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나라 순례기] 王舍成의 法音

▨부처님 나라 순례기

2009-08-26     김구산

[1]부다가야의 보리수

  베나레스에서 역시 같은 기차를 타고 6시간쯤 가서 가야에 내렸다.  가야 역시 힌두의 순례자들이 찾아드는 성지(成地)여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이곳 역(驛)구내에서는 거지들이 시체를 앞에 놓아두고 구걸하는 장면을 보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10페이사(약6원)짜리 동전을 그 시체앞에 던지고 지나가는것을 불 수 있었다.

  그간 나도 인도에서 시체를 하도 많이 보아와서 별로 충격없이 10페이사짜리 동전 한개를 던지고 출찰구를 바쪄나왔다.

  가야에서 뻐스로 약2시간 가량 남쪽으로 가면 불교도에게는 가장 성스러운 불타 성도(成道)의 고장이 아듬하게 자리잡고 있다.  이곳일 바로 부다가야이다.

 고다마 싯달타가 앉아 계셨던 그자리에 성불의 기념탑이 장엄하게 속아 있고 그 옆으로는 늙은 보리수가 증인처럼 남아서 성스러운 흔적을 보살피고 있었다.

  나는 이곳 대각회(大覺會) 지부에 방을 정하고 목욕을 한 다음 이 거룩한 성소(成所)에 참배하러 갔다.  정성껏 삼보(三寶)에 예배하고 완성자(完成者)의 미소를 우러러 보았다.

얼마 후에 밖으로 나와탑을 돌아보면서 보리수 앞에 이르자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이 그 무성한 잎사귀의 그늘 속으로 빨려들었다.  불타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나무였다.  그러나 불타 성도 당시의 보리수는 아니고 원래의 보리수에서 가지를 가져다가 스리랑카에 심었던 나무로 부터 다시 그 가지를 가져와 심었던 것이니까 원래의 보리수에게는 손주뻘 되는 나무였다.  원래의 나무는 다른 불교의 유적들과 마찬가지로 모슬렘 교도들의 만행으로 불타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곳 성소를 여전히 거룩하게 장엄해 주고 있었다.

  이곳 그늘에서 나는 잠시 명상에 잠겨 아침의 탱양에 밝게 빛나는 천지를 바라보면서 불타가 맞이하셨을 최초의 아침을 상상해 보았다.  수척한 얼굴에 반야(般惹)의 혜안(慧眼)을 뜨시고 온갖 집착으로 부터 해탈을 얻어 환희심(歡喜心)과 자비심(慈悲心)으로 당신의 몸을 일으키고 아침의 햇빛 속으로 걸어 나오셨으리라.  저 성자(成者)의 거룩한 일보(一步)가 태양을 한층 신선하게 했을 것이고 온갖 중생에게 희망을 제시했을 것이다.

[2]왕사성 산정의 다보탑

  탑을 중심으로 하여 저 멀리 일본 사찰이며, 티벳 사찰이며, 태국사찰등이 자기 아름다움과 위용을 자랑하며 고요히 명상에 잠겨 있는 듯 세워져 있었따.  그 근처에 티벳인이 경영하는 천막식당이 있었는데 프랑스인 일본인, 화란인, 독일인, 그리고 미국인등이 모두 여행자들의 복장을 하고서 어떤 사람들은 식사를 하고 어떤 사람들은 뜨거운 엽차를 마시고 있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조용히 명상을 하듯이 앉아 있었는데 아무도 서로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숙연했을 뿐만 아니라 분위기가 끼쳐주는 막연한 감격으로 말미암아 딱딱한 판자의자가 폰근하고 그윽하기조차했다.  나는 이곳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 왕사성(王舍成  Rajagiri)행 뻐스를 탔다.

  약 4시간 가량 북쪽으로 달려서 오후 3시경 왕사성에 도착했다.  사방이 그다지 높지 않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인가도 별로 많지 않아 우리나라의 한적한 시골의 여름 풍경과도 같았다.  나는 먼저 일본인 사찰인 묘법사(妙法寺)에 들어가 숙소를 구했다.  이곳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얼마있지 않다가 금방 어두어지기 시작했다.  몸을 씻은 다음 저녁예불에 참석하고 식사를 제공 받았다.  몇조각의 자빠티에 달(팥죽모양의 노란빛반찬)과 소금뿐이었다. 그러나이곳은 숙식이 누구에게나 무료로 제공되며 그대신 각자가 사용한 그릇을설겆이하고 사찰 경내의 청소를 해야했다.

  다음날 아침 조랑말이 이끄는 통가를 타고 영축산 다보탑에 이르는 산길 입구에 내렸다.  다보탑까지는 케이블카를 나고 산상에 올랐다.  세존께서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설하신 곳으로 널리 알려진 이곳 왕사성의 산정에 우뚝 솟은 다보탑은 이도 특유의 돔(dom) 첨탑(尖塔)이 높이 솟은 모습으로 구세(求世)의 이상을 뚜렷이 나타내고있었다.

[3]나란다 대학의 엣 유적

  오후 三시쯤 산에서 내려와 이곳의 북쪽에 버스로 약 三0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나란다(Nalanda)에서 그날밤을 묵기로 했다.  무작정 인도 최고 (最古)의 대학이었던 나란다 대학의 옛터를 찾아갔다.  건물은 모슬렘교도들에 의해서 불타 온데간데 없이 페어화되어 있었으나 가히 그대학의 규모를 알아볼 숙 있는 웅장한 초석과 건물의 기반형태가 남아 있어서 나의 감회를 숙연하게 해주었다.  형해와(形骸化)된 이 어머어머한 학문의 전당앞에 서자 나 자신의 존재가 한량없이 작은 티끌처럼 느껴졌다.  나는 혜허의 한복판에 우뚝 서서 한순간 시간의 관념을 잊어버리고 선각자(先覺者)들과 영교(靈交)를 뱆고 있는 듯한 구도자(求道者)의 행복을 맛보았다.  낙조(落照)의 붉은 빛속에 나의 흥분을 감추고 이곳을 나오자 하루바삐 고국에 있는 교직으로 돌아가 나의 임무를 성스럽게 하고 싶었다.

  구(舊)나란다 대학으로부터 약3마일가량 떨어진 곳에 새로 세워진 나란다 불교대학 기숙사에서 유학하고 있는 방글라데시 승려의 호의로 하루밤을 묵고 이곳 캠퍼스며 도서관을 구경했는데 많은 외국 승려들이 유학하고 있었다.  이곳은 아직돌 인도에서 불교 교육의 중심지로 그 이름을 떨치고 있는 것이다.  아침부터 일찍 서둘러 옛날 나란다 대학의 유물이며 미술품들이 보존되어 있는 박물관을 들렸는데 어디를 가나 불교 미술픔은 파편으로 상처를 입고 있는 것이 가슴아팠다.

  이곳 박물관으로 부터 약 1마일 떨어진 곳에 웅장하게 보이는 중국풍(風)의 건물이 들 가운데 솟아 이었는데 그것은 바로 6세기에 당(唐)나라에서 유학와 이곳 나란다 대학에서 공부한 적이 있었던 현장법사(玄奬法師)의 기념관이었다.  그러나 험한 논길을 따라 땀을 뻘뻘 흘리며 어렵사리 찾아 ㄱㅆ더니 이 어찌된 일인가? 아무것도 없는 텅텅빈 집이었다.  어쩌면 이 후학(後學)에게 공적(空寂)의 진리를 여실히 보이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