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 강의] 2.궁극의 이상세계로 나아가는 길

반야심경 강의 2

2009-08-02     김용정

반야심경의 내용을 하나의 드라마라고 생각하면 실지로 하나의 드라마이며 최고가는 드라마이다. 이 드라마를 이렇게 누군가 압축해서 산스크리트 원본을 썼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단지 산스크리트 원본을 중국의 현장 스님이 인도에 가서 15년 동안 공부를 하고 거기서 많은 산스크리트 원본을 가져왔다는 것, 그리고 인도 산스크리트어를 직접 배운 현장 스님이 한문으로 번역했다는 것, 그 중에 하나가 반야심경이라는 것을 알 뿐이다.

이 현장 스님이 이전까지는 주로 인도사람들이 중국어를 배워서 한역을 했다. 예를 들면 그 대표적인 사람이 인도인 나습〔구마라집(鳩摩羅什)〕이다. 현장 스님이 번역하기 약 200년 전에 이미 반야심경을 번역했다고 한다. 먼저 현장 스님의 출생 연대를 보면 대개 기원 후 600년에 태어났다고 하는데, 602년이라는 설도 있다. 아무튼 일반적으로 AD 600년에 이분이 탄생을 했다고 보는데 이때가 바로 수나라 개황 20년이라고 한다.

현장 스님은 29세 그러니까 629년에 인도를 향해서 구법의 길을 떠났다고 한다. 인도에서 공부를 마친 뒤 642년에 귀국을 시작해서 645년에 중국의 장한으로 귀국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현장 스님이 귀국하는 과정이나 또 중국에서 인도까지 가는 과정이라는 것은 고난 그 자체였을 것이다. 중국에서 인도를 가자면 엄청나게 험난한 천산 산맥을 넘어야하는데, 탐험가들이 그 산맥을 점령한 일이 얼마 안된다는 것만 보아도 그 산맥이 얼마나 험악한지를 잘 알 수 있다.

중국과 인도 사이에는 엄청난 산맥들이 즐비해 있고 험난한 길이라서 보통 2~3년은 족히 되는 여정이다. 또한 옛날에는 말을 타고 가다가 말이 죽어서 쓰러지면 또 다른 말을 빌려서 타고 가야 되는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한 시기에 현장 스님이 그 머나먼 길을 떠나 인도에 가서 그렇게 장시간 동안 공부를 하고, 또 산스크리트 원본을 다 가지고 AD 645년에 장한에 돌아와서 약 4년 후에 반야심경이 번역되어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후세인들은 현장 스님께 감사드려야 할 일이다.

AD 600년을 기점으로 했을 때 645년 그러니까 이분이 45세 때 반야심경을 번역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다 하려면 일 년이 지나도 못 다 할 것이다. 그러나 우선 연대가 기본적으로 중요하니까, 그런 시대에서 이분이 살았었고 온힘을 기울여 번역을 했다 하는 것을 잠깐 짚어보았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 먼저 제목부터 살펴보자.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반야심경의 제목은 이렇게 되어 있다. 여기서 마하라는 말은 ‘크다’라는 말인데 이것을 그냥 큰대(大)자로 하면 대반야바라밀다심경이 된다. 그런데 경은 산스크리트어로 수트라라고 하지만 원래 원어(原語)로는 경이라는 말이 없었다고 한다.

현장 스님이 번역을 할 때 경이라고 붙였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반야심경의 원본은 산스크리트어로 되어 있었다. 일본 법륭사에 오로지 세계에서 유일하게 그 산스크리트 원본의 사본이 현재까지 남아 있어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일본의 나까무라 하지메 선생이 이 반야심경을 학문적으로 오래 연구해서 번역해 냈는데, 대개가 지금까지 반야심경의 모델은 나까무라 하지메의 반야심경과 금강반야경의 번역을 모델로 하는 것이 하나의 상식으로 되어 있다.

일본에 있는 반야심경은 오노이라는 일본 사람이 중국에 갔다가 609년에 가져왔다는 설이 있고, 서양의 뮐러 같은 학자는 800년대에 중국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주장한기도 한다. 그리래서 그것의 연대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체적으로 609년에 중국으로부터 일본에 사본이 건너간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 원본은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다만 돈황에서 그 음역된 것을 영국 사람이 발견해서 지금 영국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이 한문 반야심경은 근본적으로 현장이 번역한 것인데, 이것은 일종의 산스크리트어를 한문으로 번역한 번역본으로서 일본에 있는 원전의 번역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물론 근본적인 사상의 차이는 없다 하더라도 그 당시 사람들이 산스크리트 원어에 대한 공부가 충분하지 않았다는 것을 예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장 스님의 인도 구법의 기간이 햇수로는 16년이 되지만 가고 오는 시간을 삼사년 잡으면 약 11년이나 12년 정도 인도에서 공부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반야심경을 포함해서 다른 경전들을 번역한 것을 보면 현장 스님은 천재 중의 천재라고 할 수 있다.

한문이 갖는 문화, 즉 중국은 유교나 도교와 같은 방대한 문화를 갖고 있었다. 따라서 어떤 면에서는 한문 경전이 더 높은 차원의 의미를 함축하기도 한다. 그래서 극동권의 불교가 오히려 더 찬란하다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거기에는 오역도 있어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그 사상내용은 대동소이하다.

그런데 범어의 반야(般若, Praiñā)라는 말은 지혜라는 말이고, 바라밀다라는 말은 바라(Pāra)는 피안을 그리고 밀다(mitā)는 도달한이라는 과거형으로 번역하는 경우가 있는데, 대개가 바라밀은 ‘피안에 도달한’이라 해석하고, ‘다’를 상태라고 해서 피안에 도달한 상태라고 해석한다.

그래서 바라밀다는 한문으로 도피안(到彼岸)이라고 번역되어 있거나 또는 지도(智度)라고 번역되어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이것이 하나의 문학적인 해석임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피안이라는 말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아닌 이 세상의 저쪽을 말한다. 생로병사가 잇는 이 세상에서 저 언덕 너머의 피안, 현실을 넘어선 저편, 저 언덕 너머에 도달했다는 과거형으로서 바로 지혜로 가득찬 저 언덕 너머로 도달했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브라쥬냐 즉 반야는 지혜라는 말이요, 그 다음에 바라밀다는 피안에 도달했으므로, 이 세상이 아니고 지혜로 가득찬 저쪽 피안에 도착했으므로 완성된 것을 EMt한다. 그래서 학자들은 반야바라밀다를 지혜의 완성이라고 번역한다.

그러면 지혜의 완성을 했는데 여기에 왜 심(心)이 나오는가. 이 마음 심자는 그냥 마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여기서 심(心)은 흐리따야라는 산수크리트어를 번역한 것으로서 원래 흐리따야는 심장, 또는 정수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이다.

고대 사람들에게 있어서 심장은 생명 자체를 일컫는 것이다. 사람이 탄생해서 살았다 하는 것은 심장이 뛰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심장이 멈췄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지금은 사망진단서를 뗄 때, 심장이 멎었을 경우 의사들이 산소호흡기를 갖다대도 심장이 멎었으면 죽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심장이라는 것은 생명 중의 생명, 생명의 원천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반야심경에서의 심(心)은 그냥 마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이 심경이라는 것은 생명의 근원적인 하나의 정수(精髓)이다. 지혜의 완성은 궁극적으로 그것 자체가 우리의 정신을 통해서 되는 것이지만, 그보다 여기서는 심장과도 같은 생명의 핵심이 되는 경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그 다음 대목을 읽어보면, 관자재보살이(관자재보살이 주어가 된다) 행심 반야바라밀다시, 반야바라밀다를 깊이 행할 때에 그런데 여기서 관자재보살이 누구인가 궁금할 것이다.

보살은 보디삿트바라(Bhodhisattva)는 산스크리트어의 음역이다. 보디는 지혜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삿트바는 중생이라는 뜻이 있다. 이 보디삿트바를 번역하자면 구도자, 도를 닦는 사람, 도를 구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의 관자재보살은 근원적인 예지를 체득하여 중생을 구제하는데 자유자재로운 보살이라는 뜻이 있다. 그러므로 관자재보살은 굉장히 많은 수행을 해서 부처님 다음 자리에 속하는 위치까지 올라간 그런 보살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부처님은 여기 반야심경에서 자기 자신은 절대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반야바라밀다의 연출자이기 때문이다. 무대에는 배우들이 나가지 연출자가 직접 나가지 않는다.

그렇게 반야심경을 하나의 드라마로 보면 부처님은 배후에서 관자재보살과 10대제자의 한 사람인 사리자(사라불) 스님을 등장시켜 놓았다. 즉 두 배우를 등장시켜 이 드라마를 엮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사라자는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는다. 단지 사리자는 질문만 하고 모든 말은 관자재보살이 하고 있다. 그런데 이 관자재보살이라고 하는 주인공을 나습은 관세음보살이라고 번역하였다. 관세음보살은 『법화경』「관세음보살 보문품」에 나오는 보살이다.

흔히 관음경이라고 하는 이 경에 의하면, 관세음보살을 일심으로 칭명하면 관세음보살이 그 소리를 듣자마자 소원을 성취하게 해주고 자유롭게 해준다고 한다. 말하자면 관세음보살이라 함은 나습에 의해 좀더 예술적으로 아름답게 번역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