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의 세계] 능엄경과 여래장

특별기획; 능엄경의 세계

2009-08-02     관리자

 여래장(如來藏)이란 단어는 대승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어, 대승불교의 특징인 양 느껴지기도 하거니와 능엄경(棱嚴經)에서와 같이 구체적으로 설명된 곳도 드물지 않을까 생각된다. 불교사전에 의하면 여래장은 미계(迷界)에 있는 진여라고 풀이 하였고 당의 규봉(圭峰)은 <원각경(圓覺經) 소>에서, 덮이어 있기도 하고 포함하기도 하므로 여래장이라 한다 하였다. 어쨌든 중생들의 미망 그대로가 여래장을 가리우고 나타난 현상이며, 삼세의 불보살이 모두 여래장을 구현하신 분이라는 것이 모든 경전에서의 주장이다.

 능엄경 제 2권 끝부분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진실로 생멸거래(生滅去來)가 본래 여래장의, 상주하고 묘명하며 동하지 않고 두루 원만한 묘한 진여의 성품인 줄을 알지 못하는구나! 성의 진상한 중에서는 거래와 미오와 생사를 구하여도 조금도 얻을 수 없느니라.』 생멸, 거래, 미오 등 상대적인 법은 끝없이 많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가 여래장에서 근거한 것이요, 그 밖에 딴 원인이 있어 생긴 것이 아니라 하신다. 그렇다고 이모든 현상 위에서 여래장의 정체를 찾아내려 한다면 그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여래장은 원래 이런 상대적인 것이 아니므로 이런 현상 위에서 그의 정체를 찾아내기란 매우 어려운 것이다.

 이런 경지는 각고한 수행과 명석한 깨달음이 있어야 얻어지는 것이다. 이경의 대기(對機;대담자)인 아난존자는 부처님의 경전을 많이 기억하기로 으뜸가는 분이건만 경 첫 머리에서 그가 하찮은 마등가라는 음녀에게 홀려 갈팡질팡 한 끝에 다시 정신을 차려 부처님 앞에 나와 이렇게 여쭙는다.
『지식만을 숭상하고 도력이 없었기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르렀사오니, 부처님들께서 성불하신 궤도인 사마타와 삼마와 선나의 첫 방편을 보여 주소서.』

 이런 간청에 의해 전개된 이 경은 결국 여래장의 정체를 인식시키기 위한 것이 그 주안점이라 할 수 있으니, 그 서술방법은 자못 간곡하다 하겠다. 때로는 여래장, 때로는 진견(眞見), 때로는 묘명(妙明)등 다양한 명칭을 붙이셨으니, 외계의 사물에 끄달리는 망견과는 다르므로 진견이라 하고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변함이 없으므로 묘명이라 하고, 모든 법의 근본이 되므로 진성(眞性)이라 하였다.

 본래부터 이렇게 당당한 여래장의 소유자인 중생이 어찌하여 윤회의 고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본래가 원륭한 여래장 하나뿐이었다면 어찌하여 울퉁불퉁한 산하대지가 생겨 서로 용납하지 못하는가? 그 원인으로서 이 경에서는 한 생각의 미망(迷妄)을 들어 보이셨다. 한 생각의 미망, 이것은 끝없는 옛적 언제부터인가 생긴 것으로서 마치 초롱초롱한 눈에 언제부터인가 모르게 시작된 졸음과도 같이 생겨나서 차츰 그 농도를 짙게 하여 가까이는 몸과 마음을 이루고, 멀게는 산하대지의 현격한 차별을 형성하였다고 가르치신다.
그러므로 청정본연(淸淨本然)한 여래장의 경지를 체험하려는 이는 먼저 이 미망의 정체를 알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미망의 잠을 깨어야 된다고 하신다.

 꿈속에 겪는 온갖 희비애락이 모두가 꿈이기에 그를 벗어나려면 잠을 깨어야 되고, 잠을 깬 뒤에야 자기가 잠들어 있었음을 알게 되나니, 오직 잠을 깨었느냐 깨지 못하였느냐에 따라 다를지언정 본래의 인격에는 변함이 없듯이 중생과 부처의 차이도 그렇다고 하신다.
『부루나야, 너는 색과 공으로서 여래장에서 밀고 당기기 때문에 여래장도 따라서 색과 공등이 되거니와 (중략) 나는 묘명하고 생멸치 않음으로써 여래장에 합하므로써 여래장이 오직 묘각명(妙覺明)이어서 법계에 두루하느니라.』

 이토록 찌들은 미망 때문에 우리들의 세계에서는 나와 네가 화합할 수 없고 크고 작음이 서로 용납할 수 없어, 자기가 처한 옹색한 장벽을 벗어나지 못하나니, 이를 일러 <가엾은 무리라 >하신다. 이 가엾은 무리가 하루 속히 자신의 여래장을 재발견하여 넓고 즐거운 열반의 경지에로 들어 갈 수 있는 방법으로 제 五권에서 관세음보살의 원통법문을 보여 주신다.

 관세음보살은 지난 세상 관세음불(觀世音佛)을 만나 그의 가르치심을 따라 삼마지에 들어갔던 일을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처음 듣는 가운데서 흐름(流)에 들어 대상(所)을 벗어나고, 대상과 들어갔다는 것마저 고요해져서 시끄러움과 조용함, 두 모습이 전혀 생기지 않게 되었으며, 이와 같이 더욱 전진하여 듣는 주체와 들을 대상이 다하고, 듣는 주체가 없어졌다는 데도 머물지 않아…… 적멸이 앞에 나타났다.』
그렇다!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는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듣는 주인공의 정체까지를 포착해서 혼연히 둘 아닌 경지에 이르렀을 때 좋고 나쁜 현상계의 눈언저리에서 벗어나게 된다.

 어느 철인은 [혼자 있을 때만이 그대 전체를 차지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자기의 듣는 성품을 돌이켜 듣고, 그의 정체를 포착하기에 별다른 힘이 들지 않게 거기가 바로 적멸이며 여래장인 것이다. 아직까지 소리는 귀라야 들을 수 있고 냄새는 코로만 맡을 수 있다고 생각하던 고집이 사라져서, 그 본래의 출발점인 여래장 위에서 눈으로도 들을 수 있고 귀로도 말할 수 있는 경지가 나타난다 하셨다. 과연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들의 생활은 훨씬 자유롭고 평안할 것이다. 사촌이 논을 산다고 해서 배를 앓는 일도 없을 것이요, 내 밥의 콩알이 적다고 해서 투정하는 괴로움도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내 것은 내 것이요, 네 것은 네 것이란 관념 속에 살아왔다. 이 관념은 어느덧 제이의 천성으로 굳어져서 내 것을 네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불속에서 물을 구하는 이상으로 절대 금지조항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원통을 얻은 성자의 경지는 그렇지가 않은가보다. 관세음 보살은 그 인행 때 중생들이 필요로 하는 일은 모두 따라주셨다고 술회하고 있다. 자기 소유의 물건, 육체, 정신에 이르기까지 모두를 가지고 중생을 위해 사는 것이 곧 자기를 위하는 것이란 신념으로 살아 가셨다고도 진술했다.

 그러므로 지혜 제일 문수사리법왕자는 제 육권에 나오셔서 이렇게 찬탄의 말씀을 하신다.

말세의 중생으로서
세상 벗어나는 법을 구하는 이를 도와
열반의 경지에 이르르게 하는 길은
관세음보살의 방편이 으뜸입니다.
신비로운 여래장 앞에
머리 숙여 예경하오니
말세의 중생들 보살피시와
이 법문에 의혹이 없게 하소서


말세에 태어나 말세를 개탄하고 있는 우리들은 이 가르침에 따라 자신의 삶을 더욱 윤택하게 가꾸어야 할 것이다.*
(스님. 서울 봉선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