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의 상징물들(1)

내가본 불교미술

2009-08-26     관리자
불상에 관한 이야기는 비상(非像)으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석가모니의 전생의 기적적인 사건들을 훌륭하게 돌에 새겼던 장인들은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따라 무의상태에 있는 존재라는 개념을 인간이 형상으로 표현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초기 조각작품에서 부처님이 계신 곳은 상징물들에 의해서 의미가 부여된 빈 공간이다. 이 상징물들은 가장 높은 진리 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으며 또 여래(如來)라는 진리와 동일시되는 불성(佛性)을 더 잘 표현한다.
뒤에 가서 첫 번째 불상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어떤 작품들은 진짜불상으로 판명되기도 했지만 부처님을 인간의 형태로 표현하는 것이 하나 의 관례가 된 것은 서기 100년 경이고, 그 이전에는 비형상적인 상징물을 가지고 부처님을 대신 표현했다. 이러한 태도는 그 당시의 사상과 관례에 일치하는 것인데 초기 불교신자들은 석가모니 시대로부터 서기 100년 사이에는 그들의 종교의 중심적인 인물들을 인간의 형상으로 표현하고자 하지 않았다. 기원전 3세기부터 후 1세기 사이에 형성된 석가모니불의 생애와 본생담에 나오는 이야기를 그린 조각작품에서도 부차적인 인물들은 인간의 형상으로 묘사하나 부처님은 아직도 상징물로 표현하고 있다. 부처님을 인간의 형상으로 표현하기를 꺼려한 것은 우상 만들기를 금하는 법 때문이 아니라 열반이라는 철학적인 교리를 시각적인 인간의 형상으로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상징물의 전기적(傳記的)사용
석가모니불의 득도와 열반 이전의 생애를 설명하는 초기 조각 작품에 있어서도 석가모니불은 그 당시에는 세속인으로 통했을 터인데 인간의 형상으로 표현되어 있지 않다. 석가모니불이 열반이라는 초월적인상태에 도달하기 전 35년간에는 그가 보통 사람으로 표현되었으리라고 생각할 수있다. 그런데 불성(佛性)의 개념이 벌써 상당히 발전해서 석가모니를 스승이나 공동체의 창시자로 보지 않고 뒤에 대승불교라고 불리우는 교리에 의해서 초인간적이고 초현실적인 불성의 표현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아쇼카 왕 시대(기원전 3세기) 에도 이미 석가모니불은 6대(代)에 걸친 전생이 있었고 그때에도 그는 인간의 형상으로 표현되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결국 석가모니불도 다른 붓다들과 동일한 성격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그를 우리들의 덧없는 생활에 관계가 있는 사람으로 표현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았던 것 같다. 석가모니불의 전생인 보살도 본생담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세속적인 구현으로 나타나 어떤 때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사슴으로, 또는 지혜 자비심으로 충만한 인간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보살은 인간의 형상으로 표현할 수 있으나 이 세상에 나타나 완전한 존재로 열반에 든 여래(如來)는 안간의 형상으로 표현할 수 없었다. 이승에서의 최후의 단계에 있어서도 부처님은 무시무종하고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불성을 현세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단지 상징물에 의해서만 부처님의 몸을 불러낼 수 있다. 이런 상징을 비현시적 상(非顯示的像)이라 부른다.
초기 기념물에 사용된 상징물들은 스투파의 난간이나 정문을 장식하는데 사용되었는데 이들은 주로 석가모니불의 생애와 종교에 관련된 전기(傳記)와 전설에 관계가 있는 것들이다. 이 상징물들은 본생담의 그림 중에서 초점을 이루는데 어떤 작품들은 생명감이 넘치고 아주 매력적인 우아함으로 단장되어 있다. 예를 들면 장래의 부처인 보살이 횐코끼리의 탈을 쓰고 어머니이 뱃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은 아주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그 다음 장면인 어머니의 옆구리에서 출생하는 장면은 대단히 상징적이다. 마야왕비는 풍요의 여신인 락슈미로 대치되었고. 아기부처는 생략되었다.
두 마리의 코끼리가 양쪽에서 충성의 표시로 그녀에게 불을 뿌리고 있다. 이렇게 부처의 탄생장면은다산과 생명의 상징물로 표현되었다. 여기에 여신과 코끼리와 때로는 연꽃물병이 첨가될 때도 있다. 그 다음 장면에서는 아주 다른 상징물들이 사용되고 있다. 부처님의 첫목욕 장면에서는 아기 부처의 존재를 우사노가 나무에 매달려 있는 파리채 (이것들은 존경의 상징이다) 로 암사한 반면에 그 다음의 첫 일곱 발자국은 일곱 개의 작은 족적(足跡)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부처님의 존재를 보이는 데 가장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상징물들이다. 부처님의 생애 중에서 많은 일화들 가운데 장차의 부처님이 명상을 하는 장면에는 텅빈 왕좌(금강좌)만이 표현되어 있다. 이 왕좌에는 싯달타 왕자가 앉아 있는 것이다. 그가 집을 나가는 장면에는 말 한 마리만 있고 보이지 않는 말탄 사람을 보이기 위해서 하늘에서 우산을 받쳐 들고 있다. 네 사람의 신들이 말의 발굽을 받쳐 들고 있는데 이것은 밤중에 가출을 하는 사람이 자는 사람들을 깨우지 않으려는 배려에서이다. 석가모니는 숲속에서 터번을 벗어 버리고 삭발을 하는데 신들이 와서 이것을 33천(天)으로 가져 가 지금도 부처님의 첫 유물로서 경배를 받고 있다.
석가모니불의 생애의 절정을 이루는 보리수 아래서의 득도는 보리수로 표현되어 있고 여기에 빈 왕좌(금강좌)가 그 밑에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움직일 수 없는 우주의 중심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왕좌 앞에 부처님 족적이 그려져 있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부처님이 거기에 계시다는 징후이다. 거기에는 가끔 두 개의 법륜(法輪)이 있는데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이 우주의 왕이시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보리수, 왕좌, 족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습에 사자와 같은 여러 가지 상징적인 동물들로 장식된 이곳이 득도의 장소를 의미한다. 이 나무가 부처님을 암시한다는 명문이 남아 있으며 부처님 자신도 그 나무를 ‘나의 영원한 집’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