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날이 새날(日日是新日)

이남덕 갈럼

2009-08-11     관리자

또 한해가 저물고 새해를 맞게 된다. 젊은 나이에 새해를 맞는 것과 노년에 또 나이 한 살을 더 먹는다는 것과 어떤 의미의 차이가 있을까.

 새해가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주는 의미는 일 년의 새 출발이라는 신선한 감각에 있다. 젊은이들에게 새해는 신선함이 두 가지로 겹쳐져서 희망에 부푼 발랄한 기운이 선명하게 부각된다. 그런데 반하여 노년과 새해는 잘 조화되지 않는 두 항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년에게도 새해는 틀림없이 찾아온다. 어떤 마음으로 새해를 맞는 것일까?

 나는 마치 나 자신은 젊은 사람인 것처럼, 다른 노년들이 어떻게 나이를 먹는지 몹시 궁금할 때가 있다. 일본의 어느 여류작가가 쓴 <戒老錄>이란 책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아름답게 늙는 지혜>라는 제목으로 내 흥미를 끌었으나, 내가 과문한 탓인지, 우리나라 노인들은 늙는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다. 과연 할 말이 없어서 말이 없는 것일까?

 다른 어느 나라 노년들보다도 격변의 일생을 살아온 우리들이다. 오늘의 칠십대가 태어났을 때는 이미 일제가 한반도를 지배했을 때다. 식민지 치하의 굴욕은 삶속에서도 천진한 어린 시절은 나비 쫓고 달래 캐고, 햇님 달님 이야기와 콩쥐팥쥐 이야기로 낮과 밤을 이었으니 태고적 생활 그대로였다. 일년 중 세시풍속(歲時風俗)만 해도 그대로 지켜졌으니 산제당의 산신제, 풍년을 기원하는 기양제(祈壤祭). 지신제가 있었고, 단오날에는 씨름판과 그네터에 군중의 웃음꽃이 터졌었다.

 그러나 내 유년시절의 꿈이 깨어진 것은 만주사변․ 지나사변으로 일본이 전쟁을 시작하면서부터다. 군부독재의 표본으로 일본의 이른바 ‘대동아전쟁’은 세계사에 그 오점을 영원히 남기겠지만, 그 치하에서 신음했던 우리들의 아픔은 말로는 다 형언할 수 없을 것이다. 제 2차 대전의 종식으로 해방이 오고, 남북으로 분단된 조국에서 동족끼리 싸워야 했고, 그 아픈 상처가 채 아물지도 못했는데 4.19, 5.16, 5.17, 6.29등 숫자로 표시되는 역사의 갈등은 언제 조국통일로 매듭지어질지 모르는 단계에 우리들은 이미 노년을 맞은 것이다.

 그뿐 아니다. 삼강오륜(三綱五倫)의 전통윤리가 지배하던 오랜 농경문화시대가 후퇴하면서 갑자기 밀어닥친 산업사회에의 돌입은 우리들 생활 전반에 걸친 변화를 강요하고 있다. 팽배한 물질지상주의․핵가족화 등의 물결 속에서 전통적인 가치관과 가족제도가 붕괴하는 소리를 가슴에서 듣고 있는 작금의 우리들이다.

 나는 가끔 내 나이 단 70이 아니고 우리나라 역사만큼이나 다 살아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질 때가 있다. 그래서인지 진짜 다시는 욕계인간으로 윤회하지 않고 이번 생으로 졸업장을 받고 싶은 것이다.


 보통 인생 일생을 춘․하․추․동 네 계절로 사분하는데서 탈피해서, 노년기를 인생 제 3기 가을로 잡고, 제 4기인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풍요로운 추수기, 또는 죽음을 맞이할 준비기로 보게 된 것도 불교의 윤회설을 받아들인 덕택이다. 그러나 막상 노년을 맞아 놓고 보니 실로 당황함이 크다. 생․노․병․사(生老病死)의 신생 사고(四苦)가 마치 이때 오기를 기다리며 숨어 있었던 복병(伏兵)처럼 일제히 들이닥친다.

 이제까지는 ‘고통’에 대한 인식조차 제대로 안되어 있어서 ‘약간의 고통이란 인생에 늘 있는 것’ 쯤으로 생각하고, 육신과 정신의 안락을 더 많이 찾는 것으로 능사를 삼아온 것이 사실이다.

 노년을 가을로 비유한 것도 봄, 여름 동안 씨뿌리고 가꾼 것을 거두어들이는 추수의 계절로 말한 것이니 얼마나 안이한 생각이었는가. 그뿐이 아니다. ‘그냥저냥 살다가 고통을 하나라도 덜 느끼고 가는 것이 상책이다’ 이런 생각은 또 얼마나 고식적인가!

 불교의 고통관은 참으로 철저하다. 네 가지 고통을 다음과 같이도 나눈다. 첫째, 식욕에 말미암은 고통이니 생물로써 배고픔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요, 둘째, 음욕에 말미암은 고통이니 동서고금의 소설과 드라마가 이것 빼놓고 주제가 없는 듯이 보이는 것만 봐도 알 것이다. 셋째, 성내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고통이니 남의 잘못은 크게 보이고 자기허물은 안보여서 사사건건 괴롭기만 하다. 넷째는, 죽음에 대한 공포이니 불안하기 그지없는 하루살이 목숨이다.

 이러한 삶의 기본적인 고통들이 젊은 날엔들 없을 리야 없지만 노년에 들면 심신의 쇠약과 더불어 더욱 강하게 느껴지게 마련이다. 앞의 두 고통은 노년에 이르러 특히 더하다할 것은 없으니 덮어 두고라도 뒤의 두 고통은 뼈저린 아픔으로 느껴지게 된다.

 한 평생을 두고 쌓아올린 고정관념(固定觀念)은 노년에 이르러 더욱 굳어지기 마련이다. ‘내 오랜 경험에 의하면…’이란 허두를 앞세워 자기 의견을 고집하는데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노년을 종종 본다. 그러면 상대적으로 젊은이는 어른들이 주장하는 의견은 무조건 옥석의 구분도 없이 노인의 완고함으로만 몰아붙이는 수가 있다. 노인의 말이 다 맞는 것은 아니지만 그야말로 오랜 경험에 의한 지혜에서 나오는 옳은 말이 대부분이라는 것은 피차에 다 아는 사실이다. 이렇게 되면 옳고 그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세대 간의 감정의 대립이 되어, 가뜩이나 죽음을 앞둔 적막한 기간에 삶에 대한 원망까지 겹쳐서 공포와 불안은 더하게 마련이다.


 노년은 인생이 반드시 겪어야 할 하나의 과정이다. 앞의 생노병사의 네 고통을 하나로 줄인다면 다 ‘살아가는 고통’의 과정적 표현일 뿐이다. 젊은 날이 없는 노년이 없듯이, 노년이 없는 청년기도 없다. 누구나 다 겪어야 할 과정이기에 노년의 문제는 단지 노년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말이다.


 나는 어설픈 인생관, 철저하지 못한 고통관으로 그럭저럭 노년을 맞은 대표적인 경우일 것이다. 그 많은 고통의 원인이 ‘나(自己)’라는 허망한 한 생각을 고집하는 데에 있다는 것을 노년이 다 되고나서야 깨달았으니, 내 인생관의 전면적인 수정은 이제부터의 내 과제가 되었다. 칠흑같은  어두움이여!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수십 년을 외우면서도 공(空)에 대한 실감은 그렇게도 절벽이었으니 말이다. 마치 ‘나’라는 환상을 토대로 하여 신기루(蜃氣樓)를 쌓아올리고 있는 공동환상(共同幻想)의 장(場)이 우리가 사는 세계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놀라움은 말할 수 없이 컸다. 그에 비례해서 당황함도 컸고, 오랫동안 업(業)과 습(習)이 내 인생관의 수정작업에 얼마나 장애가 되는지 그 고통도 또한 크다. 그러나 이 고통은 내게는 축복이다.

 또 한해, 새해를 맞는다. 새로운 고통 속에서 맞는 새해를 나는 무한히 감사한다. 지난해 말구리에 처음 이사 들어왔을 때도 이 고통은 없었다. 안온무사한 노경을 꿈꾸고 손자 크는 재미에만 매달리는 할머니로 만족했으리라. 나는 겉모양의 내 일생에 대하여 후회하는 것이 아니다. 일생을 두고 단하나 그릇된 생각, 착각 속에서 살아온 것에 대한 참회인 것이다. 이 업장은 금세만의 문제가 아니기에 번뇌(煩惱)는 무한하고 그것을 소멸시키는 내 고통도 또한 무한할 것이다. 이 고통이 아무리 크더라도 이제부터의 내 삶에는 의미가 있게 되고 나날이 새날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