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의 화두 [ 판화가 이철수 ]

부처님 그늘에 살며 생각하며

2007-05-29     관리자

이철수:   '54년 서울 출생. '81년 첫개인전을 가진 이래 수차례의 개인전을 가졌고, 시대 정신전, 문제작가전80년대 형상미술전 등 각종 기획 큰 대전에 그림을 출품했다.   작품집에 [응달에 피는 꼿][이철수 판화모음집][새도 무게가 있습니다]가 있고 [모래알의 사랑][아가씨 피리를 부셔요][넋이라도 있고 없고][한][도토리예배당 종치기 아저씨]등에 삽화를 그렸으며, 민예총 미술위원회, 민족미술협의회, 충북문화운동연합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오윤과 더불어 80년대를 대표하는 민중판화가라 일컫어져 왔다.   그러나 최근들어 일상생활 속에서 얻어지는 선어(禪語)들을 그림으로 표출해내고 있어 '자연과 소통한 생활 속의 선화(禪畵)를 그리는 사람'으로도 널리 알려지고 있다

서울에서 다래재를 넘어 백운면으로 가면 되는 것을 원주쪽으로 길을 잘못 들어 부득이 제천에서 충주가는 방향으로 박달재를 넘을 수밖에 없었다.

   천등산 박달재와 다래재 사이에 있는 산촌마을인 백운면 평동은 30도를 웃도는 초여름의 날씨에도 거의 더위를 느낄 수 없었다.

   한창 농사철이라 오히려 민가는 한산해 보이는 듯했다.

   또 길을 잘못들까 염려해서인지 이철수 씨는 평동 2구 느티나무가 서있는 마을 언저리까지 마중나와 주었다.

   허름하고 헐렁한 무명옷에 작은 키, 바짝 마른 몸, 검게 탄 그의 얼굴엔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40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런데 나는 왜 그가 늙수그레한 노인네일거라는 생각을 해왔을까.

   요근래 몇년 월간 [해인] 지를 통해, 그리고 요즈음에는 송광사에서 나오는 [불일회보]를 통해, 혹은 선우도량 스님들에 의해 발간되는 [선우도량]지를 보면서 우리 불가 사람들에게도 꽤 친숙해진 이철수 씨.

   아마 그의 그림과 그림 이야기를 통해 내 마음대로 그렇게 그려진 생각일게다.

   만나서 그 이야기를 하자 이철수 씨와 그의 아내 여경 씨는 그런 얘기는 자주 듣는 이야기라고 한다.

   이들 두 부부가 지금은 국민학교 5학년이 된 아들 장환이와 2학년이 된 딸 가현이를 데리고 이곳 산골마을에 와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도 벌써 7년이 되었다.   이젠 그네들도 이곳 백운리 평동 사람이 된 것이다.

   여기에 오기 전 경북 의성에서의 생활까지를 합치면 10여년 남짓을 이렇게 생활하고 있다.

   결혼하기 전부터 서로 한 약속이지만 이곳 생활이 처음부터 쉬웠던 것은 아니다.   다리미가 고장나 동네에서 다리미를 빌리고자 해도 다리미 있는 집이 없었다.  작은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서도 박달재 고개를 넘어 제천까지 가야한다.

   그러나 그의 아내 여경 씨의 말을 빌리자면 속옷 고무줄이 끊어져 흰 고무줄을 넣고 싶은 것을 동네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검은 고무줄을 넣으면 만사는 제대로 풀린다는 것이다.

   대문을 열어 놓은 채 오는 손님을 늘 반갑게 맞이하는 이철수 씨 집에는 찾는 이들이 참으로 많다.   요즈음은 특히 스님들의 왕래도 잦다.

   겨울 김장을 200여 포기는 해야할 정도라니...   그러함에도 그들에게는 번거로움은 없다.   그들은 늘 그 자리에 그렇게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있었던 개인전을 위해 서울에 며칠 간 머물면서 느낀 것은 서울이 자신들이 살았던 고향임에도 무섭고 살벌한 느낌이 들더라는 것이다.

   그냥 지나가는 말 한마디에도 의미를 붙이고 다그치듯 이유를 캐묻는 사람들...   그들은 왜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가.   무엇인가에 쫓기듯 바쁘고 분주하며 다급해진 그들.   오히려 제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훨씬 잘 될 성싶은 일들도 그대로 놔두지 않는다.   누군가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데 대한 불안으로 조급해한다.

   법정 스님 말씀대로 시끄럽고 번잡하고 먼지에 싸인 도시생활은 하루하루가 그대로 소모요 마멸이며 오염인지도 모른다.   흙을 가까이하며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것이 오히려 새롭게 가꾸고 피어나는 창조적인 삶이라는 말은 확실히 공감할만 하다는 것이다.

   전화를 걸어봐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이 드물다.   그리고 서로들 바빠죽겠다고 아우성들이다.

   도대체 무엇이 사람들을 저토록 정신없이 만드는가...

   거세고 도도한 자본주의 앞에 한없이 무기력해진 현대인들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자신 또한 빛 한 점 없는 긴 터널을 통과하듯 오직 어두움 뿐이었다.

   오윤 씨와 더불어 80년대의 대표적인 목판화가로 당시 불의와 억압과 폭력으로 얼룩진 80년대의 울분과 함성을 저항으로 목판에 각인하던 민중판화가 이철수 씨.

   그가 불교를 만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5~6년전.   당시 해인사에서 발행되는 월간 [해인] 지를 만들던 법연 스님을 만나고나서 선(禪)을 알았다.   또 선서(禪書)를 통해본 조사들의 어록은 그대로 하나의 빛이 되었다.

   그래 그것이었다.   그는 그때부터 마음공부를 시작했다.

   "갈수록 현실이 정신적으로 허해지고 있어요.   이제 허해진 정신에 화가들이 무언가 해야할 의무를 미룰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일상 속에서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방식으로 내적인 고요와 성찰을 일깨우려 합니다.   이것이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미술을 되돌려주는 것이고 그동안 제 스스로가 간과했던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라 생각 됩니다.   그러나 값싼 감정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뭔가를 가슴에 얹어놓기 위해 세상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마음공부를 해야 할 것입니다."

   늘 대중들을 생각하는 김철수 씨는 자신의 그림을 보는 사람들에게도 친절을 베푼다.   어쩌면 그림이면 그 뿐인 것을 거기에 굳이 그림이야기를 덧붙인다.   말이 필요없음에도 말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몇 마디의 그림이야기를 덧붙여 주는 것이다.

   요근래 세인들이 자신의 그림을 선화(禪量)라거나 불교적인 그림이라는 표현을 그는 못마땅해 한다.   그냥 무어라 이름붙임없이 그대로 봐주었으면 싶다.

   자신이 생활하며 하고 있는 마음공부과정을 그냥 스치는대로, 우리의 생활 속에서 보이는대로 표현했을 뿐인데 그것을 선이니 불교니 하며 이름 짓는 것이 과연 맞는가 싶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일컫는대로 그의 그림에는 선미(禪味)가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간결하면서도 적확한 의미만을 아무런 꾸밈없이 바로 전해주는 그의 그림이 화두를 연상시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비 개인날 사물을 보듯 무엇인가 맑게 정화되며 투명하고 분명해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마치 깨끗하게 닦아 가지런히 놓아둔 오래된 바루처럼.

   그의 그림과 그림이야기가 많은 감동을 주는 것은 역시 김철수 씨 그가 그렇고, 또 그의 생활이 작품속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예전 분노와 울분, 함성으로 표현되었던 민중판화시절 그를 만났던 사람들이 이철수 씨가 변했다느니, 변질되었다느니 도피니 관념적이라느니, 혹은 작품맛이 맹물맛이라는...   등등 많은 말들을 한다.   그러나 그는 굳이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는다.   다만 자연과 더불어 살며 일하고 생활하는 현재의 자신 모습 그대로를 드러낼 뿐이기에.

   30여평 남짓한 그의 작업실 한 벽면에는 '불취어상(不取於相)'이라고 쓰여진 액자가 걸려 있다.

   어떠한 상도 취하지 말라했는데 이 또한 상이 아닌가.   불혹의 나이에 일구어 놓은 현재의 그의 모습이 앞으로는 어떻게 바뀌어 가려는지...

   그의 말대로 아직은 말이 필요해 말을 하고 있지만 어느 순간에는 그 말조차도 필요없게 될런지도 모른다.

   요즈음 그는 스스로를 살피는 일이 더욱 간절해졌다.   그림과 마음이 멀리 떠나있지 않다.   그저 살고 그저 일하고 그저 그리는 일을 하고 있을 뿐이라며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 아름다운 비유이더니 이제는 차츰 사실로 비추어진다는 그에게서 선방수좌의 모습이 연상되는 것은 또 무슨 까닭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