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과 보현행원(4)-널리 공양한다-

* 직장인과 불교신앙

2009-08-24     관리자

종교생활을 한다는 것

대체로 종교를 신봉하면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어느 의미에서 보면 주어진 은혜에 감사하면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은혜는 특수한 경우에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느 때 어느 경우에건 이미 주어져 있다고 보는 것이 신앙인의 심안(心眼)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이미 무한한 은혜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의심 없이 인정하여야 한다. 여기서 자연적으로 나타나는 정서가 곧「감사하는 마음」이다. 감사하는 마음에는「구하는 생각」이 깃들 여지가 없다. 밖으로부터 무엇인가를 구할 생각을 가지게 된다고 하는 것은, 자기에게 은혜가 부족하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구하는 생각은 자기에게 은혜가 더 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탐심(貪心)이며, 상대방이 당연히 주어야 할 것을 주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기에 진심(嗔心)이며 사리분별 없이 긁어 모으려 하기 때문에 치심(癡心)인 것이다. 이러한 삼독(三毒)에 멍들어 사는 것이 구하는 생각에 사로 잡혀사는 것이기 때문에 그에게 마련되는 세계는 지옥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 불자들은 결코 이러한 지옥에서 헤매서는 안 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널리 공양하라」는 법문을 주시는 것이다. 공양하는 것은「주는 마음」을 뜻한다. 주는 마음은 이미 자기에게 있는 은혜에 감사하면서 은혜에 보답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주는 마음 곧 공양은 세상을「밝음〈光明〉」그대로의 세계로 드러내놓게 되는 것이다. 공양은 곧 감사인 것이다.

위에서 본 것처럼 공양은 은혜에 대한 보답이기 때문에 크게 공양 올리는 사람은 은혜를 크게 인정하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인정한다는 것은 현실화(現實化)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은혜가 현실적으로 드러난다. 흔히들 은혜로운 환경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고 할 때 짜증내고 싸우면 더 좋은 환경이 찾아오게 될 줄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실제는 정반대인 것이다. 짜증낸다는 것은 은혜의 부정(否定)이며, 부정은 거부(拒否)로 통하게 되므로 좋은 환경은 점점 더 멀어져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려운 환경에 당면하게 될 때에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감사하는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이러한 수행이 곧 공양이다.


부처님께 공양드리다

공양은 은혜의 인정이므로 먼저 자기가 인정할 수 있는 것을 찾아서 감사드린다. 먼저 부모님의 은혜를 생각한다.

내 생명의 은인이시며 양육의 은인이신 부모님께 감사드리며 공양한다. 혹은 물질적인 것을 가져다 드림으로써 감사하고 마음속으로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킴으로서 감사한다.

부모님의 은혜에 대하여 부처님께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표현을 쓰시면서 우리들은 보은(報恩)하도록 가르치고 계신다. 우리는 부모님의 은혜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그것을 당연한 것인 양 생각하게 될 때, 그것은 어느덧 부족한 것인 것처럼 느껴지게 된다. 이래서 부모님께 감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서는 부모님께 거슬리고 불효를 저지른다. 부모님의 은혜를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 어찌 여타의 은혜에 감사할 수 있겠는가? 모두가 마땅치 않고 욕구 불만으로 여기지는 것은 당연한 결론이다.

그래서 그의 생활은 온통 어두움으로 싸이게 된다. 인생을 불행하게 살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행복을 도로 찾는 길은 무엇이겠는가? 부모님께 감사 공양하는 것이다. 부모님께 감사 공양올리고 있으면, 어느덧 모르는 사이에 그의 환경이 밝은 곳으로 바뀌게 된다. 왜냐하면, 그의 심안(心眼)이 은혜에 눈 떳기 때문에, 비록 부모님의 은혜에만 눈뜬 것이었을지 모르지만, 그 은혜를 보는 눈은 바로 환경의 은혜까지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환경이 바뀐다.

사실은 환경이 바뀌었다기보다는, 이미 있는 은혜를 보지 못하고 지냈었기 때문에 환경은 거칠은 것으로 알았었다가, 이제 은혜를 볼 수 있게 되니까 환경이 은혜로운 모습을 드러낸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행복한 인생의 주인이 된다.

부모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공양드리는 것은 바로 생명의 뿌리에 감사한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우리 모두의 참 생명의 뿌리는 바로 부처님이시다. 온 우주에 두루하여 있는 여래의 법신 생명이야말로 우리 모두의 진실 생명의 뿌리이다. 어느 누구도 이 생명의 뿌리 밖에 별도의 생명을 살고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생명의 뿌리인 부모님께 감사 공양하는 일은 부처님께 감사 공양하는 일로 통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부처님께 감사 공양을 드린다.

우리의 참 생명의 뿌리이신 부처님께 우리가 무엇을 아낄 것이 있겠는가? 우리의 목숨까지도 바친다. 그러니 재물이나 명예나 기타 온갖 것 어느 것을 아껴서 공양드리지 않을 것이 없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 세상 어느 것이 부처님 은혜의 소산 아닌 것이 있는가? 그러므로 모든 것의 참 주인은 부처님이시다. 부처님께 공양드린다는 것은 주인에게 되돌려 드린다는 말과 같다. 그러므로 부처님께 감사 공양드릴 때의 마음가짐은, 부처님께서 자비로 공양을 거두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일 뿐이다. 공양 올리면서 무슨 조건을 내세운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이다.

그러나 흔히들 보게 되면 정성을 기울여 부처님께 공양 올리고는 크게 생색을 내려고 한다. 「어느 곳에 사는 누가 이제 공양을 올리니 이 공양을 받으시고 복을 내려주십시요」하는 식이다. 이것은 부처님과의 거래(去來)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당신께서 공양을 받으셨으니 그 댓가로 나에게 복을 주시요」하는 것이니까, 어디까지나 장삿속이지 참 공양이랄 수 없다. 참 공양은 감사인 것을 위해서 우리는 살펴서 알았다. 그러므로 감사가 아니라 댓가의 요구라면, 그것은 공양이라고 이를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저에게 복을 주시오」하는 것은「은혜가 부족하니 이것을 보충시켜 주십시요」하는 말이 되니까 여기에서 탐. 진. 치의 삼독이 들끓게 되는데, 어찌 부처님 모시는 일이 성립될 수 있겠는가 ? 참 공양은 감사임을 잊어선 안된다. 그러므로 공양의 댓가를 바래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러한 감사는 곧 은혜의 인정이므로 진실한 공양을 바라는 마음 없이 부처님께 올렸을 때, 그 복은 실로 무한대(無限大)로 나타날 것이다.


여러 가지의 공양거리

우리는 물론 마음으로 감사하며 공양하지만, 그 마음의 표시는 반드시 밖으로 그 모습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의 표시로 물건을 올린다. 물론 물건을 올릴 때에 생색을 내서 안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마치 한 불기 공양 올리면서「시장하신 우리 부처님께 공양 올렸으니까 포식하셨을 것이고 나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나셨을 것이니 복을 주시겠지」하는 생각이라면 부처님을 얼마나 모욕하고 있는 것이겠는가?

부처님은「무량복(無量福)」이신데 우리가 어찌 감히 무엇을 보태드릴 수 있는가? 우리는 이미 부처님의 무량복 속에 은혜를 입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부처님으로부터 공급되고 있는 것인 줄 알지 못하고, 반대로 우리 쪽에서 부처님께 보태드리는 줄 생각한다면 착각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부처님은 무량복(無量福) 이신데, 우리가 조그만 등불 하나 켜드려서 그분을 밝게 해드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같은 착각이다.

우리의 등불 공양은 바로 부처님 광명의 찬탄이며 공경이며 감사인 것이다. 무한촉광(無限燭光)의 광명이신 부처님을 우리는 등불 공양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찬탄하는 것이다. 여기에 무슨 조건이나 댓가의 요구가 있을 수 있는가? 찬탄의 방법과 수단이 미급한 것을 오히려 부끄러워해야 할 노릇이다. 이러한 공양은 곧 부처님의 광명의 은혜에 감사드리는 일이므로 그의 삶의 환경은 저절로 밝아진다. 밝아질 것을 요구했기 때문에 밝아진 것이 아니라, 감사 공양으로 밝음을 인정하였기 때문에 그 환경이 밝아진 것이다.

이와 같이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일은 무한공덕을 지녔다. 내 생명의 무한 가치를 드러내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귀중하게 생각되는 물건을 정성 다해 공양 올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