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구도발표] 부처님께 받은 등불이야기

불광 구도발표

2009-07-31     대지행

󰊱 부처님 등불을 받다
부처님은 중생의 어두운 마음을 밝혀 주십니다. 세간의 미혹의 어둠을 깨트려 주십니다. 그리고 미혹에 싸여서 고통 받는 중생들을 모두 밝게 씻어 주십니다. 부처님을 밝은 빛에 비유하고 부처님은 세상을 밝힌 등불이라고 하신 말씀이 잘 이해가 갑니다. 저는 부처님 공부를 얼마 하지 않았어도 수많은 부처님 은혜를 입었습니다. 어두운 마음을 밝혀 주셨고 어두운 길을 밝혀서 드러내 주셨고 고통 받는 제 마음을 밝게 씻어 주셨습니다. 저는 70여 생애를 살면서 한 여자로서 크게 한 일은 없고 삼남매를 키우고 부처님 법 믿으면서 자녀들에게 불법 믿음을 전해준 것만이 오직 내 놓을 수 있는 모두라고 생각 되어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인생이란 적지 않은 파란이 있는 것이지만 저는 부처님을 믿어서 그 어려움을 잘 견뎌 왔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적는 것이 부끄럽기는 하지만 부처님께서 언제나 밝은 저와 같이 수행이 부족한 사람에게까지도 등불을 비추어 준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어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몇 자 적는 바입니다.

󰊲 식구 같은 부처님
저는 불법 믿는 집안에 출가하면서 불법에 대한 교육을 받은 것 없어도 부처님에 대한 믿음이 싹터 갔습니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이라면 법회도 잇고 책도 있어서 불법 공부할 수도 있지만 저희들 때에는 그런 것을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부처님은 성인이시고 도통하신 분이시고 자비하신 분이시다. 모든 중생을 구제해 주시는 크신 어른이시다.] 이렇게만 알고 지냈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에서 부처님, 부처님 하고 지내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러는 중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부처님, 부처님 하면서 호소했습니다. 이 어려움을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이 어려움 속에서 벗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하는 소원을 세우고 부처님, 부처님 하고 마음에서 기원하였습니다. 또, 아이들에 관해서도 어떻게 할까 분간할 수 없을 그런 때는 마치 윗어른께 여쭈어 보듯 부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 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하고 일심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면 반드시 해답이 있었습니다. 꿈에 어떤 스님이 나타나실 때도 있고 혹은 흰 옷을 입은 성인께서 나타나셔서 가르쳐 주시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특별한 말씀이 없으실 때라고 그러한 꿈을 꾸고 나면 제 마음 나는 대로 처리하면 무슨 일이나 원만하게 되어 갔습니다. 마치 부처님이 저와 한 식구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어떤 때는 부모 형제와 같았고 때로는 의사였으며 때로는 스승이시고 어떤 때는 죄송스럽게도 친구였습니다. 그렇게 부처님을 믿고 의지하고 살아 왔습니다. 그렇지만 그 이상의 불법진리는 모르고 지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해방이 되고 六․二五가 났습니다.

󰊳 죽을 땅에서 살아나다
부처님의 은혜 받은 이야기로는 평양에서 나온 이야기를 하여야겠습니다.
해방되기 꼭 한 달 5일 전 일입니다. 내가 서울로 가야겠다는 생각에서 떠나니 저의 가까운 사람은 가지 말라고 만류 하였습니다. 또 아는 사람은 모두가, 고향 버리고 경성으로 간다고 흉을 보았습니다. 또 여러 가지 관계하던 일도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수다 스러울만치 내 등 뒤에 대고 말하는 것을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마음에 내키는게 있어서 다행했습니다. 그리고 한 달 남짓해서 해방에 되었습니다. 그 때 평양에 있던 친척들과 아는 사람들은 모두가 걸어서 말할 수 없는 고생을 겪으면서 월남해 왔습니다. 차에 편안히 타고 온 나를 비방하던 사람들이 걸어서 三八선을 넘어 온 것을 비교해 볼 때 부처님의 은혜를 어찌 다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六․二五 때 이야기를 하여야겠습니다. 六․二五가 나자 저는 부처님만을 믿고 부산으로 내려왔습니다. 어딜 가나 부처님만을 생각하니 비록 어려움이 있어도 고통을 모르고 어려움을 잘 빠져 나갈 수 있었습니다. 아들 형제를 무사히 지내게 할 것이 어미 되는 저의 소원인 것은 여러분도 짐작하실 것입니다. 부산 한복판에 일정 때 절 자리인데 해방 후에 대학으로 사용된 곳이 있습니다. 제가 갔을 때는 학생 전원이 모두 전쟁에 나가고 총장 송경영씨가 한 곁에서 영어 강습소를 경영하고 있었습니다. 저의 아들 형제는 그곳에 영어강사로 나가고 있었는데 후방에만 있을 수 없어 두 아들이 통역 시험에 응시했습니다. 모두가 군에 뽑혀 나가서 생사를 알 수 없이 지내게 되니 부모들이 울고불고 야단이었습니다. 부모 된 마음에 아들이 군에 가더라도 편안히 돌아오기를 기도했는데 바로 통역관으로 뽑히고 가까운 곳에 배속이 되어 한 달에 몇 차례씩 집에 다녀갔습니다. 그 때도 아들을 군에 보낼 것인가 하고 걱정하다가 부처님께 여쭈어 보았습니다. 부처님, 부처님 하고 기도하면서 부처님께서 바른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고 잠들었더니 꿈에 정장을 하신 스님이 나타나시어 법문을 하시고 또한 책을 주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성사가 있는 것이 저의 경험입니다.
저는 마음 놓고 두 아들을 통역 시험에 응시케 하였던 것입니다. 六․二五 전에 자부를 볼 인연도 없지 않았지만 부처님께 기도해서 때가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만약 결혼을 시켰던들 六․二五 동란 동안을 얼마나 더 많은 고생을 했어야 했는지 모릅니다. 부산 피난 당시 저의 주변 사람들은 저를 대단히 부러워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앞일을 알고 장성한 아들을 장가도 안 들이고 편히 피난살이를 잘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九․二八수복 때의 일입니다. 부산에서 서울이 수복되었다고 다들 기뻐하면서 서울로 올라가기에 바빴습니다. 저는 올라가는 사람들을 말렸습니다. [얻기 어려운 직장과 거처를 버리고 간다는 것은 안됩니다. 짐은 놔두고 여기서 한 三년 살다 갈 작정을 하라.]고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듣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모두가 피난살이 짐을 싸서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저도 더 춥기 전에 한 번 다녀올 생각으로 음력 十월十二일, 五일이나 걸려서 서울 사형 댁에 도착했습니다.
그 때는 아직 질서가 잡히지 않았는데도 김장거리나 그 밖의 생활필수품등 준비를 굉장히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러지 말고 부산으로 내려가시오. 물건 사들이지 말고 겨울은 부산에서 날 준비하시오.] 라고 권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코웃음치면서 [그놈들이 또 올라고? 여기는 사람이 없나? 나는 다시는 안가. 우리 아랫목이 제일이다……]제각기 말하면서 듣지 않았습니다. 저는 하룻밤을 묵고 다시 부산으로 내려왔습니다. 얼마 있다가 一․四후퇴라는 악몽이 닥쳐왔습니다. 사형은 별 수 없이 아들이 제二국민병으로 뽑혀 오는 길을 따라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함께 하면서 군인 차에 동승해서 내려왔습니다. 얼굴이 너무 얼어서 숲빛과 같이 시커매져서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평양 아주머니 어디 있나?] 하면서 찾아왔습니다. 아주머니 시키는 대로 했으면 이 고생 안 했을 것을 하고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이제 어디로 가면 좋겠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제가 그런 것을 알 리가 없습니다. 저는 답답하면 부처님을 생각하고 염불하여 자기 전에, 부처님께서 바른 길 가르쳐부십시오 하고 기도하고 자는 것 이상의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제가 서울로 떠나기 전에 옷 궤짝을 사고 살림을 장만하는 것을 보고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것 같다 하면서 비방을 했던 그들입니다. 그런 만큼 이렇게 일이 되고 보니 제가 마치 성현이나 되는 것처럼 존경하고 찾아오는 것이 우습기도 했습니다.
그 밖에 저는 부처님의 자비하신 등불을 수 없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도는 반드시 물질적인 욕심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의 자비하신 은혜만을 생각하고 일심 청정한 마음으로 기도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불자라면 이러한 경험이 다 있으리라 생각되므로 이만 줄이겠습니다.

󰊴 등불을 전하겠다
저는 자성의 도리를 깨달으려 힘 쓰고 있습니다. 그 전과 같은 무엇인가를 알고 구하는 기도는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청정한 마음으로 자성을 밝히는 공부에 힘쓰고 있으니 근래 꿈에는 맑은 그릇에 물이 철철 흐르는 것을 종종 봅니다. 아마도 제 마음 한 구석에 맑은 부분이 있는 것이 보이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저는 지금 믿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해탈의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더욱 깨달음의 행을 닦아서 부처님께서 받은 등불을 다시 남에게 전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나이가 많아서 앞으로 얼마를 살지는 모르나 그 순간까지는 이런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아마도 내 생까지 아니 더 먼 훗날까지도 저는 잊지 않을 것입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합장)