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어둠과 광명

특집. 밝은 생활

2009-08-10     이원수

  어느 여름의 일이었다.

  일행에서 떨어져서 저녁 늦게야 해인사 아래 마을에 도착한 나는, 먼저 절 근처 여관에 가 있을 친구들을 찾아 올라가다가 개울가에 이르렀다. 다리는 장마 빗물에 잠겨 보이지 않았다. 멀찌감치 전등이 하나 켜 있긴 했으나 촉광이 낮아 있으나마나였고, 개울물은 기세좋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 물위로 철벙철벙 건너 오는 사람이 있었다. 비록 물에 잠기긴 했지만 다리가 있음을 알고 나는 동행과 같이 물에 들어서서 조심조심 그 보이지 않는 다리를 건넜다.

  개울을 건너고 보니 사방이 캄캄하여 길이 어디있는지 초행인 나는  암흑속에 싸여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다.

  라이터를 켜보면 눈앞엔 언덕이요, 언덕엔 삼나무가 여기저기 서 있을 뿐, 어디로 가야할 지를 알 수 없었다. 비는 슬슬 뿌리고, 사람의 기척도 없다. 라이터 불도 개스가 떨어졌는지 켜지지 않았다. 암흑 속에서 방향을 모른채 서 있는데 아래쪽에 조그만 불이 움직였다. 누구의 담뱃불이었다. 얘기하는 소리도 들렸다. 어찌나 반가운지 몰랐다. 그 담뱃불이 가까이 오는 걸 보고 길을 물으니 우리도 그 여관에 들어있는 사람이라면서 따라오라 한다. 나서니 과연 평탄한 길이었다. 이리하여 우리는 젖은 몸으로 여관에 들어갔다.

  어둠 속에서 조그만 불빛을 그렇게도 반가와 한 일이 일찌기 없었다. 광명이라 할 수도 없는 작은 불빛이 우리를 밝은 데로 이끌어 주었고 방황과 불안에서 안식과 희열로 자리 바꿔 앉게해 주었던 것이다.

  어둠 속에서 찾는 광명.

  광명이란 곧 어둠과 상대적인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어둠이 없는 곳에 광명이란  그 가치나 그것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도 달라질 것이다.

  밤의 어둠이 있기에 아침의 광명은 값지고, 이 우주에서 어둠이 있기에 태양과 같은 발광천체가 필요한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닌가. 어둠과 밝음은 우리들 생활이 가지는 양상에서도 비유적으로 들어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밝은 생활을 가짐으로서 값있고 보람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어두운 생활은 비참한 것, 괴로운 것, 죄스러운 것 등으로 비유할 수도 있으며 여기에 우리가 빠져있는 한 행복한 삶은 갖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밝은 생활을 찾아 가지는 길이 어떤 것이며, 어디에 있는 가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는 화려하고 쾌락을 한껏 맛보며 편안한 살림을 하는 것을 밝은 생활로 생각하여 거기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밝음은 절대로 각고의 노력과 근로없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설령 무슨 이유로든 그것이 쉽게 얻어졌다해도 그것은 참된 밝음은 아닌 것이다.

  괴로움을 참으며 노력해서 비로소 조그마한 등불 하나를 얻을 수 있는 것이 이 세상살이다. 그렇게 해서 얻어진 한 개의 작은 등불로서 우리의 가슴을 덥게 하며 우리의 주위를 밝게 하는 것이다. 그 한개의 등불이 밝기를 더하도록  우리는 계속 노력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각고의 노력으로 등불을 얻으려 하지 않고 완력으로, 혹은 권세로, 혹은 꾀로, 혹은 속임수로 남의 작은 등불을 뺏아 가진다. 그런 사람은 남의 등불 하나로 만족하지 않고 열개, 백개, 천개, 만개의 등불을 거두어 들여 그 많은 등불로 화려한 광명의 궁전을 꾸민다.

  그 화려한 밝음을 위해 빛을 잃어버린  수천수만의 사람들이 어둠속에서 허우적이는 걸, 승자연하며 바라보는 이 호화광명의 소유자를 밝음 속의 인간으로 볼 수 있을까 ! 그것은 밝음이 아니요, 어둠 이하이며, 행복이 아니요 무서운 죄의 구렁속이다.

  광명은 그런 사람들에게는 그 더러운 인간의 모습을 또렷이 드러내 보여주는 빛일 뿐, 그 자신의 참된 행복의 빛이 되지는 못한다.

  세상이 아무리 발달을 해도, 과학이 아무리 사람을 편하게 히준다 해도, 자기가 할 노력, 해야할 일을 하지 않고 행복한 삶을 가질 수 없는 것이며, 그래야 이 우주의 원리에 맞는 것이 아닐까.

  인고 후에 갖는 그 밝은 행복감. 이것을 꺼려하고서는 언제까지나 암흑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