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용어해설] 업(業)

* 불교용어 해설

2009-08-11     관리자

 우리들은 일상생활에서 업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업대로 산다든가, 업이 무섭다든가, 자업자득이라든가. 이렇게 손 쉽게 쓰는 업이지만 그 뜻은 매우 깊다.

 업은 범어로 카르만(Karman)인데 한문으로 갈마(羯磨)라고 적는다. 원래는 행위 즉 의지에 의한 심신의 활동, 생활을 의미한다. 따라서 업은 몸으로 짓고 말로 지으며 뜻으로 지으므로 삼업(三業)이라 한다. 이러한 업은 먼저 생각이 있고 그 다음에 말이나 행동이 따르는 것이 일반이므로 이러한 삼업의 본체는 의지라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

 사람의 육체는 색수상행식 등 오온(五蘊)의 일시적 결합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집합체가 죽음과 함께 해체하면 남을 것이란 있을리 없다. 육체라는 겉모습이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때에 남는 것은 혼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이것은 바로 본것은 못된다. 영혼이라는 고정적 실체로써의 개아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법무아(諸法無我)는 불법의 대원칙이다. 그러면 무엇이 인간의 삶을 종속시키는 중심이 될 것인가. 이것이 업인 것이다. 

업은 경계를 보고 마음을 일으키고 경계를 부딪쳐서 의식을 일으키며 거기서 분별하고 종합하고 사유한다. 이렇게 보고 듣고 만나는데서 생각은 일어나고 그것이 축적되며, 이렇게 축적된 의식의 형태는 새로운 의식 세계를 형성해 간다. 이렇게 활동하여 끊임없이 형성되고 다시 움직이는 것이 업이다. 업은 생활을 통해서 끊임없이 자기를 형성해 간다. 이 업의 상태가 그에 상응하는 과보를 부른다. 이것을 이숙(異熟)이라고도 한다. 업이 인이 되어 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업의 성격이 밝고 맑고 착한 것이라면 업에 상응하는 과보를 스스로 부른다.

이것이 업과(業果)다. 천상에 나든 지옥에 나든 그것은 남이 빠트리거나 누가 모셔가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의 업인(業因)에 따라 과보를 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계에 태어난 사람은 인간계에 태어날 업인을 스스로 지은 것이므로 그 책임도 자신에게 있고, 새로운 업을 지어감에 따라 새 방향으로 자신을 형성해 가는 것이다. 대개 인간이나 축생에 태어나게 한 근본업을 인업(引業) 또는 총보업(總報業)이라 한다.

인간계에 태어나서 개개의 개체를 완성시키는 업을 별보업(別報業)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중생은 모름지기 바른 깨달음으로써 능동적으로 자신의 창조능력을 활용하여 첫째는 업에서 벗어나야 하고, 설사 업을 짓는다 하더라도 선업을 지어야 한다. 끊임없는 정진으로 자기 변혁을 게으르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대개 업을 지으면 과보를 받는 시기가 가지가지다. 어떤것은 업을 지은 그 생에서 과보를 받는것이 있고, 어떤 것은 다음 생에 과보를 받는 것도 있으며 어떤 것은 사뭇 그 후에 받는 과보도 있다. 이것을 각각 순현업(順現業) 순생업(順生業), 순후업(순후업) 이라한다.

 대개 업을 말할 때 업을 속박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업은 무엇인가를 형성하는 기반이라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업을 따라서 사람도 되고 천상에도 난다. 업이 다하면 새로운 업을 따라 새 환경이 열린다. 그런만큼 업은 한 현상을 형성하고 지탱하는 힘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능히 새로운 업을 지으므로써 새 환경, 새 세계를 전개해 가는 것이며 주어진 과보에 대해서도 새로운 변혁과 변경을 가할 수 있는 것이다. 즉 본분에서 말하면 업은 그림자이고 인간 본분은 주인공이다.

 우리는 청정 본분을 깨달아 본분을 수용할 때 업이 도무지 상관이 없는 것이다. 본분에서 보면 업은 실로 무(無)다. 구속할 아무 것도 없다. 이것이 해탈인 것이다. 우리가 자성(自性)을 깨달으면 즉시에 대자재를 이룬다 함은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