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용어해설] 섭수(攝受) · 절복(折伏)

불교용어해설

2009-08-18     관리자

 사람을 대하여 그 사람을 바르고 다행스러운 길로 인도하고자 하면 대개 두 가지 경우를 만나게 된다. 그 하나는 상대방이 생각하는 바, 요구하는 바를 받아들이면서 그의 마음을 바른 길, 밝은 길로 인도하는 방법과 그가 생각하는 바를 막고 꺾어서 그 마음을 버리게 하고 밝고 바른 길로 나아가게 하는 방법이다. 어떤 경우이든 상대방을 도와 다행스러운 길로 인도해 주고자 하는 자비한 생각이 거기 있다. 그래서 혹은 저의 뜻을 받아 들여서 키우고 혹은 저의 뜻을 억압하여 바른 길로 인도한다.

 전자의 경우를 섭수(攝受)라 하고 후자의 경우는 절복(折伏)에 해당된다 하겠다. 다시 말하면 자비한 마음이 근본이 되어 상대방을 돕고 교화하는데 적당한 방법을 선택하고 혹은 자비로 혹은 위엄으로 상대방을 거두는 것이다.

 대개 부처님 법을 전하는 마당에서 자비를 근본으로 하여 상대방을 돕고 그의 뜻을 거슬리지 아니하며 그의 힘이 되면서 그에게 바른 믿음이 서도록 인도하게 된다. 그 이상에 상대방의 뜻을 거슬려 가며 위엄으로써 그의 마음을 그치게 하고 바른 믿음을 갖도록 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대개는 온갖 방편을 써서라도 섭수의 길을 취한다. 그러므로 교화에 있어 절복이라는 방법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며 대자비와 대방편과 대지혜를 가진 사람이 가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교화에 있어 섭수는 근본 원칙이고 절복의 경우는 사뭇 드물다. 어쩌면 절복까지 행하는 대자비 대력보살이 적었다는 까닭일까. 아니면 중생을 바로 이끈다는 원래의 방법이 섭수이기 때문일까.

 필자의 생각으로는 후자의 경우로 편들고 싶다. 중생이 하고자 하는 뜻을 깊이 살피고 그의 본뜻을 이해하며 그의 성숙을 기도하는 입장에서는 불가불 자비섭수가 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에는 섭수의 말이 종종 보여서 이것이 우리의 또 하나의 교화방법인 것을 일깨워 준다. 

 

 유명한 승만경의 경우다. 재가인 승만부인이 세운 십대원의 9번째에 이런 말이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반하는 자는 결코 지나쳐 버리지 않고, 절복할 자는 절복하고, 섭수할 자는 섭수하겠다」고 맹서를 세웠다. 부처님의 법을 배반하고 그른 길을 가는 자를 만나면 혼내줄 자는 혼내주고, 따뜻하게 거두어줄 자는 거두겠다는 취지다. 그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정법의 영원을 위하고 중생의 성숙을 위해서다.

  절복이라는 용어는 율장에서도 보인다. 계율을 왜 정하느냐는 문제에서 10가지 이익 때문이라고 하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부끄러움이 없는 자를 절복하여 구하기 위함〈마하승지율〉」이라고 하였다. 십송율(十誦律)에도 절복이라고 하였고 다른 곳에서는 항복, 조순(調順) 또는 조복(調伏)이라고 기록되고 있다.

 경전에 사용된 용어로 보아서 절복은 섭수보다 강한 교화 수단인 것을 알 수 있다. 억제하고 금제하고 처벌하는 강한 의미가 거기 있다. 그래서 그른 길로 가고 있는 행을 멈추게 하고 마음을 바로 잡게 하는 것이다. 일본 일련(日連)사는 「무지한 악한 사람에 대하여는 섭수를 먼저하고 삿된 지혜로 정법을 훼방하는 자에게는 절복을 먼저 한다」는 취지를 말하고 있다.

 오늘 날 우리의 전법 교화면에서 섭수와 절복은 깊이 생각하여야 할 하나의 과제다. 자비심으로 절복한다는 것이 오늘의 시민사회에 여러 문제를 야기할 것이기 때문이다. 섭수와 절복은 자비의 양면이며 교화에서 빠질 수 없는 두 요소다. 교화 대상과 시기에 따라서 적절하게 활용되어야 할 것이다.

 어린이가 위험한 차도에서 놀고 있을 때 자비한 부모는 그를 크게 꾸짖을 것이다. 애정이 깊은 만큼 꾸지람도 크다. 이처럼 절복에는 항상 깊은 자비섭수가 바탕이 되어 있을 때 우리의 교화에서 원만하게 활용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