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풍을 마주한 보살- 일연(一然)

삼국유사 이야기

2009-08-26     관리자
고려(高麗)고종 19년(1232). 팔공산 부인사(符仁寺)에 모셔져 있던 대장경관과 황룡사 구층탑(皇龍寺九層塔)이 불타버렸다. 민족의 자존과 긍지가 일시에 무너지고 만 것이다. 몽골군의 말발굽 아래 여지없이 짓밟힌 고려인 처지를 시사하는 사건이다. 일연(一然.1206~1289)스님이 살며 마주한 역사. 그곳은 “세상이 불타고 있다!”고 하신 부처님의 질타가 내리꽂히는 현장이었다. 말 그대로 내우외환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해 주는 그날의 상황이다. 어떤 전쟁을 막론하고 그 뒤 끝이 아름답다는 말을 일찍이 듣지 못했다. 약육강식의 법칙이 난무하는 것이 전쟁이다. 적군과 아군이라는 분류는 군사적인 나눔에 불과하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힘없는 민초(民草)들, 오직 살아야 한다는 당위만이 남은 너와 나, 하지만 막상 싸움을 일으킨 당사자나. 피침(被侵)의 원인을 제공한 당사자들은 사뭇 다른 입장을 취한다.

얼결에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민초들로부터 저만치 비켜서 있다. 예전에는 구중궁궐 속에서 호령을 하였고, 요즘은 지하 벙커 안에서 컴퓨터 화면을 지켜보며 지시하는 것이 다를 뿐이다. 예를 들어 미사일이 난무하는 광경이 전 세계에 생중계된 걸프전을 상기해보면 된다. 그들의 자리는 언제나 생사(生死)가 교차하는 현장을 떠나 있다. 그래서인가? 오죽하면 이런 전쟁 방지의 대담한 가설이 제시되기도 한다. 싸움이 가장 치열한 제 1선에는 교전 당사국의 최고지도자들을 배치한다. 제2선에는 국회의장을, 다음에는 장관들을, 또 다음에는 사회단체장들의 순으로 전선을 구축하도록 한다. 물론 가장 후방에는연 약한 아녀자나 노약자들로 대표되는 일반 국민들이 위치하고… 밖에서는 끊임없이 전쟁의 열풍이 불어온다. 그런데도 문신(文臣)들이 정권을 휘두르고 있을 때는 음습한 간교만이 날뛴다.
반면에 이를 척결하겠다고 등장한 무신정권(武臣政權)은 주위를 낭자한 피로 물들일 따름이다. 의적의 침략이라는 국가적인 위기상황에서도 그들의 행태에는 전혀 변화가 없다. 대토지(大土地)의 사유화와 권력(權力)의 유지를 위해서는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는다. 놀랍게도 스스로를 지도층이라고 자처하는 이 두 부류 모두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민초들에 대한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오로지 자신들의 소유욕과 지배욕을 만족시키기 위한 소모품에 불과한 존재였던 것이다. 당연히 민생은 뒷전으로 돌려진다.
그들의 신음소리는 역사의 필연인 양 짓밟히면서… 일연은 생각한다. 이게 아니다. 적어도 우리 민족의 시작은 이렇지 않았다. 아무리 강한 외적과 싸울 때라도 이렇게 나약한 겁쟁이는 않았다. 다구나 국가적인 위기를 빌미로 해서 힘없는 사람들을 짓밟는 사람들은 진정한 지도자일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계 또한 말이 없다. 조작된 현실을 바탕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기 급급하다. 정치가 이렇게 민초들을 철저히 외면 한다면 그들이 하소연할 곳이라고는 단 한 군데 밖에 남지 않는다. 바로 종교의 세계다.
세상의 어떤 절대자도. 이름 없는 사람도 생로병사의 철칙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승려(僧侶)인 일연은 가만히 돌이켜 본다. 불교계의 집단이기주의와 교권주의(敎權主義)의 폐해는 극에 달하고 있다. 정책적인 대안으로 고쳐질 성질의 것이라면 차라리 쉽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게 만만치가 않다. 원인을 찾아야 한다. 이 땅에는 지금 엄청난 위력의 업풍(業風)이 몰아치고 있다. 감히 저항하기에는 너무나 힘겹기만 하다. 치열한 생존의 싸움이 전개되고 있는 이 곳이다. 우리 나름의 사정이 있고 문제가 있다. 인과법(因果法)이 어찌 한낱 구호에 그치겠는가? 그렇다 이 땅의 인과를 벗어나는 것은 이 땅에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제가 그러하였듯이 내일도 그러하리라. 이 땅은 좋든 싫든 엄연한 우리의 삶터이다. 공허한 이상론을 되 뇌이고 있을 새가 없다. 막연히 문제가 있다고 지적해 보아야 아무런 뜻도 없다. 이 땅에 사는 일연이라는 구체적인 생명의 삶이 문제가 있다. 고 해야 한다 생각해 보자. 과연 세상살이에서 삶의 방관자가 실제로 존재할 수 있겠는가? 없다. 그렇다면 해결의 시점은 확실하다. 일연이 살고 있는 지금이다. 보살(菩薩)은 분노한다. 흔한 감정적인 발출로서의 분노는 중생의 몫이다.
어떤 경우라도 생명이 위축된다면 이미 생명의 법칙을 어기고 있는 것이다. 생명을 생명답게 살리려는 생명의 복원력을 제공해야 한다. “보리(菩리)는 중생의 것”이다. 보살은 처음부터 내가 한다거나 무엇을 위하여라는 방향성을 갖지 않는다. 오직 생명만이 있을 따름이다. 드디어 활검(活劍)을 치켜든다. 붓을 뽑는다. 지배와 피지배의 대립구도를 설정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승자와 패자의 어느 한쪽을 편들기 위함이 아니다. 무차별(無差別)이다.
생명의 절대평등성을 드러내면 그만이다. 업풍의 눈이 되어 왜곡된 역사의 쓰레기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간다. 사람들은 자신이 실제로 처한 현실과 자신이 느끼는 현실감 사이에서 상반된 두 가지의 태도를 갖는다. 하나의 태도는 참된 자기와 마주하여 희망과 비젼을 품는다. 다른 하나의 태도는 자기모멸에서 오는 냉소와 두려움의 연속이 그것이다. 따라서 썩은 가지를 잘라내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그것은 일시적이다. 생명을 살리는 것은 보다 근본적이어야 한다. 효과가 즉시에 드러나지 않아도 그만이다. 아니라면 내일의 생명을 도모할 수가 없다. 그래서 삶의 흔적인 우리 역사의 잊어버린 영역으로 추적해 들어간다. 이 땅에서 살아온 생명들에게는 뿌리가 있다. 바로 단군할아버지다. 우리 모두는 그분으로부터 시작된 한 생명이다. 시대마다 사람의 개성 따라 옷을 입는다는 행위의 본래적인 의미가 다른 것은 아닐 것이다.
마찬가지로 태어난 집안이 다르고 지역이 다르다 해도 비롯됨은 같다는 말이다. 일연의 뿌리의식은 오늘도 다를 바 없다. 불법(佛法)은 만고의 진리다. 하지만 부처님 진리의 보편성이 일단 이 땅의 사람들에게 포착된 순간, 그것은 이 땅의 옷을 걸쳤다. 이 땅의 인심이 되고 말이 되어 온갖 표현으로 나투었다. 인도와 다르고 중국과 다른 우리의 불교가 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마침내 일연이라는 한 생명은 자신의 생명가치를 증명하고 만다. 더불어 이 땅의 생명을 생명답게 하는 창조적인 작업이 된다. 이를 일러 우리는 삼국유사(三國遺事)라고 부르지 않는가? 따라서 삼국유사를 본다는 행위는 단순한 기억의 상기가 아니다. 다시 그 삶의 현장에 있는 것과 같다. 우리는 인생을 변화{變化)하면서 보냈고 계속 변화시킬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