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쉬운 불교] 불성(佛性)

▧ 알기쉬운 불교 ▧

2009-08-25     관리자

[1] 佛의 종자

  앞서 말한 바 청정한 본심이라 하는 것은 이것을 불성(佛性)이라고도 한다.  불성은 곧 부처의 종자다.

  여기서 비유를 들어 불성의 내력을 말해보자. 

  화경을 들어 햇빛에 대하고 그 아래 적당한 거리에 쑥을 대고 있을 때 쑥은 연기를 내고 마침내 훨훨 타게 된다.  이럴 때 불은 어디에서 왔을까?  태양과 환경과는 사뭇 몇만리를 떨어져 있는지 모른다.  그러니 태양이 화경과 맞붙었다고 할 수 없지만 태양의 불기운이 화경을 연(緣)으로 하여서 쑥잎사귀위에 나타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또한 설사 태양이 있더라도 쑥에 불타는 성질이 없다면 쑥이 불에 타지 않을것이다.

  불(佛)을 낳게 하는 근본인 불성이라는 쑥에 부처님의 지혜의 거울(화경)을 대면 佛의 불기운은 불성을 여는 믿음의 불이 되어 사람들의 쑥대 위에 타오르게 된다.  부처님은 그 지혜의 거울을 잡고서 온 세계를 비추므로 세상은 믿음의 불이 타오륵 되는것이다.

[2] 망상은 없는 것이다

  중생들을 각자가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깨달음의 불성을 알지 못하여 불성을 어기고 번뇌의 티끌에 사로잡혀 세간상의 좋고 나쁜 형상에 끄달리고 결박되고 마으마을 빼앗기므로 자유스런 본래경지를 잃고 부자유한 고뇌 속을 헤매고 있는 것이다.  어찌하여 중생들이 각자가 본래부터 깨달음의 성품인 마음을 갖고 있으면서 그와 같이 허망한 번뇌에 끄달려 불성의 밝은 빛을 가리고 어두운 미혹의 거리를 방황하게 되는 것일까?

  옛날 어떤 사람이 마냥 자기 얼굴 잘생긴 것만자랑스럽게 생각하여 거울만 들여다보고 있기를 좋아하다가 어쩌다 제 얼굴을 거울에 비춰보니 얼굴도 머리도 나타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놀란 그는 「나는 머리가 없으니 귀신아 아니냐?」하고 미쳐 거리로 뛰어나온 적이 있었다.  그것은 그의 머리나 얼굴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거울울 뒤집어보면서 비추이지 않는다고 없는 줄 알았으니 원래로 그에게는 머리도 얼굴도 완전한 채로 거기 함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깨달음에는 미혹이라는 것은 없는 것인데도 끝없는 긴 세월동안 바깥경계에 끄달려서 망상을 그리고 망상으로 말미암아 미혹의 세계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망상을 쉬면 깨달음은 저절로 거기 있는 것이고 깨달음 밖에 망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3] 옷깃에 숨겨진 보배구슬

  이 불성은 다함이 없는 것이다.  설사 중생이 축생으로 태어나거나 아귀로 내어나서 괴로워하거나 지옥에 떨어져서 고통받더라도 이 불성은 끊이는 것이 아니다.  더러운 몸이거나 탁한 번뇌속이라도 불성의 빛은 거기 있는 것이다.

  옛날 어떤 사람이 아주 가난했었다.  마침 친구를 만나 그의 집에 가서 좋은 음식을 대접받고 피곤하여 그 자리에 잠들었다.  그때에 주인인 벗은 급한 일이 있어 여행길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주인은 잠들어 있는 가난한 벗의 장래를 생각하여 값비싼 보배구슬을 그의 옷깃 안에 깊이 간직해 주었다.  그런 줄도 모르는 가난한사람은 잠에서 깨어 그 집을 나와 여러 지방을 떠돌아다녔다.  구걸이나 품팔이를 하면서 근근히 삶을 꾸려갔다.  그후 이 두사람든 다시 만났다.  거지행식을 하고 있는 벗을 본 부자 친구 말하기를 「여보시요, 당신 옷깃 속에 바로 보배 구슬이 있소.  왜 그것을 쓰지 않소? 평생을 쓰고 남을거요」하고 일러 주었다.

  이와 같이 불성의 보배구슬은 미록 탐심내고 성내는 번뇌의 옷 속에 감추어져 있지마는 그렇다고 결코 더렵혀져 있지는 않은 것이다. 

[4] 불성은 닦아야 한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지혜는 어떤 사람이든 모두가 갖추어져 있는 것이므로 부처님은 이것을 보고 「기이하다.  기이하다.  일체중생이 모두 부처의 지혜공덕을 갖추고 있구나.」하고 찬탄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어리석은 생각에 뒤덮여 생강이 잘못되었으므로 자기에게 갖추어진 불성을 보지 못하므로 부처님은 그들을 가르쳐 망상을 여의게 하여 본래로 부처와 다름이 없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부처님은 이미 이루신 佛이시며 사람들은 장차 이룰 佛로써 본질에 있어 다른 바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장차 이를 佛이요 佛이 된 것은 아니므로 마땅히 도를 이루고자 생각한다면 여기에 잘못 앎이 있어선 아니된다.  불성은 있지만 나타나지 아니하면 도를 이룬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힘써 닦아야 한다.

[5] 불성은 영원하다

  옛날에 한 임금이 있었따.  많은 소경들을 모아 놓고 그들에게 꼬끼를 만지게 하고나서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는가를 각각 말하게 하였다.  그랬더니 코끼리 어금니를 만진 사람은 「코끼리는 길쭉한 무우와 같이 생겼다」고 말하였고, 귀를 만진 사람은 「코끼리는 키(箕)와 같이 생겼다」고 하였다.  발은 만진 사람은 「코끼리는 절구통과 같이 생겼다」고 말하였고 배를 만진 사람은 「코끼리를 바람벽(壁)과 같이 생겼다」고 하였고 꽁지를 만진 사람은 「코끼리는 새끼줄과 같이 생겼다」고 하였다.  그중에서 한사람도 코끼리를 제대로 말한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이 세상을 보는 것이 또한 그러하고 사람이 사라마들 보고 말하는 것이 또한 그러하고사람이 법이 어떠하다고 말하는 것이 또한 그러하다.  사람이나 세상의 일부분을 접촉할 수는 있어도 그의 본질을 사무쳐 보고 불성을 바로 알아 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불성은 이것이 변하는 것이 아니다.  때묻고 더러워지는 것이 아니다.  없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죽음에 의해서 잃는 것이 아니고 번뇌 속에 있어서도 더러워지지 아니한다.  중생이 되어서 주는 것도 없고 성불하거나 성인이 되었다고  더 많아지는 것도 아니다.

  참으로 영원히 변함없는 불성을 발견하는 것은 부처님과 부처님의 법에 의지하지 아니하고는 결코 이룰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