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실 없는 결실

특집/내 인생의 결실

2007-01-22     관리자

얼마 전 졸저 『방거사어록 강설』이 출간되어 가까운 지인들에게 한 권씩 보내드렸다. 책을 받아본 스님들의 반응은 대체로 ‘수고했다’는 인사말이었는데, 그 가운데 현재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수학하고 있는 어떤 스님이 찾아와서는 “스님, 이 책을 출판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렸습니까?”라고 불쑥 물었다. 그래서 필자는 “글쎄, 한 30여 년 걸렸을 걸.” 했더니, 그 스님은 놀라는 얼굴을 하고 물러갔다. 아마 그 스님은 필자의 대답이 너무 과장되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책을 저술한다는 것이 어찌 원고를 쓰는 그 시간만을 상정할 수 있겠는가!
필자는 1997년에 『반야불교 신행론』이란 책을 집필한 적이 있다. 그 책이 출간되던 날 저녁에 『반야불교 신행론』 출간에 걸린 시간을 계산해보았다. 놀랍게도 11년이라는 세월이 소요되었다. 반야불교를 공부하기 위하여 일본에서 보낸 기간이 3년이고, 귀국하여 『대품반야경』을 번역하는 데 3년이 소요되었으며, 다시 자료를 정리하고 원고를 쓰는 데 4년이 걸린 것이다.
물론 이 기간 동안 오로지 그 작업만을 한 것은 아니었다. 원고를 쓸 토굴을 마련하기도 하고, 불광사 일도 했으며, 때로는 종단의 소임을 맡아서 분주하게 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의 한 모퉁이에는 『반야불교 신행론』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은산철벽 앞에서

이렇게 책을 한 권 집필하여 세상에 내놓는다고 하는 것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기간이 소요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방거사어록 강설』을 집필하는 데 30여 년이 걸렸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말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독자들이 많은 것이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필자가 출가하여 처음 봉착한 난제가 공(空)이라는 말이었다. ‘공이란 무엇인가?’ ‘왜 삼라만상이 공인가?’ 참으로 어려운 문제였다. 이러한 난제를 안고 범어사 강원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1년이 지나자 『서장(書狀)』을 배우게 되었는데, 그 때 필자는 인생을 바꿀 한 마디 글귀를 만나게 되었다. 방거사라는 도인이 말했다는 “물 긷고 나무 나르는 일이 바로 신통이고 묘용이다.”라는 게송을 접하게 된 것이다. 이 때 필자는 너무나 황홀하고 기뻐서 잠을 이루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세상에 이렇게도 훌륭한 말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이것으로 공의 문제까지도 해결된 것처럼 여겨졌다.
더 이상 강원에서 문자공부를 하는 데 흥미가 나지 않았다. 더 이상 구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수행이라는 것에는 차제(次第)가 있었다. 그 뒤 동국대학교 졸업식 다음날 걸망을 지고 지리산 칠불사의 운상선원을 찾아갔는데, 거기서도 공과 방거사의 게송은 항상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렇게 수행의 길을 가는 길목에서, 방거사가 마조 선사에게 “일체의 존재와 상관하지 않는 자, 그것이 어떤 사람입니까?”라고 묻자, 마조 선사가 “자네가 저 서강의 물을 한 입에 다 마시고 나면, 그때 그것을 자네에게 말해 주겠네.”라고 대답한 선문답을 만나게 되었다.
이때 방거사와 마찬가지로 필자도 불법의 현묘한 이치를 깨달은 것처럼 착각이 들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선사(先師)이신 광덕 스님께서 일본어판 『방거사어록』을 건네주시면서 번역하여 불광지에 연재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겁도 없이 『방거사어록』의 번역을 6개월 정도 연재하기도 했다. 그러나 역시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연재를 중단했다.
방거사가 약산 선사의 제자들에게 “참 멋진 눈이다. 한 송이 한 송이가 다른 곳에는 떨어지지 않는구나!”라고 한 말에서 한 발자국도 내디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 긷고 나무 나르는 일이 바로 신통이고 묘용이다.”라는 게송도, 졸저 『신반야심경 강의』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은산철벽이었다.
그로부터 십수년이 흘렀다. 그 사이에 조사어록을 닥치는 대로 탐독하고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리고 그 결실물로 내놓은 것이 『방거사어록 강설』이다. 조금은 주제 넘는 짓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혹여 필자의 강설이 방거사나 당대 큰스님들의 뜻을 왜곡하지는 않았는지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인간의 삶에 하나의 결실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긴 수행의 길목에서
불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말 중에 바라밀이 있다. 이 말의 문헌학적인 해석은 ‘완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완성이라고 하는 것은 직선적인 사고이다. 사물을 직선적으로 고찰하면 ‘완성한 뒤에는 어떻게 될까’ 하는 문제가 생긴다. 가령 하나의 문명이 완성된다면 그 문명은 그 뒤에 어떻게 될 것인가? 완성되었다면 거기에는 진보는 멈추고 만다. 가령 완전이라 해도 진보나 변화가 없는 세계 정도로 퇴굴해 버리고 말 것이며, 진보가 없다면 필연적으로 생기를 잃어서 쇠퇴로 향하게 된다.
이 사정은 개인의 완성일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진보가 멈춘 사람의 생활은 가령 완성되었다 해도 퇴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완성’을 직선적으로 고찰하면, 자기를 부정하는 계기가 그 가운데로부터 나온다.
이렇게 바라밀을 직선적인 완성이라고 이해하면 모순에 떨어지기 때문에, 바라밀은 완성의 의미이긴 하지만, 그러나 완성 그대로 어디까지라도 나아가는 것 같은 ‘완성이 없는 완성’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서 무한히 향상되어 가는 원상을 순환하는 것 같은 수행이 생기게 된다. 때문에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 『대지도론』에서는 이 말을 ‘도피안(到彼岸)’ 즉 깨달음의 세계인 피안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따라서 어떤 것의 결실은 결실에서 매듭이 지어질 수는 없다. ‘결실이 없는 결실’ 즉 무한이 향상되어가는 원상을 순환하는 결실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도리를 방거사는 “나날의 일은 무엇이라고 할 것이 없어, 다만 스스로 슬금슬금 잘도 옮겨가는구나. 어느 하나 가질 것도 버릴 것도 없어,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어긋남이 없다.”라고 읊고 있다.
따라서 졸저 『방거사어록 강설』은 결코 결실물이 될 수가 없다. 긴 수행의 길목에서 시선이 잠시 머문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독자들을 향해서 필자의 시선이 지금 이곳에 머물고 있다고 중얼거리고 있는 것이며, 동시에 독자들의 시선도 이 책에 잠시 멈추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시선이 결코 고정되어서는 안 된다. 완성된 결실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완성된 결실을 추구하는 삶을 희구한다면 그는 사고의 토대부터가 잘못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려운 고개이긴 하지만 반드시 넘어야 할 인생의 고개이기도 하다.

------------
혜담 스님|1949년 경남 울산에서 출생, 부산 금정산 범어사에서 득도하였으며,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해군 군종법사 대위로 전역, 일본 불교대학 대학원 석사과정을 수료하였다. 선우도량 공동대표, 조계종 총무원 호법부장, 불교신문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현재 경기도 검단산 각화사 주지, 재단법인 대각회 이사, 조계종 재심호계위원 소임을 맡고 있다. 역저서에 『대품 마하반야바라밀경 상·하』 『반야경의 신앙』 『반야불교신행론』 『신반야심경 강의』 『한강의 물을 한 입에 다 마셔라』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