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여적] 문명과 종교

書齋餘滴

2009-07-31     최인훈

옛날 사람들은 자연을 뚜렷이 보고 느끼면서 살 수 밖에 없었다. 자연에 대한 가공(加工)의 힘이 대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도 자연이라는 것을 몸으로 알고 있었다.

자연에 대해 가공하는 힘이 늘어나면서 사람과 자연 사이에는 인공의 자연이 막아서게 된다. 이렇게 되면 사람의 눈에는 원래의 자연이 보이지 않게 될 뿐만 아니 자기 자신도 보이지 않게 된다. 자연의 한 부분인 자기를 소박하게 받아들이는 대신에 자연에 대해서 이러저러한 견해를 가진 자기-즉 인공화된 자기만이 보이게 된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태양의 장엄함에 대한 신선한 감격을 잃어버림과 동시에 자기 자신의 신비함에 대한 신선한 느낌도 잃어버린다. 옛날 사람들은 모두 자기를 알기를, 지금 이 세상에서의 자기의 겉보기 보다는 훨씬 존엄하고 신비한 뿌리를 가진 존재로 알았다. 지금의 우리는 그러지 못한 것이 예사가 되었다.

돈이라든지 권력 이라든지를 사람의 값의 마지막 기준으로 안다. 옛날 사람들은 죽은 다음의 세상에 대해서도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의 우리는 그렇지 않다.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는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불안하고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있다. 이렇게 된 것은 우리가 뿌리와 가지에 대해 거꾸로 생각하는데서 비롯한 현상이다.

자기가 뿌리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인간의 힘이라는 것은 언제나 그 뿌리를 존중할 때에만 얻어지고 가지는 뿌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에만 마음의 근본적 평화가 얻어진다는 것을 말해 온 것이 종교다.

종교가 지니게 마련인 겉보기의 비유를 진지하게 해석한다면 어떤 종교나 결국 자연으로 돌아가기를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몽매함으로 돌아간다거나, 불편한 생활로 돌아가자는 것일 수는 없다.

인간의 문명도 자연 속에서의 자연에 대한 가공이기 때문에 주어진 자연을 파괴하지 않는 가공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살아있는 인간은 100년도 못사는 낱낱의 구체적 개인이기 때문에 - 즉 수십 년을 살고는 자연으로 돌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러한 조건에 맞지 않는 억지의 요구나 욕망- 즉 사람 한사람이 몇 백 년 살면 가능하기나 할- 그런 요구나 욕망을 남에게 짊어지우거나 자기가 만들어서 자기를 괴롭혀서는 안된다는 것이 모든 종교의 가르침이다.

옛날 사람들이 소박하기 때문에 쉽게 받아들였던 진리를 우리는 문명이라는 것 때문에 도리어 받아들이기 어렵게 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도 우리는 종교의 근본적 슬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인류가 발생하고부터 50만년이나 지나면서 자연에 대한 가공기술은 엄청나게 발전했지만, 인간의 수명은 조금도 발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달 로케트에 타고 있는 인간의 육체는 50만년 전의 조상과 마찬가지로 6,70년의 수명밖에 없는 그 심장을 가졌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