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과 보현행원(2) ㅡ여래의 공덕을 칭찬한다ㅡ

직장인의 불교신앙

2009-08-24     관리자

 우리들이 보는 세계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살게 될 때, 특히 직장같은데서는 사람들끼리 서로서로 상대방을 평가하며 지낸다. 이 때에 우리는 사람들을 그 겉모양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그래서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훌륭한 사람과 못난 사람, 유능한 사람과 무능한 사람 등으로 차별하면서 평가한다. 겉모양과 겉으로 나타나는 행동등을 기준으로 해서 사람들을 볼 때 이 세상에는 천차만별의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한 것이다.

 그 많은 사람들과의 인간관계가 곧 사회생활인 것이다. 그 많은 사람들의 하는 행동, 말하는 내용 그리고 능력이나 성격이 나에게 잘 맞게, 내 이익에 부합되게 나타날 때에는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고 규정하면서 서로 가깝게 친숙하게 지내지만, 반대로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그 사람을 좋지 못한 사람이라고 규정하고서 다투거나 헐뜯고 사귀기를 꺼려하면서 지내는 것이다.

 사회생활은 그 자체가 이미 이해 대립의 싸움판인 것이다. 이해 대립인 이상 어느 한 사람도 참다운 의미의 내 편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이 혼자서 살아 갈 수 없기 때문에 여럿이 모여 살게 마련인데, 이렇게 해서 형성되는 집단이 곧 이익공동사회(利益公同社會)라고 하는 것이다.

 이익공동사회는 여럿이 한데 뭉쳐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공동의 이익이 보장되는 범위에서만 한 집단으로 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익의 문제에서 다툼이 벌어지면 순식간에 동지(同志)가 적(敵)으로 바뀐다. 그래서 어느 누구하고도 마음을 터놓고 살 수가 없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적으로 변신하였다는 소위 동지도 애초부터 동지가 아니라 적이었던 것이다. 「적」이면서 「동지」인양 함께 웃고, 만나서 일하다가 그 정체(正體)가 드러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것이 우리 인생의 참 모습이라면 우리 인생은 얼마나 삭막한 것일까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실제로 이러한 삭막한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한숨 지으며 살고 있고 두려움과 외로움 속에서 살다 마침내 목숨을 거두고 마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보신 세계

 우리들의 눈에는 분명히 이 세상이 삭막하기 이를데 없는 다툼의 현장으로 보이는 이 세계를 부처님께서는 이와 정반대로 보시는 것이다.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에서는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계시다.

 선남자여, 또한 부처님을 찬탄한다는 것은 진법계 허공계 시방 삼세 일체 세계에 있는 극미진(極微塵)의 그 낱낱 미진 속마다 일체 세계 극미진수 부처님이 계시고, 그 낱낱 부처님 계신 곳마다 한량없는 보살들이 둘러 계심에, 내 마땅히 깊고 깊은 수승한 이해와 분명한 지견으로 각각 변재천녀(辯才天女)의 혀보다 나은 미묘한 혀를 내며, 낱낱 혀마다 한량없는 음성을 내며, 낱낱 음성마다 한량없는 온갖 말을 내어서 일체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을 찬탄하여 미래세가 다하도록 계속하고 끊이지 아니하여 끝없는 법계에 두루 하는 것이니라.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는 온통 한량없는 부처님들께서 꽉 차 계시다는 것이다. 부처님들께서 빈틈없이 꽉 차 계신다. 어디에 그 부처님 말고 별도로 나쁜 놈이 있을 수 있겠는가?

 시방 삼세(十方三世)라고 하셨으니까, 전체의 시간(삼세는 과거· 현재· 미래)과 전체의 공간(시방은 동서남북과 그 간방과 상방과 하방)을 다 통털어 말씀하시는 것인데 그것이 모두 부처님들만이 계신 세계라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나쁜 놈들의 세계가 아니라 거룩하신 어른 곧 부처님들의 세계라는 것이다, 이 거룩하신 어른들의 세계에 우리가 살고 있으니 우리는 얼마나 다행스러운 사람들인가? 이 법문에 접하면서 우리는 우선 자기 자신을 축복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결코 저주 받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 세상이 그렇게 나쁜 놈들로 꽉 차 있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죄인(罪人)들여 모여 사는 버림받은 세상이 아니며, 할퀴고 빼앗는 원수들의 집단이 아니라는 것이니, 이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 이렇게 부처님들만이 우리의 앞과 뒤에 그리고 곁에, 저 먼 곳에 꽉 차 계시다니 이보다 다행스러울 수가 어디 있단 말인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축복하여야 한다. 우리는 모두가 무상의 영광 속에 살고 있는 무량복(無量福 )의 주인공들인 것이다.

 착각 속에 중생이 있다

 이 법문에서 우리는 우리 모두가 지극히 축복받은 사람임을 알게 된다. 그러면서 다시 또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서 우리의 큰 잘못을 알게 되는 것이다. 법문에서는 이 세상 구석구석이 모두 부처님들로 꽉 차 계시다고 말씀하시는데도 우리 눈에는 여전히 적(敵)과 악인(惡人)이 가득찬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어째서 부처님들이 꽉 차 계시다는 이 세계에 적과 악인이 나타났을까? 이 적과 악인의 정체는 무엇일까? 우리는 당혹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은 둘 중의 하나인 것이 분명하다. 부처님께서 잘 못 보셨거나 아니면 우리가 잘 못 보고 있거나 이 둘 중의 하나인 것이다.

 부처님은 일체지자(一切智者) 이신데 어찌 그분에게 잘못 보심이 있을 수 있겠는가? 진실한 모든 것을 남김없이 보고 계시고 다 아시는 분이 바로 부처님이시다. 그리고 온 우주에 두루하여 있는 진리 그 자체가 이미 당신의 인격 위에 구현(具現)되어 있는 분이 부처님이신데 그분에게 어찌 착오가 있을 수 있는가? 부처님은 본래 완벽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보시고, 그 분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모든 진실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에게 귀의(歸依)하는 것이다.

 한편, 우리 중생은 무명(無明)으로 살고 있다. 무명이란 밝지 못한 상태를 이름이니 우리가 보는 바는 세상의 진실상(眞實相)을 남김없이 드러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밝지 못한 눈으로 보는 세상이므로 있는 것이 없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없는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뿐이다. 그러므로 어두운 중생의 눈으로 보는 세상이 진실 세계일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러니까 밝으신 눈으로 보신 세계가 참으로 있는 세계이고, 밝지 못한 눈에 보이는 세계는 참으로 있는 세계가 아니다.

 적과 악인은 어두움 속에 나타난 환상(幻像)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내 이웃, 나와 함께 지내는 사람들을 적이나 악인이라고 보았던 것은 한갖 착각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착각 속에서만 적과 악인이 나타나 보일 뿐인 것이다.

 진실을 나타내는 방법

 우리들에게 이상(理想)이 있다면, 그것은 영원한 평화의 세계를 건설하여 서로가 다투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생래적(生來的)으로 타고난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며 기쁘게 살아가는 세계의 건설일 것이다. 이것을 우리 불교에선 불국토건설(佛國土建設)이라고 말한다. 이상낙원(理想樂園)의 건설이라고 하여도 좋다.

 그러면 이러한 불국토의 건설은 어떠한 방법으로 가능할 것인가? 악인의 무리들을 모두 지옥(地獄)으로 내쫓아 버리고, 선인(善人)들끼리 모여 살면 될 것인가? 또는 모든 적대세력(敵對勢力)을 쳐부수어서 강제로 항복하게 함으로써 내편 일색의 세계를 만들어야 할 것인가? 결코 그럴 수 없다. 그러한 노력은 결국 또 하나의 다툼을 자아내게 할 뿐이다.

 그런데 여기에 지극히 고마운 소식이 있으니, 그것은 이 세상은 본래부터 불국토로 있어 왔다고 하는 소식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새삼스럽게 불국토를 따로 건설하려 하지 않더라도 이미 이 세상에는 한량없는 부처님들께서 꽉 차 계시다는 것이다. 불국토를 새로이 건설할 필요가 없고, 이미 있어 온 그 불국토의 무한선(無限善)을 드러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무한선은 부처님의 눈에는 이미 나타나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중생들의 눈에 나타나 보이지 않고 있을 뿐이다.

 그 중생이란 누구인가? 다름 아닌 밝지 못한 「나」인 것이다. 다른 사람 아닌 내가 밝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밝아질 때 불국토는 건설된다는 것이다.

 내가 밝아지는 방법을 이 법문에서는 「칭찬」이라고 가르치신다. 겉모양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의 「참 생명」을 부처님으로 보고, 그 부처님의 공덕을 칭찬하는 것이다. 칭찬은 곧 적극적인 인정이다. 칭찬은 무한선의 적극적 인정인 동시에 악과 적의 절대부정(絶對否定)이다.

 원래 없는 적과 악을 절대로 부정하면서, 본래 있는 「부처님 공덕」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칭찬이다. 그러므로 칭찬은 무한가치(無限價値)를 창조하게 된다. 내 주변의 모든 사람의 참 생명인 부처님 생명을 남김없이 드러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칭찬은 나의 인격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바뀔 때, 내가 칭찬하는 사람으로 바뀔 때, 이 세상은 그대로 부처님 세계로 바뀌는 것이다.

 우리 불자들은 남들이 바뀌기를 기대하기 전에 내가 바뀌자. 남의 단점을 보고 남을 헐뜯던 나를, 남을 칭찬하는 나로 바꾸도록 정진하자.

 내가 바뀔 때 직장이 바뀌고, 내가 바뀔 때 가정이 바뀐다. 칭찬하는 나를 창조해 가자. 칭찬으로 밝은 직장 · 가정을 만들며, 칭찬으로 나와 내 이웃 사람들의 능력이 발휘되도록 하자.  <계속>

-------------------
김 경 만    · 1930년 충북 음성 출생. 
                · 고려대 상대 졸. 
                · 불광법회 원각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