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 에세이 / 내이름을 걸고(1)

백모래밭에 혀를 박고 죽더라도

2007-05-29     관리자

백모래밭에 혀를 박고 죽더라도

-한승원(전남 장흥에서 출생. 서라벌 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대한일보」신춘문예에 소설 당선, 소설에 「앞산도 첩첩하고」「불의 딸」「아제아제바라아제」등이 있음)

이름은 얼굴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자기의 얼굴을 내걸듯이 자기의 이름을 내걸고 사업을 펴는 수가 있다. 적어도 자기의 이름을 내걸고 하는 사업에서는 자기 이름을 더럽히는 일을 하려하지 않는다. 자기 이름 알기를 자기 얼굴만큼 소중하게 알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에서 보면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한 사람들은 카메라 앞에서 두 손 바닥이나 옷자락 같은 것으로 얼굴을 가리려고 하곤 한다. 떳떳하지 못한 짓을 한 얼굴을 드러내 보이기 부끄럽기 때문이다. 이름에는 성(姓)이 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가장 큰 욕이 자기 성을 가는 일로 생각한다. 그것은 조상을 욕되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보면 자기 이름을 걸고 큰 일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도 자기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일을 서슴지 않고 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그것이야 말로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가장 원초적인 도덕성이 타락했음이다. 가장 근원적인 자존심의 성벽이 무너진 것이다. 그것들이 타락하고 무너졌을 때 우리가 우리 인간에게서 신뢰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작가들은 자기의 이름을 목숨같이 생각한다. 내가 쓴 글 한 줄 한 줄은 나의 모든 명예와 자부심이고, 최고 최대의 재산이고, 그것은 장차 내 아들 딸들한테 물려줄 것들이다. 그것들은 그들에게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 부끄러움이 있는 것이 어떻게 나의 재산일 수 있으며 그들에게 주는 유산일 수 있단 말인가. 한창 살림살이가 어려웠을때, 한 친구가 이런 제의 를 하여 왔었다. 중국의 고전 가운데 유명한 소설을 한 출판사에서 엉터리로 번역을 해놓고 번역자의 이름을 하나 사려 한다는 것인데, 내 이름을 팔으라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내 이름으로 그 소설을 내겠다는 것이었다. 만일에 그 소설이 내 이름으로 출판되어 시중에 나가게 된다면 나는 얼렁뚱땅 번역자가 되는 판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출판사로부터 얼마쯤의 돈을 받게 되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 할 수 있는 기회였다. 글 한 줄 쓰지 아니하고 몇 십만원을 한꺼번에 받는다는 것은 그 무렵의 내 실정으로서는 감지덕지였었다. 그러나 나는 싫다고 했다. 그러한 제의를 받았다는 것, 그것을 받도록 처지가 어려운 것이 기분 나쁘고 슬퍼 견딜 수 가 없었다. 개 자식, 사람을 어떻게 보 그 따위 주문을 한 단 말인가. 배모래밭에 혀를 박고 죽더라도 선비는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그것은 이름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극악스러운 몸부림인 것이다. 누구인가 그랬다. 사람이 나이 사십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대하여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고. 그것은 자기의 이름에 대하여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는 말과 같다. 세상에는 익명이 횡행하고 있다. 이 많은 사람들 속에서 내가 이 짓을 하였다는 것을 누가 알 것이냐. 그리하여 몰래 쓰레기도 버리고, 오줌도 갈려 버리고, 전화를 걸면서도 자기의 이름을 먼저 밝히려고 하지를 않는다. 이름을 밝히지 않고 투서를 하고, 이름을 감추고 도둑질을 한다. 이름을 밝히지 않고 불량식품을 만들어 팔고 공해폐물을 아무데나 몰래 버리고 돌을 던지고, 욕설을 퍼붓는다. 이름을 감추고 서로 만나서 춤을 추고 여관에서 자고 나오고, 고문을 하고, 강도질을 하고 사람을 죽인다. 그것은 인간성의 타락이고 염치 없는 부도덕이다. 사람들이 자기의 이름을 감추려고 하는 사회는 정의롭지 못한 사회이고 잔인한 사회다. 이런 뜻에서 우리는 선인들이 가문의 명예를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겼던 일을 되새겨야 한다. 이 민족 6천만 모두가 자기 얼굴과 이름을 정정당당하게 내걸고 간직하고 있는 힘을 쏟을 때 통일도 쉽게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