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은 자기실현의 장

직장인의 불교신앙

2009-08-02     관리자

  ○불자는 영광의 주인공

 우리는 모두 불자다. 불자란 여래의 무한 공덕을 남김없이 부여받고 있는 영광의 주인공을 말한다. 이루 헤아리기 어려운 도전 속에서 어두움과 불안에 허덕이던 직장인들이 일단 불문(佛門)에 들어와서 자기들이 불자라는 자각을 얻고 자기의 역량에 한계가 없음을 믿게 될 때 모든 어두움과 답답함은 깨끗이 사라지고 자신과 용기가 용솟음치게 됨을 알게 된다.

 여래의 공덕은 실로 무한대 그것이다. 무한대의 공덕 앞에 장애될 자 없음은 당연한 것이다. 첫째로 여래는 무한의 광명이시다. 그 광명은 우주에 두루하여 있는 광명이다, 예부터 <광명변조(光明遍照)>라고 일러오고 있다. 광명변조이신 여래의 무한 광명이 불자에게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다. 불자는 무한 광명을 그 뜻대로 써 갈 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불자의 앞을 어둡게 할 어두움이 결코 있을 수 없다. 불자에게서 어두움은 이미 없어진 지 오래인 것이다. 불자가 있는 곳은 곧 광명천지이다. 그러므로 불자에게 있어서 용납 못할 환경은 이미 없어진지 오래이다. 직장이 그렇고 그 사회가 그렇고 그 나라가 그렇다. 불자는 결코 그 환경을 나무라지 않는 것이다.

 까닭에 결코 병들 수 없고, 피곤할 수 없고, 마침내 죽어질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무한 생명의 주인인 불자는 그러한 까닭에 어떠한 환경에서도 생명의 위험을 받음이 없이 절대 자유의 생명력을 발휘할 권능을 부여받고 있는 것이다. 물질적 조건이 어떠하든 불자의 근본 생명에 터럭만큼도 영향을 주지 않는 까닭에 불자는 공포심으로부터 완전 해방된다. 그리하여 그의 생활 목표는 이미 자기 생존을 위한 작은 단계는 뛰어 넘고 일체 중생의 이익만이 그의 행동 원인이 되는 것이다.

 여래는 무한의 지혜이시다. 여래는 대우주의 진리 그 자체인 까닭에 세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무엇이 되었건 여래의 지혜로 해결되지 아니할 문제는 없는 것이다. 유한적 대립적 두뇌작용으로는 절망적인 상황이라 판단되어도 그러한 여래의 지혜로는 모두 원만히 해결된다. 아무리 엉키고 답답한 문제라도 여래의 지혜 앞에서는 손쉽게 풀려간다. 여래의 무한 지혜는 이미 모든 불자의 내면세계에 남김없이 두루하여 있다.

  ○불자는 모든 문제를 자신 있게 처리한다.

 그러므로 직장에 근무하는 불자들은 자기가 당면한 어려운 문제로 당황하거나 좌절하지 아니한다. 여래의 무한 지혜가 자신에게서 그대로 살아나오도록 끊임없이 기원하는 까닭에 그로서는 어떠한 문제도 결코 저주스러운 것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여겨진다. 문제 하나를 원만히 풀었을 때 그는 여래와 함께 있는 자기를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래는 무한의 역량이시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불가능이 없다. 여래의 무한 역량을 마음껏 쓸 수 있는 불자에게 있어서 불가능이 부정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직장 생활은 다양한 재능과 풍부한 능력을 요구한다. 불자의 능력은 이미 무한 능력이다. 그러므로 불자는 자기에게 맡겨진 책임을 회피하는 법이 없다. 자기 앞에 놓인 일을 불행하다거나 남들의 능력 없음을 나무라거나 작업 조건 좋지 않음을 이유로 내세워 업무 수행을 게을리 하는 등의 일을 저지르지 아니한다. 무슨 일이고 자신 있게 처리한다.

  ○우리는 佛世界에 산다.

 여래는 무한의 자비이시다. 무한의 자비이신 여래에게 <버려진 중생>은 있을 수 없다. 여래에게는 <제도 불가능의 중생>은 완전 영원히 부정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공덕을 이어받은 우리 불자의 인간관계는 어느 때나 원만하다. 불자에게 있어서는, <나는 저 사람하고는 도저히 같이 지낼 수 없다>는 말이 나올 여지가 없다. 어떠한 모양을 가진 중생이든, 어떠한 성격과 생활 습성을 가진 중생이든, 그리고 아무리 나쁜 행동을 하는 중생이든, 그 모든 중생은 여래의 자비 앞에서 제도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놈은 나쁜 놈이다> <저 놈은 어떻게 다룰 도리가 없다.> <저 사람은 내버린 사람이다.>라는 등의 저주를 받을 중생은 불자에게서 결코 발견될 수 없다. 불자와 함께 사는 가족, 친지, 그리고 직장의 상사와 부하 및 동료들은 이미 부처님의 무한 자비의 품에 있는 까닭에 그 모두를 끝없이 축복할지언정 어느 중생과도 다투거나 헐뜯거나 저주하는 일이 없다.

 여래의 무한 자비는 불자에게 무한의 번영을 가능케 하여준다. 여래는 무한 자비로 중생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아낌없이 공급하고 계신 것이다. 중생들의 어두운 눈에는 물질세계가 따로 있는 것으로 보이고, 그 물질세계는 유한의 세계인 까닭에 한정된 물자의 점유를 에워싸고 인간들은 생존 경쟁을 벌여야 하는 것으로 믿으며 사는 것이 중생이다. 그러나 여래의 무한공덕장 세계와 별도로 물질세계가 존재하고 있진 아니하다. 물질세계가 독자적으로 그 자체의 존재 원리를 가지고 존재하고 있지 아니한 것이다. 있는 것은 불세계 뿐이다.

 그러한 까닭에 중생의 일용을 흡족 시킨 물자는 실은 물질이 아니라 여래의 자비가 구체적으로 나타난 모습인 것이다. 여래로부터의 공급에 한계가 없는 것이므로 불자에게는 여래의 무한 공급이 보장되어 있다. 불자는 그의 생활이 일체 중생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것인 한 그리고 자진해서 거부하지 아니하는 한 여래로부터의 무한 공급으로 무한의 번영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불자가 누리는 번영은 결코 그의 육신 생활의 안이나 향락을 위함이 아니요 중생에게 이익되는 삶에 활용키 위한 부인 까닭에 결코 사양하거나 죄악시하거나 거부할 필요가 없다. 사업을 끊임없이 성장시켜 대작불사(大作佛事)를 해가야 한다.

  ○불자는 자기 실현으로 모든 사람에게 이익을...

 불문에 들기 전에 직장인들은 불만과 쫓김에서 헤매인다. 그러나 불자임이 확인될 때 모든 어두움이 사라지고 기쁨에 찬 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의 본질을 정확하게 인식하게 되기 때문이다. <마하반야바라밀>의 염송은 이와 같은 자기 인식을 자신에게 완전히 심어 준다. 염송을 통하여 자기가 불자임을 확신하게 된다. 불자의 수행은 자기 본질의 확인의 과정이다. 불자들은 끊임없는 수행으로 자기의 생명의 뿌리가 여래에게 내려져 있음을 확인하여 그 생명의 힘을 구김 없이 써간다.

 불자에게 있어서 직장은 곧 자기실현의 장이다. 불자가 직장에서 실현해야 할 자기는 어떠한 자기인가? 실패와 무능과 다툼과 공포와 불안과 구속과 빈곤과 병고로 인하여 허덕이는 자기는 결코 아니다. 불자의 참 자기는 무한의 축복을 받는 여래의 승계자로서의 자기이다. 그러므로 불자의 직장 생활은 그 자체가 바로 이 무한자로서의 자기실현이라 보아야 한다.

 <마하반야바라밀다가 구르는 곳에 일체 고가 없어지며, 일체의 장애가 타파되며 삼악도가 없어진다. 광명천지가 열리고 일체 소원이 성취되며 자재해탈을 얻게 된다. 일체 불보살과 함께 하게 되어 그 위신력을 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과 보살은 생각마다 항상 마하반야바라밀을 힘차게 염송하는 것이다.> (불광요전 P.21)
직장의 불자는 자기를 실현하며 나라와 백성을 이익하게 하고 직장을 번영하게 할 무상의 보배들인 것이다.* (불광법회 회장 원각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