속으로 피어오른다.

 오, 그 거대함이란!

 높이가 150m, 한 변의 길이가 72m인 파고다는 벽돌로 쌓아올린 탑으로는 세계에서 제일 높은 탑인데 그것도 미완성인 상태에서의 규모이다. 만약 보다파야왕이 1819년에 죽지 않고 이 탑을 완성하였더라면 그 높이가 20m 더 높아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강변에 세워진 탓인가. 뱃전에서 바라다보니 그 위용이 주위의 모든 경관을 압도한 채 묵묵히 서서, 오고가는 배들을 맞이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아까웁게도 이 탑은 1838년의 지진에 의하여 여러 갈래로 갈라지고 한쪽 귀퉁이가 무너져 내려서 그 본래 모습에 손상을 입었다.

 그 무너진 귀퉁이를 통하여 탑 위의 테라스에 올라서니 강변 풍경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강가를 따라 들어선 푸른 숲속은 불교양로원과 함께 파고다와 승원들이 연이어 자리했고, 강변 뒤쪽으로 펼쳐진 민둥산과 산자락에도 또한 헤일 수 없는 파고다가 곳곳에 앉아있다. 만달헤이 인근에만 40만 명의 스님이 계시다고 하니 덧붙일 설명이 필요 없겠다. 민궁에는 이 거대한 파고다와 걸맞는 또 하나의 유물이 있으니 바로 민궁 벨로 알려진 커다란 종이다. 1790년 보다파야왕에 의해서 주조된 이 종은 모스크바에 있는 종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 큰 종이다. 높이 7m, 직경 6m, 무게 89톤인 이 종도 1838년의 지진 때에 민궁 파고다가 무너지며 그 종루가 부서지자 강변까지 굴러내려온 것을 다시 지금의 자리에다 종루를 짓고 매달아 놓았다.

 그러나 큰 탑과 큰 종이 세계에 자랑할 만한 유물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좀 더 깊은 신심을 나타내기에는 큰 효용이 없는 것은 아닐까?

 작더라도 아름답고 신심을 우러나게 하는 석가탑과 다보탑, 그 한소리로 온 마음을 뒤흔드는 에밀레종에 오랫동안 물들어온 필자의 머리 속에서는 그 거대함에 대한 감탄 외에는 떠오르는 감상이 없다.

 오히려 그 거대함 때문에 짓눌려 고통받았을 백성들의 아픔-만리장성을 보고 느꼈던 아픔-이 가슴에 차오르는 것은 홀로 나선 여행길의 외로움 때문일까? 만달헤이 공항을 이륙한 파간행 비행기는 드넓은 평원과 강변에 자리잡은 수없는 파고다와 승원 위를 날아 30분만에 파간 공항에 착륙한다.

 파간은 미얀마의 고도로 우리나라 경주와 같이 불교유산이 끝없이 널려있는 곳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1044년에 이 지역은 아노예타(Anawratha)왕이 다스리는 왕국이었다. 같은 해에 미얀마 남부 타톤지역의 왕인 마누하(Manuha)는 아노예타왕에게 한 스님을 보내주었고 이 스님은 왕에게 소승불교를 가르쳐 주었다. 이 당시 이 지역은 힌두교와 애니미즘이 믿어지고 있었으나 왕은 이 스님의 가르침에 감복하여 불교를 받아 들이기로 결심하고 불경과 중요한 유물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마누하왕이 이 요청을 거절하자 1057년 아노예타는 군대를 동원하여 타톤을 정복하고 32장경을 포함하여 옮겨 왔다. 이후 200년동안 아노예타의 뒤를 이은 왕들-간지타, 아라웅시투, 나라파티시투 등-이 미래의 부처님인 미륵불이 이 세상에 나신다면 틀림없이 이 파간에서 출현하실 것이라는 굳센 믿음으로 쉬지 않고 사원건축물을 세움에 따라 이 넓은 평원은 무려 2,217개에 이르는 파고다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몽고의 쿠비라이 칸이 파간 왕국을 위협하게 되자 많은 사원들이 오히려 요새를 세워야 한다는 구실로 부숴지기 시작하면서 점차 멸망의 길로 들어섰다.

 아마도 1287년에 쿠비라이 칸이 이 나라를 정복하였을 때에는 이미 이 파간 왕국은 버려진 도시가 되어 몽고병들이 무혈입성하였을 것이라고 믿어지고 있다.

 사실 이렇게 스스로의 국민들에 의해 버려진 도시가 된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처음 아노예타왕이 소승불교를 받아들였을 때의 이 지역은 숲도 많고 비도 많고 땅도 비옥해서 미우 풍요로운 곳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밀림들이 파고다를 세우기 위하여 불태워지고, 집을 짓고 벽돌을 굽기 위하여 잘리우리 시작하자 차츰차츰 모든 숲이 자취를 감추었다. 인구는 이미 200만 명이나 되었는 데 나라에서는 나라대로, 개인은 개인대로 수많은 탑을 계속 세우니 나라 살림은 저절로 기울어지기 시작하고, 밀림이 자취를 감추자 기후도 변하여 충분한 비가 오지 않게 되니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었다.

 지금도 이 파간 지역은 미얀마에서 가장 건조한 지대여서 일 년중 3개월동안만 약간의 비가 내리는데 이 때를 놓치면 농사를 짓지 못하기 때문에 이제는 몹시 낙후한 벽촌이 되었다. 따라서 인근의 인구를 모두 합하여도 2만, 스님은 50명뿐인 현재의 모습으로 변해왔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러한 기후변화가 유물보호에는 아주 좋은 조건이 되어서 파고다 내게 그려진 벽화들이 적어도 700년 이상은 된 작품들인데도 이제 방금 화공이 붓질을 끝낸 듯 선명하게 남아있게도 되었으니 이런 것을 역사의 아이러니라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