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두려움

보리수 그늘

2009-08-02     관리자

「……내가 단지를 하는 것을 보시면 어머님이 마음 아파하실 것이 두려워서 단지 대신에 내 넓적다리의 살을 한 점 베어서 피를 받아 아버지의 입에 흘려 넣고 살을 불에 구워서 약이라고 하여 아버지가 잡수시게 하였다. 그래도 시원한 효험이 없는 것을 피와 살의 분량이 적은 것인듯 하기로 나는 다시 칼을 들어서 먼저 번보다 더 크게 살을 떼리라 하고 어썩 뜨기는 떴으나 떼어내자니 몹시 아파서 베어만 놓고 떼지는 못하였다 단지와 할고(割股)는 효자나 할 것이지 나 같은 불효로는 못할 것이라고 자탄하였다……」白帆逸志 중에서-

 우리는 이 대목에서 한 인간과 만난다. 전기적(傳奇的) 인간이 아니고, 미화된 인간이 아닌 한 성실한 인간의 내면과 접하는 훈훈함을 맛보는 것이다. 그는 임종하는 부친을 위해 넓적다리를 베기는 했으나 차마 아픔으로 떼어내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탄하지 않았던가. 자기 같은 불효로서는 하지 못할 일이었다고-
 이때가 백범의 나이 30, 아직은 장가 전으로 궁색한 노총각이었던 가난한 시골 훈장(?)의 시절이었다. 이런 그가 점차 사회적으로 성숙해져, 민족의 지도자로, 국민의 아버지로 추앙받으며 격동하는 시대의 시련을 겪어가며 바지랑대처럼 꿋꿋하게 의기를 지켜온 힘은 어디에 있을까?

 또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그는 빼앗긴 시대의 산하를 편력한 야생마였다. 결코 일제도 그를 길들이지 못했다. 그는 시대가 가진 마지막 통곡의 벽이었으며 잠자는 민족의 자존심을 일깨워주기 위해 침묵의 <님>을 노래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 빛을 깨치고 단풍 나무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만은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님의 沈黙> 중에서-

 당시의 조선불교는 박한영(朴 漢永), 진진응(陳 震應),송 만공(宋 滿空)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조선총독부의 사찰령(寺刹令)에 입각해서 어용화 되었다. 소위 31본산제가 그것이다. 조선 불교를 대표하는 31본산 주지 대회의에 나가 그들을 내려다보고 만해는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하고 큰 소리로 물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숙연할 따름이었다
『그러면 내가 묻고 내가 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일 더러운 것이 똥입니다, 똥……그런데 똥보다 더 더러운 곳이 무엇인가? 그것은 송장 썩는 것이요……송장 썩는 것보다 더 더러운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31본산 주지 네놈들이다!』

 이것이 만해가 태고종 대법당에서 한 설법의 전부였다. 일제비호의 불교체제로 감투와 돈을 얻은 주지 자신들의 치부를 찌른 것이다. 그런데 당시 황민화(皇民化) 실천운동을 역설한 강연회에서 정씨의 작품을 보자.
「사람들은 선구자를 조롱하고 욕보이고 증오하지만
다음세대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하리로다
밤이여 어찌 승천하는 아침 해를 누를 수 있겠는가
산의 적설이 어찌 봄의 명령을 거슬리겠는가.」

 丁氏는 당시 사회적으로 저명한 인사였고 그래서 저들은 그를 이용할 가치가 있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앞에 열거한 모두는 같은 역사의 단절기에 처해 있었고 같은 암흑기의 곤욕에서 몸부림치던 사람들이다.

 우리는 왜 역사의 두려움 앞에 경배하는가? 오늘만이 아니라 내일이 더욱 두렵다는 생각이야말로 역사의 인식이 아닐까.* (극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