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두 스님의 생애와 사상 (3)

최근세 불교의선구자 : 石顚 스님의 生涯와 思想(3)

2009-07-31     목정배

지계정신 特戒精神

종교의 생명은 계율에 있다. 계율을 구속적인 법률이라고 생각하면 종교의 깊이를 타기하게 된다. 종교는 엄격한 계율이 지켜지는가 지켜지지 않는가에 따라 교단의 조직, 교단의 엄숙성, 교단의 질서를 찾아보게 된다.
지율(持律)이 없는 것은 방약 무도한 온갖 행화가 야기되어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자기가 담고 있는 교단을 흐리게 한다.

소승적 수행 방법에 의하면 계율은 지엄하게 지켜져야 하지만 대승 불교에는 계율이란 허울의 굴레를 벗어나도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계율의 자연성을 잘 알지 못하고 계율의 구속성만 성급하게 내다보고 하는 말일 것이다.
계율은 순리대로 사는 지루한 법칙을 이해하는 것이다. 계율을 구속이나 억압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질서, 불합리하게 살려는 투지인 것이다.

이조 시대 한국불교계에 지나친 선사상이 전해져 무애행(無碍行 )이 곧 대승적 보살 사상이라고 왜곡하게 이해하고 파행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많아 석전스님은 개탄하였다.

견성하면 무애행으로 나가도 된다고 오인하고 있는 것을 고치려고 무척이나 애를 쓰신 분이다.

한영스님은 백파(白坡)스님의 지율정신을 계승하였음은 물론 당시 잘못 알고 있는 선가의 수도자, 그릇된 무애행자를 질타하는 글을 석림수필(石林隨筆)에서 엿볼 수 있다. 위산(潙山)스님이 앙산스님에게 한 말인데, <자네의 안정(眼正)을 귀히 여기는 것이지 자네의 행리(行履)는 말하지 않는다.>라고 한 것이 잘못 인식되고 와전된 것이라고 하였다.

수도인은 수도의 구경처(九京處)가 깨달음, 지혜의 완성만이 중요한 것이지 그 행위, 그 생활이 어떠한 것이라도 옳은 것이라도 하는 것은 참으로 큰 잘못이라고 한 것이다.

깨달음 뒤에도 수행이 따라야(悟後修)하는 것이지 견성 다음에는 무애행이라도 상관되지 않는다고 한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무애(無碍)라는 말을 음미하여 보자 무애라고 하는 것이 걸림 없다, 장애가 없다 방해되지 않는다, 이런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걸림 없다고 하는 것은 빛이 온 우주를 두루 막힘없이 직진하는 것을 말하고 우주의 움직임이 어느 힘에 의하여 거역되거나 거부됨이 없이 본래의 면목을 그대로 드러내는 실상의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사무애(事事無碍 )가되고 이사무애(理事無碍)가되는 것이다. 인간이 무애행을 한다는 것은 진리의 당체, 보살의 보처에 오르지 아니하면 불가능한 것이다. 무위도식(無爲徒食), 막행막식(莫行莫食) 이러한 부도덕하고 몰 윤리적인 일들을 무애행이라고 한다면 망발이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석전스님은 앞서의 수필에서 불설행리(不設行履)가 불귀행리(不貴行履)로 와전되어 살. 도. 음. 망(殺盜婬妄)의 네 가지 바라이 죄가 무애행으로 자행되었다고 하였다.

깨달음의 안목이 중요한 것이지 그 행리가 귀중한 것이 아니다. 不貴行履라고 되었을 때 어디 지율 지계의 정신이 살 수 있게 되는가, 不說이 不貴로 된 것은 큰 잘못인 것이다. 그리하여 스님은 염송에서 그 잘못된 부분을 찾아내어 밝히고 있다.

앞서에서 말하였듯이 인간은 어디에 얽매여 살기를 싫어한다. 마음대로 살려는 생각이 앞서고 있지만, 마음대로라고 하는 것은 우주의 법대로, 진리대로라는 뜻이라고 본다.

사람들은 본래의 마음은 깨닫지 아니하고 자기가 알고 있는 것, 자기만이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살려고 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은 자기만의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살 수 있게 되도록 하는 모든 환경과 관계되어야 한다. 자기 삶의 극대화 자유화와 상호상보적 관계를 맺지 아니하면 안된다.

연기의 실상이 무애적 형태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지 자기의 삶이나 의지가 앞서면 안되는 것이다.
나의 실상은 남의 실상에 거슬리지 않고 나와 남이 다 함께 공존할 수 있는 여법 여행의 경지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나는 일체의 지자(智者), 일체의 승자(勝者)라고 하는 것은 지혜와 행위를 최고의 경지에 올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두 가지가 함께 갖추지 아니하면 무애의 행과가 나올 수 없는 것이다, 깨달은 다음에는 그 행동이 어떻게 되더라도 아무런 과보를 받지 않는 다고 한 것은 큰 잘못이 아닐 수 없다.

석전스님은 견성한 후에도 계속적인 수행이 뒷받침하지 아니하면 수도자의 길이 아니라고 하였다.
오늘날 우리 불교가 안고 있는 많은 폐단중의 하나는 계율을 세속적인 방편으로 이해하려는 속셈이 큰 것에 비롯한다.

대승보살계는 사회생활에 알맞은 합당한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이 많다. 대승보살계야말로 소승적인 사분율의 계목을 더 적극적으로 이행한 것이다. 원효스님의 계관을 막행막식이라고 무애의 극치처럼 찬양하는 경우도 있다. 원효스님이 파계의 행위를 일생 참회하고 자기 비하, 자기학대를 한 시기가 구도의 시기보다 더 비극적으로 묘사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무애행, 그것은 마음대로의 행위가 아니다. 무애행은 진리에 계합한 인간 본원의 행동이 되어야 한다.
석전스님이 본질적인 무애행을 계율을 수지하고 계율을 바탕으로 한 생활에서 찾으려고 노력한 것은 한국불교의 장래를 내다본 가르침이었다고 오늘날 우리 교단의 생태를 각성케 할 위대한 설계가 아니었던가?

우리들은 계율의 속성이 구속이 아니라 해탈 자유에 이끄는 위대한 속박인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위대한 속박이란 자재와 자율을 의미한 수행인의 지름길이 됨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