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寺의 향기] 호국의 얼이 숨쉬는 도량 청도 운문사

古寺의 향기

2009-08-20     관리자
▲ 청도 운문사

 

 1 운문사가 있는 곳
 한국 불교 비구니 교육의 커다란 원류인 운문사(雲門寺)는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동(일명:호거산)에 있다. 청도읍에서 동쪽으로 약 40km거리에 있는 이 사찰은 신라가 한창 통일의 기초를 다지던 진흥왕 18년(557년)에 어느 신승에 의해서 창건되었다 하니 1,400여년의 역사를 지닌 셈이다.

 운문사 가는 교통편은 청도읍 보다는 대구 남부 시외버스터미날에서 1일 10여회 차편이 있다. 소요 시간은 2시간 정도. 

 

 

 2 사찰의 창건 연기

 운문사가 자리한 주변 산세를 살펴 보면 앞쪽에 구룡산, 사룡산이 있고 동으로는 문복산(文福山 : 1,013m), 옆으로는 가지산(迦智山 : 1,239m) 봉우리가 나란히 하고 있어 운문사를 포근히 감싸고 있다.

 저 옛날, 한 스님은 공부할 곳을 찾아 여러 곳을 다니던 중, 이 산중에 들어와 금수동(현재 북대암 옆)에 작은 초막을 짓고 수행하기를 3년을 지냈다. 어느 날, 온 산중의 새와 짐승들이 울부짖어 밖에 나와 보니 다섯 군데의 계곡에서 신비스러운 영기(靈氣)가 솟아 오르는 것을 보았다. 이에 스님은 깨달은 바 있어 사찰을 건립하기로 하였다.

 때는 신라 진흥왕 21년(560년) 사찰 건립의 초석을 놓기 시작하여 7년 동안 다섯 곳에 사찰을 세우니 대작갑사(大鵲岬寺 : 현재 운문사)를 중심하여 동(東) 10여리에 가슬갑사(嘉瑟岬寺), 서쪽 10리에 소작갑사(小鵲岬寺 : 또는 大悲岬寺, 현재 大悲寺)를 남쪽 7리에 천문갑사(天門岬寺), 북쪽 8리에 소보갑사(所寶岬寺)라 명명하고 이들 전부를 오갑사(五岬寺)라 하였다. 이 때가 진흥왕 28년(567년)이니 왕은 명산(名山)에 사찰이 창건된 것을 기뻐하고 호국의 원찰로 삼았다고 한다. 

 

 

원응 국사비 (보물 제316호)

 

▲ 삼층석탑 (보물 제 678호)
▲ 석조여래좌상(보물 제 317호) 사천왕 석주 (보물 제 318호)


 3 중창 중수 
 ① 제1차 중수와 원광법사

 운문사의 1차 중수는 진평왕 22년(600년)에 원광법사(圓光法師)에 의하여 크게 이룩되었다.

 원광스님은 진흥왕 27년(566년) 25세로 득도하여 삼기산(三岐山)에서 6년 동안 정진 후, 30세인 진지왕 3년(578년) 중국(당시 陳)으로 구법의 길을 떠났다.

 중국의 금릉 장엄사, 소주 호구사 등지에 머물면서 열반경과 성실론, 구사론, 아함경전등, 여러 경전을 수학하면서 그의 명성은 중국 천지에 드날렸다.

 당시 중국은 북에서 일어난 수(隋)나라에 의하여 진(陳) 나라가 멸망해 갈 무렵이었다. 호구사(虎丘寺)에 수나라 군대가 침입하여 어느 스님을 탑 앞에 묶어 놓고 그의 목에 칼을 내리칠 자세였다. 이 때, 지휘관 한 사람이 멀리 절쪽을 바라보니 절과 탑이 불타고 있는지라, 급히 달려와 보니 불탄 흔적은 없고 군사들에게 둘러싸인 가운데 한 스님이 묶인 채 있기에 기이하게 여기고 스님을 풀어 주었다. 그 스님이 일찍이 만인의 추앙을 받고 있는 원광 스님일 줄은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원광 스님은 새 서울인 장안(長安)으로 가서 당시 「섭대승론」의 대가인 담천의 강의를 받는 등 원광의 구법 유학은 계속되었다. 그후 진평왕 22년(600년), 사신으로 왔던 제문(諸文)등과 같이 귀국하니 조국을 떠난 지 23년만이었다.

 원광 스님이 귀국하여 경주 황룡사(黃龍寺)에 잠시 머물다 바로 운문사인 대작갑사에 머물면서 사찰을 중수하고 가슬갑사에 머물고 있었다. 어느 날, 귀산(貴山)과 추항(箒項) 두 화랑이 찾아와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일러 주니 이 계가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원광 스님은 진평왕 35년(613년)에는 수나라 왕세의(王世儀)라는 사신이 오자 황룡사에서 처음으로 백고좌회(百高座會)를 열어 「인왕반야바라밀다경」을 설하였다고 하니 백고좌회는 바로 국난을 극복하는 호국법회인 것이다.

 이처럼 원광 스님의 귀국은 운문사를 중심으로 하여 신라가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룩하는데 커다란 힘이 되었다.

 

▲ 천진소나무 (천연기념물 제180호)

 

▲ 법의 수레가 줄기차게 굴러가기를
▲ 범종루


 ② 제2 중창과 보양국사

 운문사의 제2중창은 고려 태조 16년(933년)에 보양국사(寶壤國師)에 의하여 이룩되었다. 스님에 대한 설화가 다음과 같이 전해 온다.

 보양 스님은 당나라에서 법을 전해 받고 돌아 오다가 서해 바다를 건널 때, 용왕이 용궁으로 청하여 불경을 듣고 금라(金鑼)가사를 바치고, 아들 이목(摛目)으로 시종케 하면서 「지금 3국(후삼국)」이 요란하여 아직은 불법에 귀의하는 임금이 없지만 내 아들을 데리고 가서 작갑(鵲岬)에 절을 짓고 있으면 난리도 피하고 또한 수년내 반드시 불법을 보호할 임금이 나와 3국을 평정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본국에 돌아와 한 곳에 이르니, 어느 노승이 나타나 스스로 원광(圓光)이라 하면서 인궤(印櫃)을 주고 사라졌다.

 이에 보양 스님은 페허가 된 사찰을 일으키려 북쪽 고개에 올라가 보니, 뜰에 5층 황색탑이 있었다. 그러나 내려와 찾아 보니 아무런 흔적도 없어, 다시 올라가 보니 까치떼가 땅을 쪼고 있었다. 그제서야 서해의 용왕이 작갑(鵲岬)이라 하던 말이 생각이 나서, 그 곳을 헤쳐보니, 예전의 벽돌이 나왔다. 옛 절터임을 알고 절을 중창하고 작갑사라 하였다.

 고려 태조 20년(937년) 왕은 후삼국을 완전히 통일했는데, 보양스님이 오갑사를 중창한다는 말을 듣고 오갑의 밭 500결(結)을 시주하고 절 이름을 내리어 운문선사(雲門禪寺)라 하고 금라가사의 영음(靈蔭)을 받들케 하였으며 이때부터 호거산(虎距山)이 운문산으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용왕의 아들 이목은 늘 절 곁의 작은 연못에 살면서 바른 법의 교화를 도왔는데, 어느 해 몹시 가물어 곡식이 마르자, 보양 스님은 이목을 시켜 비를 내리게 하였다.

 천제(天帝)는 노하여 이목을 죽이려 하자 보양 스님은 이목을 평상 밑에 숨겨 두었다. 천사가 내려와 이목을 찾자, 뜰 앞의 이목(梨木 : 배나무)을 가리키니 곧 배나무에 벼락을 치고 하늘로 올라갔다. 배나무가 꺾어지자, 용이 나무를 어루 만지니 다시 살아났다 한다. 

 ③ 제 3중창은 고려 숙종 10년(1105년) 원응국사(園應國師 : 學一)에 의해서 이룩되었다.

 조선조 숙종 때 설송(雪松: 1676 -1750) 스님이 임진왜란 후 폐허된 사찰을 크게 중창하였고 5 중수는 1907년 운악(雲岳)스님이, 1912년 긍파(肯坡) 스님이 보수, 1913년 고전(古田) 스님이 수리하였다. 

 

▲ 나한상

 

▲ 도서관
▲ 강의실


 4 오늘날의 운문사

 한국 불교 비구니 스님들의 요람인 운문사는 1958년 후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 비구니 승가학원이 개설되면서 한국 불교의 커다란 학맥을 형성하고 운문학맥은 해를 거듭할수록 성장하여 현재 강주 명성(明星)스님을 중심하여 200여명의 스님들이 도업을 밝히고 있다.

 낙후 된, 당우를 보수하여 대가람의 위용이 이룩되기까지 개산조를 위시한 역대 선사의 뜻을 크게 발전시켜 현재 한국 불교의 굳건한 토대를 형성하고 있다.

 오늘도 내일도 입승 스님의 죽비 소리에 시작되는 송경소리는 운문 골짜기에 울려 퍼진다. 운문사의 송경소리가 이어지는 한 영원히 우리 국토는 평화하고 거룩한 법음은 온 누리에 넘쳐 흐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