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도끼

에세이· 동불(東佛) 서불(西佛)

2009-08-24     관리자

 언제부터인지 통 남의 말과 글에 귀 기울이지 않는 풍조들이 만연되어 간다. 어지간히 속고만 살았던 서글픈 과거들이 야속하다. 하긴 나도 그 불신하는 쪽이 아니라고 자신있게 말하기는 어렵다. 신문이나 라디오에서 「담배값 절대 인상안함」하면 용케도 꼭 올렸던 기억이 난다. 담배값은 또 밤에만 기습인상 한다. 0시를 기준으로 얼마 오른다는 밤 10시 뉴스를 듣고는 부리나케 구멍가게로 뛰어간다. 뉴스를 듣지 못한 늙은 주인은 왜 이렇게 담배가 잘 팔리는지 한 시간쯤 지나서야 알게 되리라. 몇 십원씩 이득을 보려는 치사한 이기심은 이렇게 가게주인을 울리는 것이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 보면 이 불신의 벽을 무너뜨리는 힘은 결국 각자의 신뢰를 회복하는 길 뿐이라는 평범한 상식선에 도달한다. 올리지 않겠다면 올리지 말아야 한다. 일단 공적(公的)으로 천명된 사실은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지켜야 한다. 그때 반신반의하던 사람들은 당국을 믿게 되고 따르게 된다.

 어디 불신이 늘어나는 풍조가 우리 사회에서만 국한된 현상인가. 종단도 마찬가지이다. 신용이 없다. 조령모개(朝令暮改) 투성이다. 윗사람만 바뀌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한마디의 익스큐즈도 없다. 언젠가는 전법사(傳法師)를 모집한다고 공고도 내었고, 심사도 했었다. 백명이 넘는 선지식(善知識)들이 조계사 법당에서 법회까지 보았었다.

 그런데 용두사미이다. 계획에 일관성이 없고, 추진에 지속성이 없다보니 무사안일이 안 될 도리가 없다. 용케 지금의 화살만 피하면 되기 때문이다. 종단의 불화를 걱정하는 이들이 많다. 한국불교의 현주소를 개탄하는 이들도 많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일은 땅에 떨어진 신의를 회복하는 일이라고 본다.

 원래 사람보다 룰(Rule)에 의존하는 것이 조직사회의 힘이다. 백년대계를 세웠으면 추진해야 할 일이요, 비록 다소간의 시행착오가 있다고 하더라도 밀고 나가야 한다. 그래서 불교의 흩어진 힘을 모으고, 잠재력을 일구어야 한다. 만약 종단의 간부들이 자리 지키기에 연연하고, 재직시의 치적(治績) 만들기에 급급하다면 불교의 발전은 요원하다.

 얼마나 지쳤으면 총무원 무용론까지 나왔겠는가. 그것을 뼈아프게 새길 수 있는 풍토가 아쉽다. 아무리 시대가 변천해가도 변할 수 없는 약속은 있다. 어떤 명분으로도 무너뜨릴 수 없는 불교인들의 성역(聖域)은 있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불교발전」이다. 방법론이 다른 것은 조정할 수 있다. 이해관계가 상충되는 것은 양보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각자가 하는 일이 「불교발전」에 어떠한 도움이 되는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케네디는 대통령 취임연설에서 미국의 새로운 개척정신을 강조하면서 뜻깊은 식사(式辭)를 했었다. 조국이 나에게 베풀어준 것을 생각하기에 앞서 내가 조국에게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자고. 우리는 지금 이 말을 불교와 연관시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할 때이다.

 요사이 동국대학교에 불교종합병원을 세운다고 안팎이 떠들썩하다. 관념적으로 생각해 보면 1천만 불자가 1천원씩 내면 백억이 된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재원(財源)이 모일까 의구심이 든다. 왜냐하면 속기만 해 온 불자들이 외면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불교병원 설립은 우리의 숙원이었다.

 부처님 계신 병원에서 진료받고, 입원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신나는 일이다. 불교학생반 합창단은 조석으로 찬불가를 부를 것이다. 간호원들의 가슴에는 열십자대신 卍자의 마크가 선명하리라.

 홍콩에는 12층짜리 불교병원이 있다. 진료비 · 입원비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싸다. 그래서 병원 적자가 매달 우리 돈으로 2억원씩 난다고 한다. 그 적자를 불교 연합회가 메꾸어 주고 있다. 종파를 초월해서 승속(僧俗)을 떠나서 그들은 자비행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도 불교종합병원 건립에 여러 가지 아이디어가 있을 수 있다. 몇몇 독지가들의 신심에 찬 보시를 기대할 수도 있겠고, 값싼 외국차관을 도입하는 것도 방편일 수 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모든 불자가 동참하는 분위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십시일반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내가 벽돌 한 장을 쌓고, 병원 바닥 타일 한 장을 깐다는 원력(願力)이 있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그것은 불교인의 것이 된다.

 부처님은 언젠가 암라파알리라는 기녀(妓女)를 교화하셨다. 그녀는 아름다운 자태 때문에 이웃나라끼리 전쟁을 도발할 정도로 미인이었다. 바이샤알리(Vaisal) 사람들은 그녀의 집을 연회장으로 만들어 그녀와 함께 하며 기쁨을 나누었다. 그녀가 불교에 귀의한 다음, 부처님과 그 제자들을 자기의 집으로 초대한 적이 있다. 그녀는 일일이 제자들게 공양을 올리면서 기쁨에 벅차 부처님게 말씀드린다.

『저는 오늘보다 더 보람찬 날이 없습니다. 제 기쁨은 어디서 오는 것일가요? 』

 부처님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암라파알리여! 사람에게는 두 가지의 기쁨이 있느니라. 하나는 얻는 기쁨이며, 두 번째는 주는 기쁨이니라. 오늘 그대는 주는 기쁨의 맛을 느꼈느니라.』

 얻는 기쁨은 물론 성취욕까지를 포함한다. 그러나 그 기쁨은 늘 불안을 동반한다. 왜냐하면 뺏기지 않으려 하고 더 많이 가지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는 기쁨은 그 자체로서 한량없는 연민을 동반한다. 주는 기쁨을 얻는 일,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병원건립에 동참하는 마음씨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이란 참 간사한 동물이어서 늘 나와 사물을 연관시켜 생각한다. 아니 나에게 그 일이 어떤 이익이 있는가를 먼저 사량(思量)한다. 그래서 불리하다고 판단하면 가차 없이 인연을 끊어 버린다. 그는 욕망의 노예가 되어 끝없는 탐욕심에 시달린다. 그러나 때에 따라 훌훌 털어버리고 싶은 때도 있는 법이다.

 그런데 대체로 이 달관의 마음보다는 전자의 경우에 시달리곤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였던가. 한 마리의 제비가 온다고 해서 봄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은 요컨대 선행(善行)의 반복이다. 아무리 나쁜 이도 한 평생 한 두번 착한 일은 한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 경우 몇 번의 선행을 했다고 해서 선인연(善人然)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불교운동 이란 무엇일까. 나는 결코 「가지자」는 운동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버리자」는 운동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버릴 때 진실로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질 때 얻는 기쁨은 일시적이지만 버릴 때의 환희는 잔물결처럼 오랫동안 여운을 남기기 때문이다.

 아무리 우리 시대가 「가지기」 경쟁으로 미쳐 버렸지만, 불교만은 제 자리를 지켜야 한다. 그것은 또한 불교가 가진 가장 바람직한 역사의식이며, 현대적 의의이기도 하다.

 이 시대를 호흡하면서 이 시대를 리드해 가려면 우리는 착실히 시대를 역행해 갈 필요도 있는 것이다. 현대화라고 해서 선방(禪房)을 레저 시설 쪽으로 활용해서는 안 된다. 대웅전 앞까지 자가용이 들어 간다고 해서 더 많은 신도가 모이고, 불교가 현대화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오히려 우리 것을 고집할 때 이 시대를 계도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아무리 오늘의 불교현실이 암담해 보여도 자꾸 긍정적으로 그것을 평가하고 싶다. 왜냐하면 시대가 변해도 우리의 불교적 이상은 퇴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익중생(利益衆生) · 자성성불(自性成佛)의 좌표는 언제 어느 때나 우리 불교의 앞날을 밝혀오던 이상적 등불이었다.

 이름 없는 산승(山僧)들이 우리의 산하를 지키고 있고, 불교를 사모하는 그 말없는 대중들이 거리를 오가고 있다. 그들은 내가 이렇게 위대하다고 내세우지 않지만, 우리 불교의 튼튼한 기반이다. 나는 그들을 믿고 싶은 것이다. 말 잘하는 앵무새에 지쳤고, 힘 있는 이들의 오만함에 진저리가 나지만, 그래도 불교는 그들만의 전유물은 아니기 때문이다.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힐지라도 다시 한 번 그 침묵하는 불교인들을 믿고 싶다. 그들의 가슴 속에 살아 숨쉬는 부처님의 음성이 우리의 주변에 맴돌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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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 炳 朝   · 경북 영주출생 
               · 동국대 인도철학과 및 동대학원 철학과 졸. 
               · 인도 네루대학교 교환교수 역임. 
               · 현재 동국대 문과대 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